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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임자진리교회

2011.10.31 22:34

김성찬 조회 수:1489 추천:21


http://blog.daum.net/jndong/16587277

문준경 전도사의
교회 개척 사역

 

         지영태
문준경기념사업회장, 대초리교회 목사

 

문준경 전도사님은 1891년 2월 2일 신안군 암태면 수곡리 문진사댁 셋째 손녀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남다른 재질과 총명함이 빼어남은 물론, 재덕을 겸비한 비범한 아이로 조부모님을 비롯한 부모님, 그리고 동네에서도 매사에 뛰어난 기지를 발휘하는 귀염둥이로 행복하게 자랐다.

그러나 17세 어린 나이에 지도면 대초리 등선부락 정운기 씨의 삼남 근택 씨와 혼인하게 되었다. 결혼하자마자 도회지에서 직장생활을 한다는 핑계로 두 집 살림을 하는 남편에게 뜨거운 사랑 한번 받지 못하고 시댁에 묻혀 살던 문 전도사님은 바닷물에 뛰어들어 죽을 생각도 했지만, 그래도 친딸처럼 아껴주신 시어르신들의 사랑이 고마워서 죽지 못하고 살아오다, 시어른들도 돌아가시고 더 이상 시가에 머물 필요가 없어, 파란 만장한 20여 년의 시집생활을 정리하고 목포 북교동으로 이사를 나가서, 신학교를 갓 졸업한 이성봉 목사가 개척 시무하던 북교동교회에 입교하게 되었고, 북교동 초가 교회의 전도대원의 심방으로 한 곳 의지할 데 없는 그는 예수를 믿고 의지하기로 하였는데, 그날이 1927년 3월 5일이었다.

남편에게 받지 못한 사랑을 예수님을 통해 받고 보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신앙의 확신과 결단을 통해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하게 되었다.

1) 임자진리교회(『순교자 문준경』에서 인용)
은혜가 넘치고 성령이 충만하고 보니 도저히 그냥 있을 수 없어 신학교 시절부터 방학 때가 되면 고향으로 내려와서 복음을 전했다. 당시 성서학원의 수업방식은 독특한 것이어서, 1년 중 6개월은 공부하고 6개월은 개척교회에 나가 실습 또는 교회 신 개척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에 1930년 전도사님은 성서학원 첫 실습기간 중 임자면 진리에 첫 번째로 교회를 설립하게 되었다.

 문 전도사님에게는 하늘이 내려주신 아름다운 목소리가 있었다. 당시에 엠프시설이 어디 있겠는가? 라디오도 없는 시절이기에 해질 무렵 한가해진 틈을 이용하여 동네 어귀 언덕에 올라서서 ‘허사가’와 ‘천당가’ 그리고 ‘캄캄한 죄악 길에 목자 없는 양같이’ ‘예수사랑하심은’ 등등의 찬송을 즐겨 부르곤 했다. 목소리도 클 뿐더러 목청이 좋아 당시 구경거리가 별로 없는 때 문 전도사님의 찬송소리는 지금으로 말하면 인기가수들의 노래와 같았다고 한다. 노인들로부터 어린아이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문 전도사님은 신이 나서 끝절까지 다 부른 다음, 복음을 전하는 방법으로 전도를 하였다.

지금 진리교회 원로목사인 이인재 목사의 부친 이판일 장로님을 전도하여 진리교회를 지키게 하였고, 문 전도사님은 서울에 올라가 신학교 한 학기 수업을 마치고 방학 때를 이용하여 임자에 내려와서 다시 교회를 섬기는 일을 하였다. 결국 진리교회는 교회다운 교회가 되었고 이판일 장로님은 신실한 기둥 일꾼이 되었다.

6.25가 터진 뒤 그해 10월 5일 우리 국군의 반격에 의해 후퇴를 해야 할 섬에 남아 있는 잔류 공산당들은 문 전도사님이 증동리 백사장에서 순교하던 바로 그날, 임자면 진리교회의 기둥이었던 이판일 장로의 가족도 그들의 날카로운 눈초리의 주목 대상이 되어 끝까지 교회를 위해 남아 있던 이판일 장로와 이판성 집사의 두 가족 13명은 칠순 노모로부터 5세 철부지 어린아이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신앙의 절개를 지켜 공산당의 칼과 죽창 아래 쓰러져 장렬한 순교를 했던 것이다. 이때 임자진리교회에서는 성도를 포함하여 48명의 순교자가 탄생하였다.

