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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2: ‘화이부동'(和而不同)

2011.11.11 21:29

김성찬 조회 수:1558 추천:15

영혼일기 852: '화이부동'(和而不同)
2011.11.11(금)

‘화이부동'(和而不同)

왜 나는 오늘, 이 사자성어를 떠올렸을까?
발등에 떨어 진 불을 꺼야하는 일로, 생각을 정리할 겸 원족을 다녀왔다.
오가는 길에 나는 많은 말을 내뱉었다.

그런데, 원족 내내 나는『논어』'자로' 편에 나오는, 子曰: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 - "군자는 화이부동(和而不同)하고 소인은 동이불화(同而不和)한다”라는 경구를 속내에 떠올렸다. 이는, 군자는 화합하되 같아지지 않으며, 소인은 같이 어울려도 서로 화목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뒤집어서 나의 남에 대한 태도라는 관점에서 살펴보면, 군자는 남들과 어울리되 타인에게 자신과 같아지라고 요구하지 않으나, 소인은 남에게 자신과 어울리려면, 반드시 자신을 추종하라고 요구한다, 는 말이다.

사람을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 수단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 적의 적은 동지라는 말에는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적의 적을 이용한다는 말이다. 이는 마치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 그 어떤 도구라도 개의치 않고 사용하겠다는 말이다.

작금 교단을 어지럽히고 있는 총무당선무효 공방은 선거에 이기기 위해 양측 모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는 데에 그 다툼의 요인이 있다. 그리고 그 어느 한쪽은 상대방의 처자식에다가, 정신 줄을 놓은 불신조카까지 흔든 흑색선전까지 개의치 않았다. 추악한 선거전의 막장을 선뵀다. 너무나 추악하고, 간악해서 분노를 넘어, 슬픔이 인다. 한마디로 더럽다. 그런데 더 끔찍한 것은 그 적의 적과 손을 잡은 이가 그들의 손에 놀아 날, 내일이 매우 염려스럽기 그지없다. 우린 무저갱으로 향하고 있다. 그들은 결코 친구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동이불화(同而不和). 함께하나 결코 화목할 수 없을, 우리 신앙공동체를 어지럽힐 계략만이 이권을 눈앞에 두고 횡행할 것이다. 뒤에서 사람 죽이려 들면서, 앞에서는 이빨을 희번덕거리는 지킬과 하이드의 이중플레이가 우리를 구역질나게 하고 있고, 할 것이다. 주님이 오실 그날까지. 왜냐하면 그들은 화인 맞은 양심들이기 때문에.


그런데도 그런 잡류들의 간악한 궤적을 좇아가는 이들이 있다. 눈에 띈다. 자생한 것인지? 아니면 상호 긴밀한 네크워크를 구축한 사악한 음모의 산물인지? 알 수는 없지만, 정말 걱정이다. 이렇게 백일하에 드러내 보이는 간악하고, 추악한 인간 군상들을 영적 멘토 삼았다고 공공연하게 자랑하고, 더 나아가 그 힘의 권능을 배경 삼은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는 이를 본다. 학식이 뭐고, 상식이 뭐며, 그 신분은 또 뭔가? 그 정도의 분별력과 판단력도 없는 이들이 교단 행정을 하고, 목양을 한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것인지? 정말 이해할 수 없다.

이럴 수는 없을까?

비록 내가 그 어느 전투에서 적을 이길 수 없을 지라도, 적의 적을 일시적 승리를 위한 도구로 사용하지 않기. 이 경우 적의 적은 상식도 원칙도, 도덕도 윤리도 없는 사람. 함께 어울리되 생각이 달라도, 내 편이 아니어도, 내치지 않고, 죽이려 들지 않는, 상호 화이부동'(和而不同)을 인정해 주는, 타인에 대한 인격적 태도를 갖기. 아마 이건 허망한 바람일 뿐일 거다. 현실 무망한 바람. 이 실낙원에는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 백일몽.

우리가 속한 공동체는 전체주의적 집단이 아니다. 강압적으로 사람을 굴복시키려 들고, 타인의 인격을 함부로 무시하고, 말살하려드는, 인간의 비인간화를 용인하는 폭군이 지배하는 세상이 아니다. 적어도 내가 속한 이 공동체는 신앙공동체이다.

‘화이부동'(和而不同)

Ⅰ.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의 다양성과 통일성(은사의 다양성과 통일성)의 상호관계를 말하고 있는 고린도전서 12장의 말씀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이다. 은사가 다르다고 하나 될 수 없다는 것은 말씀 위반이다. 성경은 각 사람에게 주신 각기 다른 은사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라는 말씀이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고전12장 4-7; 11-13)

Ⅱ.
교회 일치와 연합을 말하고 있는 에베소서(엡 4:1~6)의 경우는 또 어떤가?

“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5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6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이는 일색(一色)이 아닌 일치(一致)와 연합을 말하고 있다. 이 말씀도, ‘화이부동'(和而不同)이다. 다르다고 차별하지 않고, 나와 같지 않다고 배척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로 부름 받은 우리들이 행할 합당한 신앙적 삶의 자세이다.

폭력을 사용해서라도, 타인을 절차와 의도가 부도덕한 자기 욕망에 굴복시키려드는 이들 때문에, 동네가 소란해 질 것 같다. 거기에 더해 적의 적이 움직이려 든다. 나는 적의 적을 동지 삼지 않는다. 적의 적이 상식적이고, 건전하게 재진입하길 바랄 뿐이다. 건전하고, 건강한 회복을 바랄 뿐이다. 이 길이 우리 안에서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첫걸음이라 나는 여기기 때문이다. 동이불화(同而不和)를 도모하는 이들이여, 부디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자세를 취하라. 거기에만 상호 윈-윈과 공동체의 평화가 깃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