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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2009.01.11 23:36

김성찬 조회 수:1530 추천:33

영혼일기184: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2009.01.11(주일)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이것이 ‘신뢰’다. 

신뢰는 믿음 이상이다. 신뢰란 믿고, 의지함이다. 믿음이 신뢰에 다다를 때 비로소 온전한 믿음이 된다. 믿기는 믿는 데 온전히 내어맡기지 못하는 믿음도 있다. 믿기는 한 데, 의지하지 못하는 믿음이다. 맘은 가는데 몸이 못 미치는 경우거나, 몸은 앞서는데 맘이 채 못 쫓아가는 경우다.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는 자가 그렇고, 칼질만 해대다가 골고다를 피해 간 베드로의 충동적 행위 또한 매 한가지다. 몸 따로, 마음 따로다. 이는 반쪽 믿음이다. 기실 우리의 믿음의 태반이 허구다. 즉 내 믿음이 내 바람을 배반할 때, 우린 투자한 그 믿음을 거둬들이곤 한다. 그리곤 돌아서서 그 믿음의 대상을 탓하며, 더 이상 믿음을 투자하려들지 않는다. 그러니까 우리가 말하는 믿음이란 상당부분 자신의 욕망을 투자한 것에 불과하다. 이렇게 우리는 내 욕구를 충족시켜야만 하는 필요조건으로서의 믿음을 믿음이라 여기는 경향이 있다. “불에 던져져도, 임금님, 우리를 지키시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활활 타는 화덕 속에서 구해 주시고 임금님의 손에서도 구해 주실 것입니다(단3:17)”라는 믿음이다. 그런데 이런 믿음은 엄밀히 말해 반쪽 믿음이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그 반쪽 믿음에 거꿀잇기(逆接)를 시도했다.
믿음에서 신뢰로 나아갔다. 믿음의 충분조건인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를 덧붙이면서 참 믿음으로 나아갔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우리는 임금님의 신들을 섬기지 않고 임금님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을 하지고 않을 것입니다(단3:18).” 신뢰는 온전히 믿고, 의지하는 참 믿음이다. 그 불구덩이 속에서도 우리를 구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에 역접(逆接) -그러나, 불에 타 죽더라도 그분을 신뢰한다는 믿음을 덧붙이는 믿음이야 말로 필요충분조건으로서의 믿음이다. 내 현세적인 욕구를 이룰 수 없는 바람조차도 믿음으로 셈하는, 실속 없는 의지의 결연한 표출. 이것이 신뢰다.

이것은 절개다. 마치 춘향의 수절 같은 이미지다. 이런 재미 난 논문이 있다.


춘향의 미(인간미)를 이루는 두 축은 육체미와 정신미로 구분되어 나타나는데, 육체미는 중국의 4대 미인 중의 하나인 양귀비와 결부된 '버들'로 비유되어 춘향의 빼어난 미색을 상징했고, 정신미는 4군자 중의 난초와 빗대어 춘향의 고결한 인격(수절)을 드러냈다.

(中略)
춘향의 정신미는 이비(아황ㆍ여영)의 정절과 이두(이백ㆍ두보)의 항거정신을 통해 '수절'로 나타났는데, 춘향이가 수절할 수 있었던 정신적 힘의 하나는 정절의 화신인 이비의 절개로 규범성을 띠고 있고, 다른 하나는 성차를 초월한 이백과 두보의 현실비판 정신으로 진보적 성격을 띠고 있다. 그리고 정절의 상징인 이비와 현실인식의 상징인 이백과 두보는 〈열녀춘향수절가〉에서 '정신미의 극치를 대변하는 인물들'로 그 의미를 부여받고 있다. 

(〈열녀춘향수절가〉에 나타난 중국의 양상과 의미 - 춘향의 미를 중심으로 The Chinese aspects and the meanings in Yulneochunhyangsujulga with Chunhyang's beauty  이금희(Lee Keum-hee) 저, 국문초록에서).”

