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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듀adieu 총회 2.
제114년차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회
2020.05.27.(수)
과제 2 <순교자 문준경 전도사 혼인 애사(哀史) 바로잡기>
내가 총회를 앞두고, 내가 부탁 받은 과제 두 건의 과제 중,
다른 하나는
<순교자 문준경 전도사 혼인 애사(哀史) 바로잡기>였다.
그런데 코로나19 방역 총회 탓에 나는 이 과제를 수행하지 못했다. 사흘 동안 진행해야 하는 총회를 단 하루에 마쳐야 했기에, 이 과제에 대해 발언할 기회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니, 회의 첫 시간 질의 응답 시간에 역사편찬위원회와 대화를 나눌 수는 있었는데, 촉박한 회의 시간이 내게 이타적 배려심(?)을 발동시켜서 나는 그만 발언을 절제하고 말았다. 하여, 그 과제를 페북에서 푼다.
또 묻는다.
왜, 나에게?
과제를 안고, 나를 돌이켜보니,
나에게도 자격과 책무가 있었다.
나는 총회 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고, 무엇보다도 순교자 문준경 전도사님의 신앙고백과 삶의 세례를 받은 어머니(故 전납실 전도사)를 둔 아들 목사이기 때문이다.
이미 나는 순교자 문준경 전도사의 혼인 애사(哀史)에 대한 진실 된 역사적 사실과 그 해석을 페북에 두 차례에 걸쳐서 포스팅했다. 그 글에서 나는 우리 교단에서 정사(正史)로 받아들이고 있는 순교자 문준경의 혼인 애사가 명백하게 잘못 기록 되었다는 사실을 밝혔고, 그 바르게 밝혀진 혼인 애사에서 순교자 문준경의 삶 자체가 온통 순교적이었음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해석을 나는 덧붙였다.
순교자 문준경 1 소박(疏薄)과 시앗 2020.05.12.(화)
순교자 문준경 2 문심(文心)과 예심의 복음적 연관성에 대해 2020.05.13.(수)
위 두 편의 글은, 이 글 말미에 첨부한다.
ㅇㅇㅇㅇ
내가 순교자 문준경에 대해 발언하려고 한 요지는 이렇다.
〈순교자 문준경-혼인 애사(哀史) 바로잡기〉 작업을 총회는 거부하지 말라,는 당부다.
총회가 역사 바로잡기를 거부하는 이유가 내 생각으로는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하나는, 기존 혼인 애사가 지닌 드라마틱한 요소 때문일 거다.
순교자가 소박(疏薄)을 맞았다는 신파적 요소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측면에 있어서, 보다 효과적이라는 해석을 포기할 수 없어서가 아닌가 싶다. 그러나 순교자가 소박(素朴)도, 이혼(離婚)도 당한 적이 없는, 호적이나 족보상에도 여전히 정 씨 가문의 며느리이며, 자신이 남편을 설득해 중매해 준 시앗을 통해 가슴으로 낳은 7남매의 어머니라는 사실은 결코 부인해서는 안 되며, 바로 그런 점이 순교자가 될 만한 순교적 생애를 살았다는 해석이 오늘에 있어서, 순교자를 더 빛나게 하는 해석이라는 점이다. 이미 쓴 글에 자세하게 나는 정리했다.
이유가 어쨌든, 역사는 바로 세워야 한다.
내가 겪은 그 일례다.
내가 총회 역사편찬위원장 시절에 중차대한 역사 바로 세우기, 이의 제기가 있었다.
그 이의 제기는 이랬다.
“한국성결교회는 만국성결교회의 직계자손이다”라는 「한국성결교회 기원, 그 배경」에 대한 이의 제기가 홍용표 박사에 의해 학문적으로 제기 되었다. 그리고 그 이의 제기에 동의를 표명한 몇몇 교수들을 중심으로, 서울신학대학교 강의실에서도 그 이의 제기가 정사(正史)로 정립 되지 않은 상태에서 전개되었고, 교단 총회 본부에서도 나름 그 이의 제기에 동의를 표하고 있었다. 이렇듯, 교단 정사(正史)에 대한 이의 제기로 신학교와 교단이 큰 혼란을 겪고 있었다.
