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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서울북지방회 - 아〜아, 서울북지방회

2008.10.06 21:50

김성찬 조회 수:1689 추천:30

영혼일기 86: 아〜아, 서울북지방회

2008.10.06(월)

 

 

아〜아, 서울북지방회.

난 보다 더 젊은 날, 근 10여년을 그곳에 몸담았었다.

활화산처럼 열정이 넘치던 시절. 난 그 신앙공동체의 신앙적 성숙을 위해 헌신했었다.

 

‘교사대학’

우린 라면을 끓여 먹어가면서 서울북지방회의 신앙교육적 성장을 위해 몸을 내 던졌었다. 그 선봉에 내가 있었다. 그러나 난 어느 날, 울며 그 강의록을 불태우고 있었다. 그 아까운 내 신앙교육적 비망록. 난 한참 후에 후회를 했다. 그 교재 여백에 촘촘히 기록해 뒀던 내안에서 농익은 교육적 산물들까지 불 태워 버렸기 때문이다. 한 권의 책으로 묶어도 넉넉한 보배로운 나만의 경험적 지식을 난 그렇게 날려 버렸다.

 

이유인즉슨, 그 분서갱유사건을 범하던 시절, 난 그 공동체에서 벗어나 홀로 외계를 맴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지방회가 깨어진 것이다. 내가 참석하지도 않은 지방회에서 만장일치로 분할을 결의하고, 그 지방회가 분할을 위임한 분할 위원들이 분할 안을 다수가결로 정하여, 지방회의록에 그 분할 안을 삽입해 개교회로, 지역총회로, 총회로 다 보냈었다. 지방회 분할. 모든 것이 합법적으로 다 끝난 것이었다.

 

난, 그 지방회의록에 새로 신설된 강북지방회에 속해 있었다. 그 분할 안이 다소 강북에 불리한 안이었지만, 난 수용했고 분할 지방회의 개최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뒤집기 한 판이 시도된 것이다. 소위 당시 서울북지방회를 주름잡고 있던 교권주의자들이(그 지방회의 분할에 결정적인 원인 제공을 했던 이들이) 그 만장일치의 결의를 뒤집기 시작한 것이다.

 

이유가 구구하고, 구차했다.

난 지역총회장을 해야 하니까, 저쪽으로. 분할 안이 해괴하니까 다시. 서무부를 거치지 않았다는 생트집으로. 그 생트집을 총회 헌법연구위원회로 넘기더니, 그 총회 헌법연구위원들이 몇 차례 억지 힘겨루기 끝에, 성문법보다 우선한 관례까지 깨뜨리고, 명문화된 헌법조항까지 정치적, 불법적으로 해석해 내어 그 생트집을 적법한 것으로 해석하는 촌극을 벌였다. (이런 구체적인 사례, 그 부도덕한 힘의 역학관계에 대한 생생한 기록이 내 옛판 파일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또한 총회 협의기구인 한국성결신문은 당연한 듯, 그 권력에 힘을 실어주었다. 그 당시 그 신문사 기자로 있었다가, 충청도로 목회를 나간 한 후배 고아무개 목사가 한참 후에 나에게 뜬금없이 전활 걸어와 이렇게 말했다. “그 당시 우리 한국성결신문이 잘못한 것도 있고, 암튼 선배님 예전처럼 활발히 활동해 주십시오.”

 

난 강북지방회 소속의 일원으로, 만장일치의 결의를 준수하지 않는 공동체에는 내일이 없다, 라는 취지의 호소문을 그들에게 발했다. ‘기억하고 지키라’라고.(그때의 상황을 세밀하게 언급한 이 글도 지금 내 파일에 남아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결국 그 합법적 분할 안이 행정구역답지 않게 나뉘어졌다라고, 다된 밥에 재를 뿌려대던 자칭 원칙주의자들과 헤쳐모여를 꿈꾸던 강북세력들이, 어느 날 밤새워 교회쟁탈전을 벌이더니 결국 헤쳐모여로 가버리고 말았다. 원칙도, 합법도, 상식도 없는 만행을 도모한 것이다. 블랙코미디를 연출한 것이다. 그 사태를 겪고 난 한 후배는, 이렇게 내 앞에서 푸념을 늘어놓았다. “이제 이런 사태가 다시 발생하면 가만히 엎드려 있다가 힘 센 놈들 편에 붙어버려야지.” 이 말이 그 비열한 사태가, 순진한 후배들에게 던져준 유일한 교훈이었다.

