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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8: 엘림/목양적 성경공부

2011.09.22 21:42

김성찬 조회 수:1576 추천:13

영혼일기 808: 엘림/목양적 성경공부
2011.09.22(목)

인간관계의 생명력이란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사람을 대하는 데 있다. 그러나 보기 좋은 인간관계가 영속되지 못하고 깨어지는 경우가 너무 허다하다. 그만큼 사람이 사람을 인격적 존재가 아닌 소모적 물품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9월 「엘림성경공부」오늘부터 있었다.

장시춘 어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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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말씀을 준비할 때, 본문을 씨줄과 날줄로 꿰뚫어보라. 그런 안목을 길러야 한다. 설교 제목하나 뽑으려고 말씀을 이용하지 말라. 성경을 경홀히 대하는 태도는 그릇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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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서를 공부했다. 사사시대에서 왕정시대로 넘어갔다. 사무엘상서를 공부했다. 사무엘 상 4장은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을 떠난 충격에 휩싸인다.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패하면서 제사장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죽임을 당하고, 그 소식을 전해들은 제사장 엘리 마저 고꾸라져 죽는다. 평소에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능멸하던 엘리의 두 아들이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밀리게 되자, 여호와의 법궤를 도구삼아 역전의 기회를 노리려다 죽임을 당한다. 두 아들의 전사 소식에 더해 여호와의 법궤를 블레셋에게 빼앗겼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들은 제사장 엘 리가 자기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는다. 그 와중에 비느하스의 아내가 남편과 시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듣고 갑자기 아파서 몸을 구푸려 해산을 하고 죽는다. 그때 태어난 사내의 아름을 그녀는 ‘이가봇’이라 명명한다. 그 의미는 하나님의 궤가 이방인에게 빼앗겼고, 그의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르기를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기 때문이라고 해설한다.(삼상4:1-22)

이 불행한 사건은, 여호와의 법궤를 자신의 이익의 도구삼다가 죽임을 당한 무서운 실례(實例)다. 우리가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사건이다. 아니, 바로 내가 그런 불경을 범하고 잇다. 법궤를 자기 이익 추구의 수단으로 삼았던 홉니와 비느하스처럼, 영적 전투인 말씀 선포에 있어 나는 왕왕 성경말씀을 설교의 목적이 아닌, 제목이나 주제를 뽑는 수단으로 활용해 왔다. 내 사상, 주의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한 도구로 말씀을 이용하곤 했다. 나뿐만이 나니라 작금 인터넷 매체를 통해 정략적 공방을 주고받는 이들이 흔히 범하고 있는 무서운 죄악이다. 자신의 입장을 객관화하고, 감히 정경화하려는 욕망으로 우리는 제 입맛에 맞는 한두 구절의 말씀을 제 주의주장에 연지곤지처럼 찍어 바르고 있다.

자기 이익을 위해 전장으로 옮겨 온 여호와의 법궤는 권능을 발하지 않았다. 정욕에 쓰려고 구하는 기도에 무슨 응답이 있겠는가? 그래서 그들은 패했고, 죽임을 당했고, 여호와의 법궤까지 이방인들에게 빼앗겨 버렸다. 그러자 이스라엘이 전장에 가져 온 여호와의 법궤가 권능은커녕 무용지물과 같다고 여긴 블레셋은 여호와의 법궤를 경홀히 여기며, 에벤에셀에서부터 아스돗까지 끌어다가 자신들의 신전에 내려놓는다. 그들이 섬기는 어신 다곤 곁에 두었는데, 그 이튿날부터 다곤 신상이 여호와의 궤 앞에 고꾸라지고, 아스돗 사람들에게는 독한 종기의 재앙이 급습한다. 그들은 블레셋 주요도시로 여기저기로 여호와의 법궤를 옮겨보며 하나님께서 내리신 재앙을 피해 보려했지만 속수무책임을 깨닫고, 법궤를 벧세메스로 돌려보낸다. 다시 돌아 온 법궤를 너무 친근히 여겨 허물없이 들여다 본 벧세메스 사람들 (오만) 칠십명이 죽임을 당하는 사건도 벌어진다. 여호와의 법궤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그들의 생명을 좌지우지한 사건들이다.

이 사건들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바, 선민들이 말씀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대하다가 망했다는 것과 선민들이 성공의 수단으로 삼은 법궤는 이방인들조차 만홀히 여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말씀을 퀴즈사전식 지식삼아 자의적 적용의 도구가 되게 해선 안 된다. 말씀사건의 본의(本意)와 본질(本質)을 계시 받아 구속사적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는 거시적 통찰을 익히는 게, 나의 「엘림성경공부」의 목표다. 그리고 죄-구원-거룩한 생활, 그 본원적 말씀 교리에 굳게 서서 말씀을 말씀되게 전하는 설교자가 되고 싶다. 말씀의 차용이 아니라, 말씀 전용―말씀 식자공이 되고 싶다. 내 살을 찢어도 말씀이, 내 폐부를 찔러도 말씀만이 터져 나오는 말씀 원액이고 싶다.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거의 불가능한 소망이다. 소망조차 부끄러운 소망이다. 그러나 이런 소망을 꿈꿀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행복하다.

그러나 한 가지 명심할 것이 있다.
장시춘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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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는 목회에 도움이 되는 성경공부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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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양(牧羊)에 도움이 되는 성경공부. 이는 학문이 실사구시(實事求是)적이어야 하듯, 성경공부도 실사구시(實事求是)적이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성경공부가 공리공담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다. 실용지학이어야 한다. “도둑이 온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는 예수님의 목양이 그 모범답안이다. 이런 관점에서 도둑이란, 목양에 도움 되지 않는 공리공론이나 홀로 논하는 자이다. 살아 역사하는 말씀을 먹이지 않는 목자는 그림의 떡을 먹여 양들을 죽이고, 멸망시키는 도둑이다.

장시춘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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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명이 시작한 성경공부가 사모 한 사람만 남고 와해됐어도, 나는 아내 한 사람 놓고 성경공부를 계속했었다. 이것이 목회다. 이것이 목회적 성경공부다. 성경 가르치기란, 목자로서의 사명을 받고 목회자가 된 우리의 특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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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어록은 배우려는 자가, 단 한 사람일지라도 말씀을 목자는 가르쳐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러니까 그 목양적 성경공부란, 천하보다 귀한 한 생명을 생명으로 인정하여, 생명 되게 하는 고귀한 일이라는 말이다. 젖먹이가 한 명 뿐이라고 그 영아에게 젖먹이기를 거부하는 엄마가 그 어디 있던가? 이런 의미의 어록을 그분은 우리에게 던졌다. 던지고 던졌다. 오늘도 던졌다. 말씀 안에 거하여, 말씀에 젖어들고, 그 말씀을 목양적 성경공부로 가르치는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는 것보다 더 고귀한 사역이 그 어디에 있느냐고, 그분은 나에게 반문하는 듯했다.

재미난 그 성경공부가 의미를 짚어가며 내게 도전해 오자, 나는 그 도전 앞에서 자꾸만 작아져 감을 느낀다.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거리가 젤로 멀다는 데, 누가 날 일으켜 주길, 소망한다. 복음적 신인합동이 나에게 선사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간절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