나는 그 논란 공방을 지켜보다가, 그대로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 어떤 기관이나 사람도 그 논란을 바로 정리해 줄 권위를 갖고 있지 않았다. 오직 유일한 권위는 총회 역사편찬위원회에만 있음을 나는 인지했다. 하여, 홍 박사를 발제자로 세운 비공개 심포지엄을 기획했다. 당시 총회 관계자들이 나의 그 기획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지만, 나는 강행했다.
단 한 가지 이유,
만일 홍용표 박사가 제기한 이의가 100% 진실 된 역사적 사실이라면, 교단 정사(正史)를 바꾸어야 한다 는 입장에 공고하게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100% 진실 된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면, 여기서 그 논란을 정지시키겠다는 결단으로, 나는 그 기획을 추진했다.
.
때는, 2012년 11월 22일(목). 장소는 서울신학대학교 우석기념관 강당에서, 「한국성결교회 초기 역사에 대한 심포지엄」이 비공개로 개최 됐었다. 발제 : 홍용표 박사, 논찬 1 : 박명수 교수, 논찬 2 : 주승민 교수. 사회 : 김성찬 위원장(총회 역사편찬위원회). 대상은 총회 임원 및 역사편찬위원회 위원, 서울신학대학교 총장을 비롯한 교수들로만 한정했다. 주최는 당연하게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역사편찬위원회였다.
그 결과 홍용표 박사의 학문적 노력이 그같이 발전적 심포지엄을 가능하게 했으나, 우리 교단 정사(正史)를 바꾸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날 심포지엄을 정리하면서,
나는 총회 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의 자격으로,
〈발제자 홍용표 박사와 서울신대 일부 교수들에게, 더 이상 교단 공식 입장에 반하는 이론(異論)을 교과목에 넣지 말고, 교내외적으로 가르치지 말 것〉
을 명백하게 권고했다.
그 권고는 단호한 행정명령이었다.
둘, 순교자의 혼인 애사(哀史)를 고치려다 보니, 돈이 들어간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교단은 돈을 좀 제대로 써라.
연도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지금부터 10여년 전후 나는 총회에서 우리 교단 로고를 바꿔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리고 그 동의가 총의로 가결되어 성립됐었다. 그 후 총회는 교단 로고 공모까지 했다. 그런데 그 후 아무 진전이 없었다. 돈 때문에 교단 로고 바꾸는 결의를 없었던 것으로 해버렸다는 거다. 내가 동의한 교단 로고에 대한 제안은, 개신교 어느 교단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로고를 우리는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교단 로고에만 십자가가 없다. 가시밭의 백합화만을 형상화해 놨다. 무슨 백합 동산 로고 같다. 교단은 교단 로고에 십자가를 넣기로 했던, 지난 총회의 결의를 다시 지켜야 한다.
돈? 무슨 총회장 정책사업(?정확한 명칭은 모르겠다)에 수억 원의 돈을 총회는 쏟아붓고 있다. 말이 안 된다. 적어도 총회장쯤 되면, 그런 사업은 자기가 담임하고 있는 교회나 개인 돈으로 행해라. 총회장 정책사업비 같은 돈, 이제 총회 발전적 행정을 위해 몇 해만 모으면, 교단 로고 바꾸는 사업도, 순교자 혼인 애사 바로잡는 일쯤은 넉넉히 할 수 있지 않겠느냐?
내가 맡았던 역사편찬위원회에 당시 배당된 총회 예산이 일년 회기 1,400만 원에 불과했다. 그 작은 돈으로 전국에 순교유적지를 관리해야 했고, 교단 역사 바로세우는 심포지엄까지 개최했었다. 참고하고, 개선하기 바란다.
