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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8: 공적행정과 사적놀음

2010.11.19 21:22

김성찬 조회 수:1695 추천:84

영혼일기 608: 공적행정과 사적놀음
2010.11.19(금)

꼬리를 내렸다고?
나는 기다려줬다.

일단 막아달라는 간곡한 요청들이 있어서, 나는 그 창을 일시(하루 정도) 닫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나는 그 누구와 메일을 주고받았다. 이런 내용의 메일이 왔었다.

from : 아무개
김성찬 목사님 (……) 왜냐면 그런 일이 없으니까 (……)

나는 그 아무개에게 두어 시간 후에 이런 답을 보냈었다.

to : 아무개
아무개님 아무개님께서 아니라 하시면 그래 아닙니다. 나는 단지 그런 류의 루머를 이제 종식시키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 대상이 누구든 그 진원지가 어디든 나를 변호하고 싶었습니다. 허공에 떠도는 살의가 헛것 되어 더 이상 나를 비참하게 만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뿐 입니다.

이는 한마디로, “아니라는데 뭐, 자기는 그런 말들을 한 적이 없다는데…, 자기가 아니면 됐지 뭐….” 이런 나의 대꾸를 예의를 갖춰 답한 것일 뿐이다.

나는 꼬리를 내리지 않았다, 내리지도 않을 것이다, 내리지도 않고 있다.

왜냐하면, 나의 관심은 그 어느 개인의 나에 대한 터무니없는 언사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의 관심은, '공적행정'은 사라지고, '사적놀음'만이 지배하고 있는(듯한) 서울중앙지방회의 현실과 미래에 대한 염려에 있기 때문이다. 나의 관심은 신앙공동체로서의 서울중앙지방회의 행정질서의 개선과 정치적 안녕에 있다.

그래서 “어, 이래선 안 되는데,” 라는 나의 공동체의 안녕을 기하는 감각이, 나를 놔주지 않는다. 나의 그런 원시적 감각이 나를 불편케 하고 있다.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마이클 샌델(Michael J. Sandel)의 표현처럼 ‘서사적 존재’로서 나의 이야기가 나를 가만 놔두지 않는다. 나의 행정과 정치적 정체성을 형성해준 체험적인 공동체의 이야기가, 작금 내안에서 움튼 우려를 심히 증폭 시키고 있다. 내가 체험한 지난 공동체 이야기는, 짧게는 얼마 전까지 서울중앙지방회에서 있었던 치졸했던 정치현실이었고, 길게는 지금은 사라진 구(舊) 북지방회 그리고 그 두 사생아들의 이전투구 이야기다.

후자, 그 이전투구는 ‘공적행정’이 ‘사적놀음’으로 변절됨에서 기인했었다. 그리고 끝내는 그 사적 놀음이 공동체를 파괴했다. 나는 십 년 후, 그 동네의 비참한 최후를 눈으로 생생하게 목도했다. 공동체의 파멸은 교권을 사유화하는 사람들의 탐욕에서 기인했다. 그리고 교권을 사유화하는 사람들의 공동된 특성은 공동의 결의를 준수하지 않음에 있었다. 그랬다. 그들에게 있어 공동의 결의는 ‘종이 위의 법(law in paper)’에 불과했다. 그들은 일차적으로 공적행정을 사적놀음으로 치환했다. 그리고는 교권 장악을 위해 사조직적 연대를 문어발식으로 늘여갔다. 그 힘으로 공적 행정조직을 무력화시키고, 그들은 교권을 장악했다. 교권을 사유화한 것이다.

‘모든 길은 로마로.’ 이것이 그들의 구호였다. 어느 한 사람을 통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었다. 그 권력을 사유화한 이는, 모든 정보를 독점하고, 인민을 사유화하는 데 필요한 정보만 왜곡시켜 일러줬다. A라는 사람을 동원해 B라는 사람을 치고 싶을 때, 그 정보원은 A라는 사람을 격분케 할 언행을, B가 발설하고 있다는 식의 거짓 정보를 흘려, A로 하여금 B를 치게 했다. 그리고 그 사조직적 패밀리에 가담하지 않는 자에게는 권리 없는 의무만 강요했다. 그리고 그 사조직에 가담했던 이들도 결국, 그 어느 한사람의 권력 사유화에 동의하지 않는 기미만 보이면, 가차 없이 그 조직에서 퇴출을 당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내 초법적 형벌이 그 퇴출당한 자들에게 가해졌다. 파직출교. 그것이 그들의 징계법에 기록된 유일한 벌칙이었다.

