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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4: 긁어 부스럼

2011.12.02 23:27

김성찬 조회 수:1707 추천:50

영혼일기 864: 긁어 부스럼
2011.12.02(금)

며칠 전부터 찰과상을 입었던 정강이에 딱지가 일었다. 딱지가 졌다는 말은 이젠 그 상처가 아물어 가고 있다는 징조였다. 그런데 상처를 뒤덮은 검은 딱지가 견고해져 가면서 그 부위가 슬슬 가려워왔다. 그리고 딱지의 굳기가 더 단단해져 가면서 간지럼이 더해져만 갔다. 별로 큰 딱지가 아닌데도 심히 간지러워 근 이틀 정도 밤마다 딱지 주위를 빡빡 긁어대곤 했다. 딱지는 건드리지 않고 조심스레 딱지 주위를 손톱 날을 세워 후벼 파듯 긁어대는 그 쾌감이란. 아∼, 얼마나 시원하던지.

나는 손톱의 효용성을 새삼 깨우쳤다. 그러면서 손톱조차도 우리 몸에 필수부분임을 나는 기꺼이 인정했다. 상처가 덧나지 않게 긁어댈 수만 있다면, 손톱만큼 우리 몸을 시원케 하는 지체도 없겠다 싶었다. 효자손이 감히 손톱이 주는 짜릿한 쾌감을 어찌 선사할 수 있을꼬?

그런데 문제는 딱지를 건드리지 않을 정도의 절제력을 갖기 힘든, 딱 거기서 멈출 수 없는 인간의 공격적 야수 본능이 문제였다. 가까이 가까이, 좀 더 가까이. 딱지에 살금살금 접근해 가며 나는 스릴을 즐겼다. 카∼, 딱지가 농익어 걷어내도 될만한 딱지 저변부를 살살 파고 들어가는 그 스릴이란. 한동안 나는 다 나아가는, 그냥 내버려 둬도 되는 딱지를 농락하며, 내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쾌감을 즐겼다.

한동안 그 유희를 즐기다가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고, 내 손가락의 집중력이 해이해 지던 순간, 그만 끌 같은 손톱이 딱지를 밀고 들어가 버렸다. 아악, 세상이 뒤집어져 버렸다. 피가 솟구치고, 정강이를 타고 피가 흘러 내렸다. 긁어 부스럼. 다 아물어 가던 상처를 덧낸 나는『그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 반복해야만 했다. 「그 치졸한 분쟁을 또 다시」, 겪어 내야만 했다. 손톱 끝에 찔린 딱지. 더 이상 시원한 효자손이 아니었다. 후회 천근이었다.

긁어 부스럼.

사실 어렵게 아물어가던 상처 딱지를 그냥 내버려 뒀어야 하는데, 한 번 손이 가니까 끝장을 보지 않으면 안 될 만큼 간지럼이 더해 왔다. 「첫, 단 한 번의 터치」, 가 문제였다. 문제가 남느냐, 내가 남느냐? 문제는 더 커졌고, 나는 망가졌다. 당연히 자극에 몸이 반발한 것이다. 좀 간지러워도 그냥 놔뒀어야 하는 데, 한 번 건드려 놓으니까, 손톱도 딱지도 서로 감당 못할 쟁투에 휘말려 들어가 버린 것이다.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어디 한 번 끝장을 보자.” 이런 식이었다. 그러다가 결국, 그만 건드려서는 안 될 딱지를 손톱으로 걷어내 버린 것이다. 전혀 그런 결과를 원한 것이 아니었는데, 너무 근접 육박전을 벌이다 보니, 긁어 부스럼을 만들어 버렸다.

긁어 부스럼 = 공연히 숲을 헤쳐서 뱀을 일군다.


작금 사이버 세상에서는 우리 신앙공동체로서의 몸을 긁어 부스럼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들은 익명이라는 악의 소굴에 숨어 그동안 평온했던 우리네 숲을 공연히 헤쳐서 뱀을 일구고 있다. 도저히 이해 할 길이 없다.