위 논문의 분석의 틀을 빌어 다니엘의 세 친구의 언설을 분석해보자면,
다니엘의 세 친구의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는 신앙의 절개와 민족주의적인 항거정신의 결정체이다. 하나님 절대 신앙과 선민으로서의 민족정체성이 이런 용기 있는 신뢰를 가능케 했다고 분석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 신앙과 정신이 상호 작용을 통해 절대 신뢰를 가능케 한 것이라 여겨진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 실속 없는 절개다.

그러나 역사는 실속 없는 믿음을 투자한 이들에 의해 진보해 왔다. 믿음의 진보도 실속 없는 절개를 하나님께 바친 이들로 가능했다.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인용하는 하박국은 어떠한가? 남의 자식을 제 자식 삼으라는 여호와의 명령에 순복했고, 그래서 그는 이런 노래로 만족해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면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하박국 3장 17-18절).”

우린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 나아가는 십자가의 정병들이다. 금 신상에 절하라는 자본주의의 압력에 신앙의 절개로 맞서야 하며, 악한 영의 통치하에 있는 세속권력에 우린 당당하게 항거해야한다. 우리 여전히 이 세속도시의 이방인이다. 하여 우린 이 땅의 가치관과 윤리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 이 땅에서 부(富)와 권력(權力)을 쌓는 일이라는 것이, 얼마나 실속 없는 일인가 깨달아 알아야 한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없을지라도,’ 우린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과 무관한 기도와 일에 믿음을 투자하고선, 그 기도와 일에 응답이 없다고 시비하는 어리석음에서 하루바삐 벗어나야만 한다. 춘향의 절개만도 못한 지조로 감히 믿음을 논하고, 그에 대한 신뢰를 논한다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가 깨달아 알아야 한다. 먼저 그 깨달아 아는 은혜를 구해야 한다. 이 본질을 깨달아 아는 지혜에 글로벌 위기를 헤쳐 나갈 비방이 있다.

사탄이 우릴 조롱하고 있다.

금 신상에 절하라. 그렇지 않으면 불타는 용광로 속에 던져 넣을 것이다.
어느 신이 너희를 내 손에서 구해낼 수 있겠느냐?(단3:15)

ㅋ, ㅋ 웃음이 나왔다.
저 오만한 바알세불
(Beel-zebub; 블레셋땅 에그론에서 숭배하던 파리 신, 파리의 왕, 똥 신 : 마12:22-24;막 3:22 ).


노코멘트 -

이 일을 두고서는 우리가 임금님께 대답할 필요가 없는 줄 압니다.(단3:16).

불에 던져져도, 임금님, 우리를 지키시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활활 타는 화덕 속에서 구해 주시고 임금님의 손에서도 구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우리는 임금님의 신들을 섬기지 않고 임금님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을 하지고 않을 것입니다.(단3:17-18).

돈 없고, 집 없고, 땅 없으면 은행에서 돈을 빌릴 수 없다. 그러나 예외가 있다. 돈 없고, 땅 없어도 돈 빌릴 수 있는 자산이 있다. 그것이 신용이다. 무형자산 신용이 돈 되는 세상이다. 오늘의 사회는 신용사회다. 그러나 신용은 하루아침에 쌓이지 않는다. 신용은 장기간 축적된 신용 거래의 산물이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 또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른 영적 힘이다. 다니엘의 세 친구의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라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는, 왕의 진미를 거절하고 채식만으로 더 윤택한 낯빛을 가꾼 정결한 믿음에 그 뿌리가 있었다. 믿음에서 믿음으로, 절대적 신뢰로 신앙의 진보를 이룬 것이다.


글로벌 경제 위기 앞에서, 나와 우리 가족들과 우리 성도들과 우리 양지교회가, 자신을 더럽히지 아니하는 믿음의 연단을 즐길 수 있기를 기원한다. 그리하여 종내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에 이르길 간절히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