다시 말해, 돈만이 문제가 아니다. 역사는 반드시 진실 된 사실을 기록해야 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 왜곡 된 역사 기술로 인해 명예를 훼손당하고 있는, 이해 당사자인 정 씨 가문이 여전히 건강하게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준경의 친정 암태도의 지주 문 씨 가문의 유력 인사들이 뒤늦게 이 사실을 인지하고, 자신의 가문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순교자 문준경 혼인 애사(哀史) 바로잡기에 힘을 함께 모으고 있다고 한다. 우리 집안이 어떤 가문인데, 소박을 맞을 수 있었겠는가? 그들은 인내하고 있다. 그러나 교단이 역사 바로잡기에 능동적으로 나서지 않을 경우, 그들은 법정 투쟁도 마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명문 부호 가문이다. 더 큰 돈 들여 망신 당하기 전에 교단은 〈순교자 문준경-혼인 애사(哀史) 바로잡기〉 작업을 서둘러라. 차기 역사편찬위원회 위원들과 위원장은 교단 역사 바로 세울 인물이 반드시 선정 되어야 한다.
2020.05.29(금)
김성찬
ㅇㅇㅇㅇ
순교자 문준경 1
소박(疏薄)과 시앗
2020.05.12.(화)
소박(疏薄)
소박(疏薄)의 사전적 의미는, 남편에게 박대를 당하다,이다. 신랑에게 소박을 맞은 신부. 소박은 첫날밤과 궁합이 잘 맞는다. 신랑에게 첫날밤에 소박을 맞은 신부. 거기다 더해 소박(疏薄)을 놓은 신랑들은, 대체로 바람둥이다. 극적인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서사적 장치에 있어서, 첫날밤에 소박을 맞은 여인은, 매우 요긴한 신파적 양념이다.
첫날밤에 신랑에게 <소박>을 맞은 <순교자> 문준경.레알 드라마틱하다.
“문준경은 1891년 전남 신안군 암태면 수곡리의 문재경 씨의 3남4녀 중 3녀로 태어났다. 1908년 17세에 한 살 연하인 정근택과 결혼하였다. 이 결혼에 대한 상당한 오해가 있는 것 같다. 문준경 관련 최초의 책자인 『섬마을의 순교자』에서 시댁은 유복한 가정이었고, 시어른들은 며느리를 사랑했지만, 남편은 처음부터 외도하며 딴 여자와 살림을 차린 바람둥이로 묘사되고 있다.(중략)그리고 문준경에 대한 최초 영상물인 <시루섬>에서는 정근택은 이미 결혼 전에 임신한 내연녀가 있었으며, 신혼 첫날밤부터 부부의 도를 거부한 바람둥이로 묘사되고 있다.(중략)이렇듯 그간의 각종 기록물은 공통적으로 문준경의 결혼 생활이 정상적이 아니었다는 오해와 설명을 내놓고 있다. 동시에 정근택을 비윤리적인 인물로 그리고 있다.”(정원영 지음, 『영원한 전도자, 하나님의 사람 문준경』 pp. 232~234)
그러나, 이미 굳어진 그 신화에 반하는 진실 된 역사적 사실, 그 명백한 증거 자료를 들어대며, 이의를 제기하는 이가 있다.
정원영 목사.
그는 정근택 자녀들의, 가문의, 한 동네 사람들의 허다한 증언을 녹취해 풀어 놓고 있다. 이들이 서남권 해상왕 정근택 씨의 명예를 실추시킨 그 드라마를 수정해야 한다고, 역사적 증언과 근거 자료들을 흔들며 항변하고 있다.
“처남(정근택), 처남댁(문준경)이 시아버지 삼년상을 치르면서 무슨 생각을 안했겠는가?