 

하여 난 홀로 남았다. 그 어느 쪽에도 가담할 수 없었다. 알량한 내 명분은 날 외톨이로 만들었다. 양비론, 양시론. 필론의 돼지가 따로 없었다. 난 불에 타 사라지던 내 열정과 헌신 앞에 억울하고, 분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이런 신앙 윤리는 고사하고, 일반 상식도 없는 인간집단을 위해 쏟아 부은 그간의 내 신앙교육적 헌신이 너무도 아까웠기 때문이었다.

 

그 후 간간이 양편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너무도 처절했다. 이전투구. 적의 적이 동지가 되는 세상 정치판 같은 요지경이 그들 안에서 재현되고 있었다. 그리고 강북패밀리는 마피아의 수준은 넘나들며 지방회를 넘어 총회까지 농락하는 조폭적 행위를 일삼고 있었다.

모처럼 내가 지역총회를 나갔던 날도 예외가 아니었다. 살벌했고, 그 뭔가 약점을 물린 지도급 인사들은 그들의 공갈에 운신도 못하고 있었다. 도저히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늙은 선배 한 사람이 방금 문 앞에서 후배에게 폭력을 당했다고 앞좌석으로 나와 그 수치를 호소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수백명의 지역총회 대의원 중 그 누구 하나 그들의 악행을 성토하는 사람이 없었다.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다들 그들의 폭력이, 계략이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그 선배만 추해지고 있었다. 정말 웃지도, 울지도 못한 촌극이 벌어지고 있었다.

 

순간 난 분연히 떨치고 앞으로 나아가 마이크를 잡았다. 이 지경에 이르게 된 몰상식한 분열의 배경을 한줄 설명했다. 그리곤 소리쳤다. “저기 지금 강북 때문에 흥분해 마지않고 있는 서울북지방회는 불법적 다수가 표준이 된 동네다. 이 모든 사태의 원인이 저들에게서 나왔다.” 이렇게 나는 서울북지방회 지역총회 대의원석을 향해 일갈했다. 그리고는 “저 강북사람들. 이제 그만 행패를 부려라. 그간 교권에 당한 피해, 새 지방회 구성으로 위로받고 더 이상 행패를 부리지 말아라. 만일 그런 행패를 계속 부린다고 한다면, 저런 강북은 해체되어야 마땅하다.”

 

나는 목청을 높였다. 우레 소리 발하듯 그들을 책망했다. 억눌렸던 감정도 크게 한몫 했다. 어느 장로님께서 그후 내 배를 만지며 “무슨 뱃보가 그렇게 크냐”라며 웃어댔다. 그런데, 나의 그 즉흥적인 성토에 대해 놀랍게도 양쪽 지방회 사람들이 모두 다 말 잘했다고 나를 격려했다. 기이한 일이라 생각했다. 한쪽은 분할 명분을, 다른 한쪽은 그 행패에 대한 책망에 통쾌하고 신이 났던 것이다.

 

정말 그 조폭적 압력 앞에 그 누구도 찍소리도 못하던 분위기에서 비느하스의 분노를 재현한 나에게 그들은(지역총회가) 강한 위로를 받은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내가 큰소리 칠 수 있었던 것은, 나 밖에는 그렇게 말할 권리와 자격을 지닌 사람이 그 수 백 명이 모인 지역총회에 단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런 아비규환의 현장에 나간 것은, 순전히 그 분열의 후유증 때문이었다. 난 외출을 삼가고 있었다. 지역총회도, 옹색하게 몸담은 서울중앙지방회 정기 지방회 조차 나가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내 집 앞에 그 누가 차를 대기 시작했다. 강북에서 파직출교 당하고, 내 쫓김을 당한 목사 세분이 나에게 구원을 청한 것이다. 그래서 그 지역총회 날에도 내 집 앞에 차를 대고 지원을 요청하는 그들을 위해, 난 잠바를 걸치고 길 나섰던 것이다.

