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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테러리스트 햄릿

2008.10.03 22:42

김성찬 조회 수:1553 추천:25

영혼일기 83: 테러리스트 햄릿

2008.10.03(금)




아름다움과 정숙이 같은 말이던 시절.

아버지를 독살한 왕의 왕비가 된 어머니를 용서할 수 없어 고뇌하던 햄릿.

그가 테러리스트가 되어 오늘 우리 앞에 등장했다.

21세기 햄릿. 2008 국립극단은 '테러리스트 햄릿'을 선보였다.

이청준이 복수가 자신의 글쓰기의 원천이라 했듯, 테러의 원천은 복수다. 테러리스트는 보복자의 다른 말이다.


현대판 햄릿은 고뇌하지 않는다.

행동만 한다.

그래서 그 극중 그 유명한 대사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고뇌에 찬 독백은 전혀 빛나 보이지 않는다.

선왕을 죽인 숙부 클로디어스를 죽이고 자신도 죽어가면서,

햄릿은 그 독백보다 멋진 마지막 말을 남긴다.


“The rest is only silence."

남은 것은 이제 오직 침묵뿐이다.


행동이 인내보다 앞서는 시대상을, 현대판 테러리스트 햄릿은 테러하듯 보여 줬다.

참을 수 없이 가벼운 테러.

이젠, 산자의 테러와 죽은 자의 침묵만 있을 뿐이다. 그 사이의 고뇌는 없다.

살아있음이 테러다.

인간은 테러로 살아있다.


그러나 21세기, 더 이상 아름다움이 정숙일 수 없는 세상에서, 누가 그 누구에게 아름다움과 정숙을 동시에 요구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점에서 아름다움과 정숙을 한 묶음으로 대한 16세기 햄릿은 더 이상 존재할 의미가 없다. 아 아 참아야 한다기에 눈물로 보내는 여자의 일생이란 것도 없다.  


동의어가 사라진 시대.

아름다움과 정숙.

인내와 여인.

:

:

말씀과 삶.


이는 이젠 동의어가 아니다.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지도 않는다.


18세기 말경부터 19세기 중엽 낭만주의 시대를 산 비평가 해즐릿(Willam Hazlitt)나 그 시대의 대표적인 시인 코울리지(Samuel Taylor Coleridge)등은 복수를 결연하게 실천하지 못하는 햄릿의 우유부단함의 이유를 그의 지성에서 찾았다. 유럽의 엘리트대학인 비텐베르크대학에서 수학한 햄릿이 지나친 지적 활동의 결과로 복수를 지연하는 ‘행동의 마비상태’에 빠져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오늘의 지성은 광속주행만을 부추긴다. ‘행동의 과잉상태’다.


오늘 이 사회는, 죽을 수도 살 수도 없는, 우유부단함이 오히려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이 시대는 우유부단하지 않는다.

망설임 없이 그 경계를 넘는다.

그래서 죽을힘으로 살지 라는 말이 해독 불가능한 난수표가 되어버렸다.


자식들 놔두고 어떻게 그런 모진 결정을.

혀를 차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다.

난 안다.

그 삶과 죽음의 경계에 이르면, 자식도, 체면도, 신앙도, 교리도 까맣게 잊혀 진다는 사실을.

죽음의 유혹이 얼마나 감미롭고, 안온한 것인가를.

나도 안다. 체험적으로 안다.

그 봄 동산 따사로운 햇살아래, 삶보다 더 황홀한 죽음을 무사한 맘으로 맞아들이던 그 순간, 만일 내게 동아줄만 그 하늘에서 내려왔었더라면, 난 그 나무꾼의 아내처럼 하늘 두레박을 탈 수 있었었는데.

그래서 난 그 누군가의 죽음을 나무라지 않는다.

생떼 같은 자식을 놔두고, 쯧쯧. 난 혀를 차지 않는다.

그 경계를 넘을 수 있는 망각의 강, 죽음의 감미로운 유혹을 맛보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삶의 강도보다 더한 숨넘어가는 희열을 맛보며 갔을 것이다.

한 점 괴로움도 없다.


그러나, 그래도 그 침묵만 남긴 줄 이은 죽음의 행렬이, 이 시대를 테러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말씀과 삶이 더 이상 동의어일 수 없는, 성서언어의 퇴조가 빚은 영적 공황상태를 대하는,

이 씁쓸함.


입맛이 쓰다.

좀체 가시지 않을 이 씁쓰름함.


명백히, 

오늘의 햄릿이 테러리스트가 되어야만 하는 이유는,

순전히,

이 시대의 관객(수용자, 향유자)의 취향 때문이다.


자신의 삶에도,

아주 선선히 죽음의 테러를 가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