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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2: 그냥~, 그 부사적 삶의 묘미

2010.07.23 09:09

김성찬 조회 수:1749 추천:60

영혼일기 572: 그냥~, 그 부사적 삶의 묘미
2010.07.22(목)

안부를 묻습니다. ‘그냥~’ 혹서☀에 구사일생하시길♥김성찬


‘그냥~’에 의지하여, 무차별적인 나를 거의 모든 너에게 보냈다. 아무런 대가나 조건 또는 의미 따위가 없는 ‘그냥~’을 선용했다. 근데 ‘그냥~’은 마법처럼, 나와 너와 사이에 존재하는 상호검열을 일순 무력화시켜버렸다. 마치 비무장지대의 무장을 해제시켜버리듯, ‘그냥~’은 ‘나에게 그것(It) 된 너’ 사이에 존재하던 그 마음속의 안전거리를 없애버렸다.

그랬다. ‘그냥~’의 힘은 컸다. 없던 용기를, 없던 관심을, 없던 마음을 불러냈다. 지은 맘으로는 불가한 만용을 스스럼없이 저지르게 했다. 목적이 이끄는 삶인 명사적 삶으로는 가당치도 않는 낭비를 즐기게 했다. 그래 부사적 삶이 참 쉽다 생각됐다. 내가 주도하고, 내가 목적이어여 하는 교서(敎書)를 내리는 일만 중시하는 의도적인 삶에서 한 발 뒤로 물러서니 맘이 허허로운 감미로 가득 채워졌다. 나를 부사로 삼는 ‘그냥~.’ 부사(副詞)인 나를 저들에게 날린 이 행위의 주체는 분명 내가 아니었다. 나는 살아오면서 문자를 종종 날리곤 했다. 그러나 오늘처럼 ‘그냥~’보낸 적은 없었다. 늘 의도가 명백했고, 주어는 항상 나였다. 근데 내가 더위를 먹었나 보다. 나를 부사삼은 오늘의 말 걸기의 주체는 내가 아니었다.

 

그 근거는 이렇다. 더위 먹은(?) 내가 아무 의도 없이 무심결에 내던진 구사일생 운운에 뜻밖의 퀵백(Quick Back)이 답지했다. 디지털 시대는 과연 ‘퀵Quick)’과 ‘피드백(Feed Back)’의 시대다. 문자가 다 날아가기도 전에 답장메시지가 접수됐다. 그 가운데 이런 감정이입이 입력되어 있었다. 그가 낚였다. 무심코 흐르는 강물에도 낚이는 물고기도 있다니.

“건물이 커서 정말 구사일생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감사합니다. - 아무개”

그 아무개가 걸려들었다. 불특정다수를 겨냥한 말 걸기가 특정한 소수의 동의를 득했다. 젊은 날 이런 매체가 있었다면, 나는 그 사랑을 놓치지 않았을 터. 그 숨은 사랑의 고백을 접수했을 터. 아 쉽 다.

건물이 커서 구사일생의 은혜가 필요한 후배 목사의 답글 메시지는 내가 부사(副詞) 된 이 사건의 주어를 밝혀냈다. 그가 명사(名詞)였다. 농반진반 그냥, 혹서(酷暑)에 구사일생하시라는 덕담이 그에게는 실제상황이었다. 그 문자가 그에게는 레마였다. 목양(牧羊)에 매어야할 목회자들이 건물에 매인 애달픈 현실이 그를 통해 투사됐다. 그의 혹서(酷暑)는 사탄의 궤계가 아니었다. 건물덩어리였다. 삼풍백화점의 붕괴는 어제만의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 붕괴위험은 그만이 처한 염려와 근심거리가 아니다. 그 건물 붕괴 위험은 그의 일이고 곧 나의 일이다. 그래 우리는 작금 그 부채에 눌려 아사직전에 놓여있다. 무엇이 목회의 주체인지 알 수 없는 비본질적인 삶에 우린 질식당하고 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2:19).” 우리 주님께서 준엄한 명령을 내리셨다. 46년째 짓고 있던 헤롯의 성전을 헐라 명하신 것이다. 한 때 나는 교회 건물에 묶인 돈을 빼내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노천에서 가난한 영혼들과 더불어 주를 즐거워하는 예배자가 되고 싶어 했었다. 그러나 형식 없는 내용이 있을 수 없다는 주변의 합리적인 사고에 굴복하고 말았다. 그랬다. 너무 순진했던 나는 본질에 충실하라는 주님의 경고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는 우를 범할 뻔 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헤롯의 성전을 꿈꾸는 46년째를 맞고 있지 않나 싶다. 음지에서 양지를 향하는 지하교회에서.

그 후배의 근심이 내게 엄습했다. 그랬다 그 누군가가 나에게 “정작 구사일생의 은혜를 맛봐야 할 이는 당신 아니오? 반문해 왔다. 보신시켜 줄 터이니 산 넘어 오라”고 했다. 동병상련에 맘 아파하다가 나는 그 후배에게 이모티콘 천년 묵은 산삼을 전송했다.

“벌떡벌떡 힘이 납니다. 목사님도 쫌 드시고 힘마니마니 내세요.
 목사님을 멀리서나마 응원합니다. 진작했어야했는데,
 제가 주변머리가 없어서 표현을 잘못해요 - 아무개.”

눈이 큰 아이. 암소처럼 눈이 큰 아이. 그가 산낙지에 힘입어 불끈 그 무기력을 떨치고 일어선 황소처럼, 이모티콘에도 힘을 얻었다고 힘자랑을 해왔다. 외려 내게 기력을 불어넣어주며. 그리고 여기저기서 감사와 격려를 아끼지 않는 문자가 쇄도했다. 단 돈 만원도 안되는 투자와 작은 노고가 가져다 준 행복은 그 도를 넘어섰다. 아련한 옛사랑의 그림자까지 어른거렸다.

전철로 시내를 나가면서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빛바랜 수필집이었다. 무작위로 펼쳤더니 이런 문구가 눈에 띠었다.

“증오는 아주 오래 가고 집요한 것이므로 병자에게 있어서 죽음의 가장 두드러진 징후(徵候)는 화해(和解)이다. - 라 브뤼예르”

내 죽음이 문 앞에 이르렀다는 말인가? 아니, 아직은 아니다. 여전히 나는 그 누군가를 증오하고 있기에. 나는 모두에게 문자를 보내지 않았다. 증오는 나의 힘이다. 문자를 거부한 힘이다. 그 죽음을 거부하는 힘이다. 미워죽지 않을 정도면 증오는 날 살리는 힘이다. 그런 말이다. 궤변 같지만. 궤변이지만.

“감사합니다. 다같이 구사일생, 모두 사는 무사십생! 그리하여 말씀인즉 십인상생! 조태연”

그 깊은 신학적 통찰이 표피적 갈망을 넘어, 절대적 진리로 우릴 이끌고 있다.


만원의 행복을 누린 날.
그냥~, 부사적 삶이 사랑과 격려와 화해에 주도권을 넘겨 준 날.
나는 혹서에 이렇게 구사일생의 틈을 내었다.
아니, 무사십생-십인상생의 그냥~을 맛보았다.

모두에게 그냥~의 은혜가 충만해지기를, 앙망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