 

그 후, 강북은 내 예언대로 해체됐고, 난 강북에서 월남한 친구들을 영접하는 일에 한 몸을 내던졌다. 난 요셉을 생각했다. 홀로 애굽으로 팔려 온 그를 통해 그 민족이 일시적으로(무려 430년이지만) 구원을 얻는 장면을 기억해 냈다. 홀로 외롭고, 온갖 오해와 비방 속에 견뎌 낸 세월이, 저들 북에서 핍박받은 이들의 길을 예비한 세월이었다고 자평했다. 바로 엊그제도 이제 마지막 망명자인 최아무개 목사가 나에게 전활 걸어왔다. 이제 사면되었고, 남하하겠다고 좀 도움이 되어 달라고 말이다. 난, 우리는 그를 정말 따뜻하게 맞이할 것이다. 그리고 그가 새론 서울중앙지방회에서 안온하게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최선 다해 도울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의로운 투쟁을 하다 희생 제물 된 이들이기 때문이다.

 

그 잘못된 분열 후유증은 지금도 여전하다. 행정구역으로 나뉘지 않아서 코앞의 교회도 동네 안의 남이다. 우린 죽기 전에 원망없이 회개하고 주의 길을 평탄케 해야만 한다.

 

내가 느닷없이 아〜아, 서울북지방회, 라고 탄성을 자아내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이제 그 본론에 들어간다. 서론이 길다는 말은 그만큼 맺혀 있다는 말이 아닐까?

 

난 서울중앙지방회 목사 부회장이다. 그래도 좋은 사람이 나쁜 사람보다 더 많은 곳이 인간 세상이라서 내가 여기까지 왔다. 그래서 어제 주일 오후에 남양주 새사람교회 담임목사 취임예배엘 갔었다. 예배 순서 중 하나를 맡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뜻밖에 호원교회 성도들 천지였다. 오승택 목사님께서 호원교회에서 5년여 교역자 생활을 하셨단다. 그래서 김승훈목사님과 전재국 목사님을 반갑게 만났다. 그런데 예배 후, 젊잖은 중년 신사 한 분이 앞 마당 한 켠에 있던 날 찾아 왔다.

 

장수만 장로.

호원교회 장로님이셨다. 그 분이 나에게 한동안 그 마음에 품은 이야기를 쏟아 놓으셨다.

 

“목사님의 열정적인 가르침 때문에 제가 장로가 됐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분의 눈시울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그분은 내가 그 서울북지방에서 교사대학에 앞장섰을 때, 그 수강생이었다고 말씀하셨다. 그 가르침. 강직하고 타협 없는 올곧은 신앙교육정신을 잊을 수 없다시며, 그분은 날 잊은 적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아니 그 가르침이 없었더라면 자신은 장로가 될 수 없었을 거라고도 말씀하셨다. 그 지방회가 분열한 후, 내가 어디로 갔나 관심을 쏟으셨고, 내가 강북이 아니라 중앙지방회로 갔다는 말에 한편으로 마음이 놓이더라는 말씀도 하셨다. 그러면서 그분은 늘 자신은 그 김성찬 목사의 행적을 추적하고 있었다고 덧붙이셨다. 그분은 쉽게, 겉치레로 나를 대하지 않으셨다. 내가 오히려 부담스러울 정도로 그분은 꽤 긴 시간 나를 붙들고, 눈물을 글썽이며 감사에 감사를 전했다.

 

정말 감사했고, 감격스러웠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의 추수의 감격을 난 맛보았다.

정말 난, 우리는 순전하게 아무런 보답도 기대하지 않고 뛰고 또 뛰었었다.

분열의 어둔 그림자가 인간의 욕망을 덮칠 때, 난 사력을 다해 막아내려 했었고, 결과적으로 나만 바보가 되어 광야로 축출 당했지만, 적어도 나는 악행을 도모하지도, 반칙에 가담하지도 않았었기에, 하늘 우리 아버지께서 이 애굽 땅에서 날 이주자들의 위로가 되게 하신 것이라 생각해 본다. 잘 살지는 못했지만, 그리 못 산 것도 아니다.

 

서울북지방회 교사대학.

그 신앙교육의 산물은 불타 사라지고 말았지만, 그 신앙교육의 혼은 살아 이렇게 감동을 자아내고 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고린도전서 15장 58절

 

내 애증 덩어리 아〜아, 서울북지방회!

그 어떤 선배는 나에게 “우린 김목사를 여전히 형제로 여기고 있어”라고 날 여전히 식구로 인정해 주셨다. 이젠 그 애증의 당사자들이 다 사라지고, 새 사람들로 채워져 가는 내 영혼의 고향. 우리 그 통일은 아직 멀었어도, 우리 우선 연합이라도 해 봐야 하지 않을까? 그 남하한 이주민들끼리는 내가 쥔장이되어 가끔씩 회동하고 있는데. 적어도 만나고는 있는데.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편 133편 1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