신앙을 잘 가르치고 잘 배운 스승과 제자는 한날 주님 품에 안기게 되었다. 임자의 진리교회는 비록 황폐한 벌판에 세워진 작은 초가 교회였으나 48명이나 되는 거룩한 순교자를 낳을 만큼 견고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되었다.

지금은 교단에서 세워준 순교기념비가 교회 앞마당에 높이 세워져 있고 섬 교회 치고는 전남동지방 교회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대교회로 성장하여 박성균 목사의 지도하에 계속하여 복음의 깃발을 휘날리고 있다. 진리교회의 영향을 받은 임자면에는 현재 일곱 개의 성결교회가 세워져 복음을 전하고 있다.

2) 증동리교회(김두학, 김성용 장로 증언)
진리교회가 어느 정도 성장하자 문 전도사님은 1931년 9월에 증동리에 두 번째로 교회를 개척하였다. 맨 처음  큰 시숙인 정영범 씨에게 전도를 했다. 원래 문 전도사를 극진히 도와주었던 큰 시숙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하며 기꺼이 받아들였다. “제수씨가 믿는 종교라면 해로울 게 뭐 있겠소. 나도 그 종교를 믿고 제수씨 말대로 복받고 살아봅시다.” 그리고 그의 가족들까지 모두 예수를 믿게 했다. 증동리교회는 문 전도사의 큰 시숙과 큰 동서 질부들, 그리고 조카들이 집사로 봉사하면서 교회를 섬겨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이곳 증동리교회를 통해 증경총회장 이만신 목사, 이만성 목사, 그리고 교단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신 이봉성 목사, 또한 이경순 목사, 북교동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김 정 목사 등, 셀 수 없을 정도의 수많은 주의 종들이 배출되었다.

문 전도사님께서 순교하신 백사장의 모래를 퍼다 지은 증동리교회는 현재 김상원 목사가 시무하고 있으며 이곳 증동리교회를 통해 벌써 오래 전에 방축리교회와 염산교회가 개척되었다.

3) 대초리교회(조오형, 박민순 집사 증언)
1935년 2월 문 전도사님은 성서학원의 마지막 실습기간을 맞게 되었다. 이때 세 번째로 대초리교회를 개척했다. 대초리란 곳은 증동리와 연해 있는 작은 섬이다. 옛 지도에 보면 증동리는 후증도, 대초리는 전증도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지금이야 연륙되어 있지만 그땐 물이 빠져야 노두라고 하는 돌 징검다리를 건너서 다녀야 했다.

문 전도사님은 개척 초기에 이곳에 빈번한 왕래를 해야 했으므로, 종종 물때가 맞지 않으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노두머리에 앉아 기다리며 찬송과 기도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마침 대초리엔 친언니가 살고 있어서 숙식은 해결되었으며, 밤이 되면 동네 사랑방을 빌려 ‘천당가’를 부르고 ‘예수사랑하심은’ 찬송을 하고 전도를 하면, 좋은 구경거리라도 된 것인양 동네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그때를 놓치지 않고 문 전도사님은 복음전파에 열정을 쏟아 부었다.

이렇게 하여 교회가 세워지고 다섯 번에 걸쳐 교회가 옮겨지면서 지금은 지영태 목사가 시무하고 있다. 대초리교회를 통해 우전리교회와 장고리교회 그리고 화도교회가 개척되었다.

4) 병풍도교회(순교기념교회)
문 전도사님을 통해 증동리에서 은혜를 받고 신학공부를 하고 목회를 하던 김공신 전도사가 병풍도에 교회를 세우게 될 때 문 전도사님 순교기념교회라 이름하게 되어, 지금도 병풍도교회를 그렇게 부른다. 이 교회를 통해 직전 호남지역총회장 박훈용 목사, 현 호남지역총회장 박문석 목사, 그리고 성결신문사 기자로 활동하고 있는 조재석 전도사를 포함하여 교파를 초월한 수많은 주의 종들이 배출되었다. 이 병풍교회를 통해 기점교회와 소악교회가 개척되었다. 특별히 문 전도사님께서 순교의 피를 흘리신 증도면에 있는 교회들은 모두가 든든히 서가는 교회가 되어가는 가운데, 이곳 면민 90% 이상이 기독 신자이고 다른 종교는 일체 들어올 염두를 못 내고 있는 실정이다.

