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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1: 그 낯섬에 대하여

2010.11.22 22:13

김성찬 조회 수:1746 추천:25

영혼일기 611: 그 낯섬에 대하여
2010.11.22(월)

깊은 골, 적막에로 틈입했다. 다큐 ‘침묵’의 적막이었다. 그 적막 속에 사람이 살고 있었다. 산천어, 그녀는 그 적막 속에서도 희열을 느끼며 살고 있다며, 내 앞에서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산장의 여인은 외로움에 질려 질식사를 했었다는 데, 그녀는 외려 반문했다? 외롭다니요? 해맑은 미소로 답했다.
외롭지 않은, 외로움 없는,

그 비결을 물었다. 어리석게 저자거리의 땡초는 체면불구하고 물었다.


“기본…….”
그녀의 나직하게 웅얼거렸다.

늘 기본을 다지면서, 기본에 충실하고, 기본에 충만하면 그 외로움이 틈탈 시간이 없다는 말 같았다. 무시로 기도하고, 말씀 안에 늘 살며,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며 순간순간을 살아가는 수도자의 삶에 그 어찌 속된 이끼가 낄 수 있겠느냐는 반문인 듯 했다. 청년 시절, 경건한 삶을 위해 성경 암송을 즐기던 시절. 제일 먼저 접했던 말씀 중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1:35).”

말의 절제가 몸에 밴 듯 그녀는, 다시 한마디를 툭 내던졌다.

“완성된 맛…….”

홀로, 긴 수도자의 삶을 산 까닭인지, 그녀의 말은 축약된 한 단어로 완결되곤 했다.

'
완성된 맛.' 놀라는 말이었다. 그녀는 기본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면서, 완성된 맛을 본다고 했다. 이 땅에서 그 신화(神化)의 경지에 이르는 삶은, 장차 올 천국생활을 낯설지 않게 할 것이라고 그녀는, 완성된 맛을 본 오늘에 서서 내일을 기대했다. 과연 천국은 준비된 자의 몫이었다.

천국이 낯선 사람. 그랬다. ‘완성된 맛’이라는 말도 생경했지만, 천국이 낯설지 않는 사람이라거나, 천국이 낯선 사람이라는 그녀의 말이 낯설었다. 그런데 단어는 낯설었어도, 그 낯선 언어를 접하는 순간, 내 낯이 뜨거워졌다.

그리고 내 의문이 풀렸다. 저런 인간들하고 어떻게 천국에 가서 얼굴과 얼굴을 대하며 살지? 그런 천국이 천국일 수 있겠는가 싶었다. 천국이 아주 불편할 것 같았다. 그래서 그 모든 얽히고설킨 인연들과의 관계가 과거 아닌, 추억으로만 변모하는, 신(新) 다볼산의 신비(눅 9:28∼36)를, 하나님께서는 그곳에서 마련해 놓았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었다. 아니 그렇게 나는 셈하고 싶었다. 나는 그렇게 천국을 내 방식대로 설계해왔었다.

그런데 수도사인 그녀는 내 앞에서 이생의 천국을 설파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 적막한 산속에서, 천국 적응 훈련을 하고 있었다.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살다가 구원 티켓 한 장 달랑 들고, 낯선 천국에 진입해서야 되겠느냐고 내게 반문하는 듯 했다. 천국이 낯설지 않는, 천국 적응 훈련이란, ‘기본 다지기’를 통해 미리 맛보는 ‘완성미,’ 즉 이 땅에서 천국을 누리는 삶을 사는 것이라고 했다. 이런 차원 높은 경지에 있는 그녀에게 내가 ‘외로움’ 운운했으니, 얼마나 저급한 영의 사람인가? 나는…….

하나님은 절대 '1' 이시다. 그런데 내가 10 이 되고, 100 이 되고, 1000 이 되며, 1 ∞ (무한대)가 되는 비결은, 내가 0(제로)가 될 때란다. 나를 비우면 0 이 되는데, 내가 한 번 비우면 나는 10 이되고, 내가 두 번 비우면 100 이 되고, 내가 세 번 비우면 1,000 이 되고, 내가 무한대로 비우면 내가 1 ∞ (무한대)가 된단다.

그랬다. 그런데, 작금의 나는 그 절대 1의 우편에 선 사람이 아니다. 나는 -10 이다. 살아 오면서 적어도 1번 정도는 날 비운 적도 있었을 테니까, 나는 적어도 10 이다. 그런데 그러다가 다시 완고해졌으니, 나는 현재 -10 이다. 하나님은 내안에서 하나님이 되지 못하고 계신다. 나는 내 안에 계신 예수를 부끄럽게 하는 자이다. 나는 신앙교육의 목표를 ‘Christlikeness’로 잡았다. ‘예수같이됨’이다. 그러나 내안에 악독은 가득하고, 나는 예수 한 분만으로 만족하지 못한 속물이다. 예수 안에 '예수됨'의 필요충분조건이 다 갖춰져 있지 않기 때문에, 내가 예수 한 분 만으로 만족 못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예수로 충만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의 기본이 내 기본이 아니다. 예수의 자기 비움이 내 비움과는 거리가 멀다. 하여, 나는 예수가 낯설다. 하니 천국이 낯설 수밖에 별 도리가 있겠는가?

나는 포장하고 산다. 이미지로 먹고사는 목사라는 스타다. 다니엘 부어스틴(Daniel Boorstin)은 그의 저서 『이미지』에서 “스타란 의사사건(pseudo-event)이다”라고 말한다. 이 정의를 리차드 다이어(Richard Dyer)는 이렇게 해설한다. “스타들은 의미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그 의미는 비어있다. 따라서 스타는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유명한 것이지 어떤 재능이나 특정한 자질 때문에 유명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용모상 사소한 차이를 기반으로 해서 시장에 내다 파는 유명인의 본보기다.”

 

그랬다. 나는 목사라는 명목에 기반해서 거룩한 강단에 선, 이미지스트다. 그런데, 나는 비어 있는 자다. 나는 가짜(pseudo pastor)다. 스스로 자기를 비어 종에 형체를 지녀 사람같이 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자기 비움(케노시스(kenosis);빌2:5-11)과는 전혀 질이 다른, 나는 에리직톤의 허기(虛飢)다. 그런 내가 하나님의 신에 충만한 자처럼 설교하고, 행동하고, 글도 쓴다.

그런 나다. 그러나 한 가지 나는 내 추악한 영적 실상을 가급적 있는 그대로 발설하기 시작했다. 일기라는 문학의 장르를 통해. 그래서 내 추악상을 반(半) 공개하고 있다. 잿빛 공의를 앞 세운 쌈질도 마다 하지 않는다. ‘글기도’라고 했지만, 내 자신을 프로파간다 하는 이력서이기도 하다.

하여 부끄럽고, 천국이 심히 낯설다.
청평 깊은 산속에서  오늘 만난 영혼이 맑고, 고운 그녀는 실로 신비했다.
그녀가 낯설었다.

저녁에는, 학문적 교류를 나누는 기쁨을 선사한 뉴요커들과 오랜만에 여러 교감을 나누느라, 밤이 심히 늦었다.

이 밤.
아프다.

가만히 묻는다.

내 육신아 너만 아프냐?

나도 아프다.
이 영혼도 심히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