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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 겨드랑이가 가렵다

2009.03.04 22:30

김성찬 조회 수:1537 추천:23

영혼일기 230: 겨드랑이가 가렵다
2009.03.04(수)

이때 뚜우 하고 정오 사이렌이 울었다.

사람들은 모두 네 활개를 펴고 닭처럼 푸드덕거리는 것 같고 온갖 유리와 강철과 대리석과 지폐와 잉크가 부글부글 끓고 수선을 떨고 하는 것 같은 찰나,그야말로 현란을 극한 정오다.

 

나는 불현듯이 겨드랑이가 가렵다.

 

아하, 그것은 내 인공의 날개가 돋았던 자국이다.

 

오늘은 없는 이 날개,머리 속에서는 희망과 야심의 말소된 페이지가 딕셔너리 넘어가듯 번뜩였다.

나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그리고 어디 한번 이렇게 외쳐 보고 싶었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이상,소설「날개」중에서.


자본주의 수레바퀴 밑에 질식당하고 있는 지성인인 ‘나’는 아내로 상징되는 자본주의의 종속과 지배에서 벗어나길 그렇게 희원한다. 겨드랑이가 가려운 것은 그 자본주의의 억압에서 벗어나려는 자연인의 자의식의 발로다.

그 누가 나에게 귀가 많이 가려우셨을 거라고 말했다.

근데 나는 귀가 가려운 것이 아니라, 난 지금 그 어딘가 은밀한 가려움증을 즐기고 있다.
한의사도, 그 외과의사도 한 결 같이 내 모든 동시다발적 신체증상들이 Stress에 의한 것이 라고들 말했다. “가려움증은 피부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뇌 안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라고 말하는 과학적 진단을 우린 듣는다. “당신의 그 가려움증도 대부분 정신적인 요인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라는 그 의사들의 한결같은 진단도 그런 연유에서다. 처음에는 의아했는데, 이구동성으로 발하는 무책임한 의사들의 신경성 운운에 난 동의를 표하고 말았다.

이상(李霜)은 불현 듯이 겨드랑이가 가렵다 고 말했지만, 불현 듯 가려울 수가 없다.홀로 사는 그 어떤 분이 가장 외로운 순간은 손이 닿지 않는 등 가려움증에 시달릴 때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효자손도 있지만 정감어린 손길이 그립다는 말이다. 근데 그분은 그 등 가려움이 만성질환이 되어 있다며 씁쓸해 했다. 더불어 사는 이들의 살가운 돌봄 없는 가없는 외로움이 그 증상을 만성화시킨 것이다. 그렇다. 불현 듯 겨드랑이가 가려웠던 것이 아니다. 긴긴 세월 쌓이고 쌓인 내면화된 자본주의의 압제 탓이다.

 

허나, 손댈 수도 없는 통증보다야, 박박 긁어 댈 수 있는 가려움증이 더 사치스런 쾌감을 선사한다. 그래 가려움증이란 특히 외부와 밀접한 관련성을 갖고 있다.
간지럼 태우기.
그런데 그 간지럼 태우기는 통증을 유발시키는 고문 같은 악의가 전혀 없는 행위다.

내 가려움증도 그런 류일 것이다.
간지럽다.
설령 그 누가 악의에 찬 음모로 시비를 걸었을지라도, 내 몸은 그런 유치한 언행들을 가소롭게 여기고 있다는 증거다. 악의에 대한 반응이 내 몸에 나타 난 증상이라면 나는 그런 악의를 유희로 즐기고 있다는 말이다. 허위사실에 근거한 상상력을 진실이라는 잣대로 재단하고 있기에 그네들의 악행이 어릿광대의 유희로 여겨진다는 말이다. 칼자루를 쥐고 있는 이에게 칼끝에서 시비를 일삼는 우행이 가련하다는 말이다. 丁(정), 口(구, )竹(죽), 天(천)-可笑(가소)롭다는 말이다. 그 인간이 유치하다는 말이다. 냉혹한 자본주의 사회에 대해 유아적 심상을 소유한 『날개』의 ‘나/남편’이 유치한 것이 아니라, 그런 자연인을, 시퍼런 자의식을 지닌 지식인을 박제화하려 드는 자본이 오히려 유치하다는 말이다.

청년기의 속 쓰림을 넘어 이제 이순에 가까운 가려움증은 내가 그만큼 성숙해졌고, 달관의 경지에 이른 것이 아닌가 싶다.

체질을 바꾼다고, 온랭 기류가 역전되었다며 제 자리로 돌려놓겠다고 호언장담하는 한의원의 기백을 가상히 여겨 한약을 털어 넣기 시작했다. 가려움증은 즐기면 되는 것을, 그 자연스런 자의식의 유희마저 절단하려드는 의학적 사고를 난 너그럽게 수용했다. 그러나 정작 그 금싸라기를 털어 넣자 오히려 속이 쓰렸다. 병이 더한 것이다. 3월 25일이 되면 그 속이 더 쓰리겠지. 카드는 현금이 아닌 듯, 남용해댔으니.

가려움증은 이내 전염된다고 하던데,
이 글 읽고 그 어딘가 불현 듯, 가렵더라도,
날 욕하지 마시고,
그 사치를 즐기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