공연히? 그 악플러들은 ‘공연히’ 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정말 공연히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숲을 헤쳐서 뱀을 일구는 이유가 나름 있어 뵌다. 그렇다. 「의도의 순수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공연히 그런 것 같지 않다. 지금은 확언할 수 없으나, 머지않은 장래에 그 의도의 진실은 그 얼굴을 내밀게 될 것이다.


일례로, 00광장에 우리 서울중앙지방회와 관련된, 「중앙지방회 모장로의 시무장로 자격에 의문이」라는 제하의 글에 악플을 달고 있는 익명의 악플러들의 논조를 분석해 보면, 그들의 이런 (공통적인) 숨은 의도가 눈에 띈다.

하나, 그 익명의 악플러들이 그 사안에 대해 표면적으로 문제 삼는 이유로, 모장로가 당회원으로서 당회장인 담임목사한테 불손하게 대하기에, 그 그릇된 행위를 단죄하겠다는 거다.

한마디로 웃기는 말이다. 남의 교회 당회 안에서 오가는 공방까지 제 3자가 개입한다는 것은, 남의 집 안방 베갯머리 송사까지 관여하겠다는 기이한 월권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해당교회 담임목사가 자기교회 당회원을 문제 삼은 사건도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그런 이유는 납득할 수 없다.

둘, 그 익명의 악플러들은 이미 행정적으로 종결된 사안에 대해, 느닷없이 행정질서, 법질서 운운해 대며, 굳어 살 되어 가는 상처를 다시 후벼 파고 있다.

그런 사이버 테러를 지켜보고 있는 우리 지방회 회원들은, 지난 회기 지방회에서는 물론이고, 총회 심리부에서도 종결된 사안에 대해 뒤늦게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일사부재리의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냐 아니냐며, 그 동의할 수 없는 저의가 무엇인지 의아해 하고 있다. 이같은 지방회의 부정적인 여론에도 불구하고,
저들 악플러들은 이미 행정적으로 종결된 사안을 긁어 부스럼을 만들어 내며, 사조직 강화 차원에서 비열하게 뒤에 숨어 악한 도발을 일삼고 있다.

한 때, 뿌리가 없다고 시비하는 이들로 인해, 뿌리째 흔들렸던 악몽에 시달렸던 어떤 회원을 우리 지방회는, 비록 그의 뿌리없음을 주장한 이들이 발한 그 적법한 주장대로 우리 교단에 근거가 없는 존재일지라도, 사람을 살리고, 목회자를 살리고, 교회를 살려야 한다고 호소해, 그 사람과 교회를 살려낸 적도 있었다.

셋, 사이버 테러에서 밝힌 그들의 복심은 이 사태가 ‘괘씸죄’ 때문에 기인했다고 한다.

괘씸죄? 누가 정말 괘씸한 짓을 했는지는 차후에 드러나게 될 것이다.

넷, 그 익명의 악플러들은 그들이 문제 삼는 모 장로 임원이 총회적으로 지방회장단과 다른 정치적 행보를 하고 있다며 시비를 걸고 있다.

지방회나 총회 정치에서 개개인들의 정치적 견해와 입장이 서로 각각 다른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 교단의 정치체제가 전체주의를 표방하고 있단 말인가? 이런 패거리, 사조직적, 조폭적 삼류 정치적 발상은 우리 교단정치의 미래를 매우 어둡게 할 것이다.

다섯, 그 악플러들은 한 손으로 법적 시비를 해대는 척하면서, 다른 한 손으로 자기네들에게 굴복하라고 협박해대는 것처럼 보인다. 그 사안에 대한 적법한 판정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협박에 굴복하라는 의도가 물씬 풍긴다. 왜 안 찾아 오냐? 내 줄에 서라. 이런 암시가 매우 강하다.

익명의 그 악플러들에게 당부한다.
더 이상 우리 신앙공동체에 뱀을 일구지 말라.
긁어 부스럼은 이젠 그만 사양한다.

여기서 종결해라.
애정어린 권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