가관이었다. 그러나 가관을 땀흘리며 연출한 이는 빅브러더가 아니었다. 비굴하게도, 그 교권을 쥔 빅브러더의 눈총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선후배도 없이 그들은 그 앞에서 벌벌 기는 가관을 연출했다. 한번은 그 조직에 대항해 보려고 일단의 사람들이 작당을 했다가, 그 어떤 위인이 변절해 버린 바람에 그 도모가 파탄 나 버렸고, 그 주동자들은 목이 잘려 축출을 당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 보려고, 도원의 결의를 뒤집고 권력 편에 선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아예 기도실에 처박혀 하늘만 쳐다보던 이들도 있었다. 그런데 박쥐처럼 처신했던 이들은 그런대로 살아남았는데, 기도실에 처박혀 있던 어떤 신령한 사람은 결국 이동 중 그들의 살인질주에 치어 죽었다.

나는 이런 불행한 사태를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다. 왜냐하면, 나는 공동의 결의를 뒤집는 그런 공동체에 미래가 없다 여겨, 홀로 광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광야에까지 나를 찾아 와 빅브러더에게 당한 린치의 고통을 하소연하던 이들을 나는 위로하고, 구원해 내야만 했다. 그래서 그 사유화된 집단의 행패를 그들을 통해 생생히 전해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당한대로 배운다고, 오늘 서울중앙지방회는 그 누구에 의해 비선으로 움직이고 있다. 비선으로 움직인다는 말은 자신이 정당하지 못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앞장서서 비선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아침안개 같은 자다. 그러나 그 비선으로 움직이는 그의 배후가 된 사람(들)이 문제다. 그 도모가 정당하거나, 바르지 않다는 것을 그 배후세력들은 정말 모를까? 모를 수가 없다. 안다. 그들은 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공적행정을 사적놀음으로 치환하는 일을 오히려 반기며, 즐거워하는 듯해 뵌다.

이것이 우리의 장래인가? 적어도 이런 그릇된 의식을 지닌 이들이 서울중앙지방회 행정과 정치에 앞장서서는 안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생각이 강력하게 들었다. 하여 나는 떨치고 일어 선 것이다. 나는 그동안 한, 두 번 떨치고 일어선 것이 아니다. 그동안 몇 번, 공개적으로 나는 공적 행정질서를 무력화시키려는 사조직적 연대에 철퇴를 가하곤 했다. 그래서 그 부딪힘으로 인해 몇, 몇 인사들과는 불편했다. 그리고 지금도 불편한 조직(?)들이 있다. 이는 마치 우리 교단에서 전횡을 휘두르던 세력들과 정면충돌로, 내가 그네들과 불편한 것과 동일하다. 그러나 나는 그 충돌에서 내가 이겼다. 하여 적어도 우리 서울중앙지방회가 공명정대한 행정을 통해, 모든 회원들에게 실익과 희망을 주는 작은 기여를 했다고, 나는 자부한다.

그랬는데, 지난 지방회의록 사태를 거치면서, 기이하게 우리 안에서 공적 행정절차는 사라지고, 사적 놀음이 부활하기 시작했다. 지방회의록 사태 대처 방식은 차치하고라도, 그 구체적인 실례 중의 하나가 어느 교회 사태를 수습하는 도중에서 파생된 ‘조정위원 구성의 건’이다. 그 위원회는 절차와 적법성에 있어 간과할 수 없는 문제를 태생적으로 안고 있다. 예를 들면 심판위원회 안에 둬야 하는, 조정위원회의 구성에 있어서, 그들은 절차를 무시하고 조정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들은 심판위원회가 조정위원회를 구성해 달라는 요청도 없는 상태에서, 그냥 그 구성을 밀어붙였다. 그러나 그 절차를 무시한 조정위원회는 불법적인 위원회였다. 왜냐하면, 우리 교단 헌법에 있어 모든 위원회는 그 정족수가 7인이다. 목사위원 4명, 장로위원 3명이다. 그런데 5명으로 조정위원회를 그들은 구성했다.

