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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54시숨으로만 충만하여라. 몸이여!! 

 

확신의 언어로 내뱉으며 아예 없는 확신을 ‘있음으로 없는 확신’으로 다져왔다고 여겼다. 없는 확신으로 내뱉은 확신의 언어가 과연 확신할 만한 언어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확신의 언어조차 내뱉을 수 없는 무기력한 자유에 처한 오늘에랴, 말해 그 무엇하리. ‘있음으로 없는 확신’이 그 본색을 드러내고 있다. 주문 외우듯 자기 최면에 빠져 사는 게, 존재론적 허무와 우울과 불안을 잠재우는 자기 확신의 수단이라면, 존재의 목적에 이르는 길을 역주행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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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립 보행할 수 있는 몸은 무너진 마음을 일으켜 세워주었으나, 제 발로 일어설 힘을 잃은 몸은 마음이 일으켜 세워주지 못했다. 마음이 아니라 몸이 죽는 게 죽음이다. 몸이 있어 마음이 있다. 몸과 함께 사라지는 마음. 몸살이란 말은 있어도 맘살이나, 영살이라는 말은 없다. 부활도 몸이 다시 사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다. 지구의 티끌 같은 육신들이 죽어가고 있다. 환도뼈가 부러져서, 호흡이 막혀서, 종양이 만건곤해서 등등. 회한과 탄식으로 밤샘한 개운한 맛 없이 홀로 밝아오는 동창을 맞다가 결국 구름 낀 석양 맞이로 연이어지는 생의 종언을 담담히 늘어놓고 있는 육신들.
한 줌 먼지로 돌아갈 육신이 어찌 그리도 무겁고 벅찬, 숱한 맘의 고뇌를 여린 한 몸에 짊어졌던가? 몸이 영혼의 감옥이라는 허위 사실로 덧칠한 능멸을 어찌 몸이 당연하게 받아들였던가? 하루 더 산다는 건 하루 더 죽는다는 것. 몸이 죽는다는 것. 다 털어버리자. 생각을 지워버리자. 치매를 자청하자. 몸을 생각에서 풀어놓아 자유케 하라. 죽어가는 몸이 몸 가는 대로 몸을 살게 하라. 그래, 육신의 족쇄인 영혼에서 벗어나라.
일어나라.
문을 박차고 나가라.
대지를 호흡하라.
뛰어라, 숨만 차도록. 숨이 찰 때까지.
숨으로만 충만하여라.
몸이여!!
2024.02.18(주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