어느 여인이라고 둘째 부인 들이는 것을 좋아하겠는가? 처남댁(문준경)이 처남(정근택)을 생각하고, 집안의 대를 생각하고 내린 결정이니 부디 거절하지 말게나, 자네(정근택)가 이마저 거절한다면 처남댁(문준경)에게 또 한 번의 상처를 주는 게 될 걸세.”(정원영 지음, 『영원한 전도자, 하나님의 사람 문준경』 p.56)
시앗-씨앗을 보기 위해 시앗을
시앗의 사전적 의미는, 남편의 첩,이다.
문준경은 10여 년 이상 건강한 부부 관계를 지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몸으로는 정 씨 가문의 대를 이을 수 없다 결론을 내린다. 그런 와중에 시아버님의 장례를 치르면서 더 굳어진 결단으로, 문준경은 가문의 대를 잇는 정근택의 씨앗을 보기 위해 시앗을 두라고 남편을 설득한다. 동시에 문준경이 나서서, 출산 능력이 검증 된 과부를 간택한다. 문준경은 사별한 남편 사이에 아들 하나를 둔 과부를 남편의 시앗으로 천거한다. 정근택은 거부하다가, 결국 받아들인다.
문준경은 시앗이 남편 정근택의 첫 씨앗을 출산하자, 손수 그 아이를 받는다. 이같이 가문의 대를 잇고자 하는, 문준경의 모진 의무감에 감동한 큰 시숙이 그 첫 아이의 이름을 ‘문준경의 마음’이라는 의미인, ‘문심(文心)’으로 지어준다.
이상이 부인할 수 없는 문준경 결혼사에 대한 진실 된 역사적 사실이다.
이 외에도 역사적 근거 자료와 증언들이 적잖다.
1943년도, 교단 해산 목적으로 일제가 재림론을 문제 삼자 진행 된, ‘형사재판소송기록(광주지방법원)’에도 문준경이 정근택과 10년 이상 부부관계를 유지했다는 신상 기록이 남아 있다.
그리고 호적과 족보에도 문준경이 정근택의 본처로 여전히 기록되어 있다. 둘째 부인에게서 낳은 자녀 7남매도 모두 문준경이 법적 어머니로 되어 있다.
어제 만난, 『영원한 전도자, 하나님의 사람 문준경』의 저자 정원영 목사의 진술을 통해, 나는 더 명확하게 문준경 전도사의 일대기를 확인할 수 있었다.
교단 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으로, 문준경 순교기념관 건립에도 행정적으로 일조했던, 나는 그동안 정사(正史)처럼 여겼던 문준경 스토리에서, 첫날밤에 소박맞은 여인에게 어떻게 그녀의 시댁이, 자원한 복음 전도의 든든한 후원군이 되어 줄 수 있었을까?라는 강한 의구심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그런데 오늘, 정원영 목사의 증언을 들으며, 그동안 홀로 품었던 내 합리적 의구심이 완전히 해소됐다.
정근택 씨의 명예를 회복시켜 달라고, 그 자녀들은 호소하고 있다.
동의한다.
2020.05.12.(화)
ㅇㅇㅇㅇ
순교자 문준경 2
문심(文心)과 예심의 복음적 연관성에 대해
2020.05.13(수)
문준경의 새로 밝혀진 숭고한 혼인 애사(哀史)는,
오늘에 우리의 귀감이 된다.
깡패가 예수 믿고 개과천선해 부흥사가 되어 강단에서 불을 토하던 시기는 이제 지났다. 첫날밤에 소박맞은 팔자 사나운 여인이 예수 믿고 팔자 고친 신파는 이제 별 감흥이 없다. 이 시기는 인품도 좋고, 신앙도 좋은 사람이 각광을 받아야 한다는, 시의적절한 기독교 세계관이 빛을 발하는 시기이다.
문준경이 복음의 씨암탉이 될 수 있었던 인간적 배경을,나는 그녀의 혼인 애사에 얽힌 새 이야기에서 발견한다.