그리고 그 후, 그 조정위원들은 조정에 실패했다. 조정이란, 이해 당사자 양측의 이해관계를 적절히 살펴, 양측이 어느 정도 조정을 받겠다는 의사를 내비칠 때만 조정이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조정안이 어느 한 편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기이한 안이었다. 그 저의가 의심을 받았다. 불신이 켜켜이 쌓였다. 그런데도 얼마 후, 다시 돌아서서 임원들의 동의도 제대로 받지도 않고, 미리 선정해 놓은 동일한 위원들로 또 조정위원회가 구성됐다. 여전히 정족수 미달이었다. 그간 신뢰받지 못한 조정위원들은 자진 해산했어야 했다. 그런데도 그들은 조정을 위한 조정에 돌입했다. 반발이 극에 달했다. 오죽했으면, 그 이해 당사자들 중 어느 한 편에서는, 내년 2월 정기지방회를 넘겨 합의하겠다는 말까지 나왔을까? 왜냐하면, 금번 회기가 넘어가면, 이런 류(類)의 조정위원회가 더 이상 존속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란다.

공적 조직인 심판위원회나, 임원회의 동의도 없이 사적인 통치행위로, 정족수도 미달인 불법 조정위원회를 구성하는 사적 놀음은, 우리 공동체의 행정 개선 의지를 완전히 퇴보시켜 버렸다. 그런데 소위 중진이라는 사람들이 그런 불법 위원회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오늘도 호통을 치고 있으니, 그 누가 그 권위를 인정하겠는가?

오래 전, 처음 바로 그 교회 사태 때문에 중진회의를 모였을 때, 거기 모인 수 십 명의 중진들은, 분명하게 ‘조정위원회를 구성하지 말라' 결의했었다. 그런데 그 공동의 결의도 그들은 무시하고 나섰다. 공동의 결의를 무시하더니, 사적놀음으로 발전되어버렸다. 그리고 그들은 말한다. 우리가 법이다 는 식으로, 심판 결과도, 심리부 결의도 죄다 내 손 안에 있다는 식이다. ‘모든 길은 조정위원회로.’ 정(丁)구(口)죽(竹)천(天)이다.

결국 그들은 조정위원회가 아니라, 압박위원회로 변절되어가는 듯하다. 이 문제는 오는 정기지방회 때에 분명하게, 행정 발전 모색을 위해 통상회에서 냉정하게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모든 길은 로마로’라고 로마인이 외친 배경에는 ‘공동선(Common Good)"이 자리하고 있었다. 로마의 도덕사(道德史)나 키케로 같은 사람들의 도덕적 향기가 로마제국을 위대하게 만들었다. 서울중앙지방회의 로마가 되고 싶은 사람은, ’공동선‘을 위해 돌팔매질을 당할 용기가 있는 사람이라야 한다. 아니오(No)를 예(Yes)해야 한다. NoYes해야 한다. 근 십 년 독점, 교직자 해외연수 여행사는 더 이상 우리에게는 없다. 올바른 입장에서서, 미래를 응시하라 외치는 예레미야를 작당해서 돌로 치는 우를 범해선 안 된다. 겨우 추슬러 놓은 지방회의 행정개선과 공동체의 안녕을 그 누군가가 슬슬 좀먹고 있다. 사욕이다. 내가복음이다.

이 밤 어느 선배에게서 또 연락이 왔다.
그 창을 닫아라. 사랑으로 명했다.

감사하다. 그러나 나는 닫지 않는다.

샌델의 이야기다. “공개 행위로서 공식 사죄는 과거의 상처를 감싸고 도덕적·정치적 화해의 기초를 다진다.” 그리고 샌델은 정의한다. “인간은 이야기하는 존재다.” 그래 우리 한 번 흉금을 털어 놓고 이야기해 보자. 지금이 아니면, 정기지방회, 그 대화의 장에서. 그동안 서로 생각해 보자. 정의란 무엇인가? 생각에 게으르지 않은 자만이 정의롭다.(마이클 샌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