5) 기타 교회들(원산교회 박홍식, 자은제일교회 최장원 장로 증언)
우여곡절 끝에 이루어 놓은 교회가 어느덧 세 군데로 늘어났다. 또 교회에서 멀리 떨어진 성도들을 위해 곳곳에 기도소를 마련하였는데, 우전리기도소, 재원기도소, 방축리기도소 등이다. 이들은 문 전도사님이 일년에 아홉 켤레의 신을 떨치시며 돌아다니며 세워놓으신 기도소이며 지금은 모두 교회가 되었다. 또한 아랫섬이라 불리는 자은도와 암태도 팔금도까지 풍선(돛단배)을 타고 다니면서 어려운 사람들에게 힘이 되어 주셨고 위로가 되어 주셨기에 그가 지나는 곳마다 교회가 우뚝 우뚝 세워졌다.

문 전도사님의 친정인 도창교회가 8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며 우뚝 서 있고, 이 교회를 통해 팔금원산교회가 세워졌고, 자은에는 고장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 고장에도 역시 문 전도사님의 사촌언니가 살고 있었는데, 가까운 친척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했던 문 전도사님의 전도전략을 여기서도 살필 수 있다. 낙도 중의 낙도 작은 섬들의 영혼도 천하보다 귀하게 사랑했던 문 전도사님의 수고를 통해 자은도와 암태도, 팔금도는 다른 교파가 발을 붙이지 못할 정도로 동네마다 교회가 세워져 있다.

그리고 문 전도사님께서 다녀가신 동네에 세워진 교회는 너나할 것 없이 든든하다는 특색을 가지고 있다. 평소에 문 전도사님은 섬마을의 사랑의 사도이고 실천의 전도자이며 배고픈 자에게는 먹을 것을, 헐벗은 자에게는 입을 것을, 병든 자에게는 사랑의 의사로, 해산하는 집에는 산파로, 분주한 생활 속에서도 연로하신 어른들께는 부모님께와 똑같은 공경을 아끼지 않는 분이셨기에 가는 곳마다 인기가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렇기에 문 전도사님이 찾아간 동네마다 그렇게 심한 박해는 없었으며, 교회가 순조롭게 세워질 수 있었다고 증언자들은 말한다.

문 전도사님의 교회개척 사역에 대해 글을 쓰면서 한 가지 깨닫는 바가 있다. 그것은 문 전도사님은 내가 섬기는 교회만 크게 부흥시키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복음을 듣지 못하는 한 영혼을 위해 교회가 세워지지 않는 이 마을 저 마을 이 섬 저 섬 물불을 가리지 않고 눈보라와 폭풍우 속을 뚫고 다니셨다는 점이다. 이는 지금의 한국교회 현실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본다.

또한 우리 한국성결교회가 한국 사람에 의해 시작된 자생교단이라 자랑하는데, 그야말로 신안 교회들은 문 전도사님이 지나가면서 복음을 전하시고, 또다시 들리셔서 신앙을 독려하시고, 그러면서 마을마다 성도가 늘어가고, 은혜받은 성도들이 스스로 교회를 세우게 되었으며, 신학생도 부족하고 교역자도 턱없이 부족한 때라 개교회에서 열심히 충성하는 젊은 남자집사들을 이곳저곳에 파송하여 교회를 섬기게 하였고, 저들은 이곳이 나의 순교지려니 생각하고 물불 가리지 않고 기도하고 전도하여 교회를 교회답게 세워 나갔으며, 어려웠던 시절에 젊음과 청춘 다 바쳐 헌신한 결과 오늘의 교회들이 된 것이다.

지금은 문준경 전도사님께서 순교하신 전남동지방 증도감찰을 중심으로 하여 순교기념사업회를 운영하고 있으며 이 사업회를 통해 문 전도사님의 순교정신을 널리 전하기 위해 기념관을 건립하였고, 총회에서 세워준 기념비가 세워져 있으며, 순교현장에도 기념사업회에서 기념비를 세웠고, 지금도 교파를 초월하여 전국의 수많은 교회들이 이곳을 방문하고 있다.

교단적으로 ‘백주년 백만성결인운동’을 벌이고 있는 이때, 문 전도사님의 영혼사랑의 마음을 온 교회와 목회자들이 마음에 담고 힘을 쓴다면 우리 성결교단의 꿈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