문준경이 첫날밤에 내연녀가 있는 신랑에게서 소박을 맞았다는 이야기로는, 그녀의 순교사를 온전히 해석해 낼 수가 없다. 소박(疏薄)을 맞았다는 말은, 예를 들어 교통사고처럼, 그 귀책사유[歸責事由]가 어느 한 편에만 100% 있을 수 없다는 말처럼 들린다. 신랑에게만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신부에게도 뭔가 꺼림칙한 사유가 있지 않았겠는가, 뒷담화를 늘어놓을 여지가 있다. 뒤에서 받혔어도, 2:8이나, 1:9 정도의 귀책사유가 있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순교자 문준경이 적어도 첫날밤에 소박을 맞지 않았다는 진실 된 사실이 말이다. 더한 반전은 문준경이 대를 이을 수 없는 자신의 생리적 결함을 냉정하게 인정하고, 앞장서서 시앗을 들여서라도, 남편에게 가문의 대를 이어가게 했다는 사실에 있다.
나는 바로 이 숭고한 대목에서, 석녀(石女) 문준경이 순교자요, 복음의 씨암탉이 될 수 있었던, 고매한 인격을 발견한다. 그렇다. 그 시앗까지 자원해서 품을 수 있는 넉넉한 인품을 갖춘 여인이었기에, 그녀는 품 넓은 복음의 씨암탉일 수 있었다. 성령의 불 받았다고, 인격까지 통째로 변하는 경우를 우리는 거의 본 적이 없지 않은가?
사람 좋고, 신앙까지 좋은 사람이 문준경이었다.그 품 넓은 인격과 신앙을 우리는 그녀의 일대기에서 본다. 석녀(石女) 문준경이 자손 번영을 위해 시앗을 앞장서서 들였다.죄인(罪人) 문준경이 자신의 양떼들을 살리기 위해 백사장에 자원한 순교의 피를 뿌렸다.
자원하여 시앗을 받아들인 본부인의 품이 얼마나 넓었던가?그녀는 몸으로 낳은 자녀는 하나도 없었지만, 마음으로 낳은 자녀가 무려 7남매나 됐다.
자원하여 양떼들을 살려내려고 백사장에 순교의 피를 흘린 그녀의 품이 얼마나 넓었던가?그녀가 몸으로 낳은 자녀는 하나도 없었지만, 그 해변의 모래알 같이 많아진 그녀의 영적 후손들이, 오늘 증도를 넘어, 한반도와 지구촌 곳곳에서 순교적 헌신을 아끼지 않고 있지 않은가?
문심(文心)과 예심의 연관성에 대해
내 가슴이 뛴다.
그렇게 그녀는 남편의 시앗이 낳은 첫 아이를 손수 받아냈고, 그 광경을 옆에서 지켜 본 큰 시숙이 그 영아의 이름을 ‘문준경의 마음-문심(文心)’으로 지어줬다는 사실에,
나는 단언한다.
그 문심(文心)이 있었기에, 문준경은 예심(예수의 마음)을 품는 순교로 목양을 완수할 수 있었다. 그런 그녀였기에, 시댁 식구들이 그녀의 복음 전도에 적극적인 협력자가 되지 않았을까? 그동안 내가 품어 왔던 합리적 의구심, 소박을 맞은 여인의 선교 사역을 시댁 식구들이 왜, 어떻게, 그렇게 도울 수 있었을까?라는 의구심이 이렇게 말끔히 해소되었다.
역사는 기억이 아니라, 기록으로 남는다.그리고 역사적 사실은 진실 된 사실대로 기술 되어야 한다.
더군다나, 오늘에도 문준경의 자기를 비운 혼인 애사(哀史)는 여전히 복음적 연관성과 선교적 효용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소박(疏薄)을 뛰어 넘은,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문준경의 혼인 애사(哀史)와 순교사는 이상과 같이, 현대에도 적용이 가능한 고등한 복음 해석을 세상에 선사할 수 있다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래,그녀의 삶과 신앙이 '그리스도의 케노시스(자기 비움)'를 거반 닮았기에.
2020.05.13(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