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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풍성한 구속(救贖)

2008.10.19 23:43

김성찬 조회 수:1794 추천:34

영혼일기 100: 풍성한 구속(救贖)

2008.10.19(주일)



한바탕 신명나는 굿판을 벌이고, 돌아들어 선 빈방이 허허롭다.


네 집 내실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내 상에 둘린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시 128편 3절).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 전통에 가득한 자는 복 되도다 저희가 성문에서 그 원수와 말할 때에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시 127: 3-5).


결실한 포도나무 같은 아내도, 어린 감람나무인 자식도, 태의 열매도, 전통에 가득한 화살도 없는 이 파리함과 공허함. 시편의 한 기자는, "여호와께서 저희의 요구한 것을 주셨을지라도 그 영혼을 파리하게 하셨도다"(시106: 15).라고 말했지만, 내 요구한 바를 얻은 것도 없이, 영혼까지 파리한 이 내 허탈한 자화상. 난 빈곤을 제 의지로 선택한 확신범이지도, 어쩔 수 없이 독신을 즐기는 무기수도 아니다. 항산(恒産)이 없인 항심(恒心)을 유지할 길 없는 잡범에 불가하다. 난.


자치기를 함께하다 저물녘 그 허허바다로, 돌아서 들어가던 풀기 없는 그녀의 가녀린 어깨가, 내 넋을 앗아갔다. 그녀는 내 목양 현실이다.  


작자 미상(未詳)인 시편기자는 그래서 이렇게 읊조렸을까?

이스라엘아 바랄지어다 여호와께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구속’이 있음이라(시130:7).


풍성한 구속(救贖).

항산(恒産)이 있어야  항심(恒心)이 있듯, 구속도 풍성해야 하는데. 백날이 가고 천 날이 가도 한결같은 이 옹색한 구속. 이 부끄러운 구원. 하여, 그 작자 미상의 시편기자는 그 ‘풍성한 구속’을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의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시130:6).”라고 희구하고 있다. 풍성한 구속을 파수꾼보다 더 기다린 그 작자 미상의 시편기자는, 과연 그 생에 그 바람을 득(得) 했을까? 얻었다는 말이 없으니, 그의 풍성한 구속(救贖)은 희원일 뿐이었을 거다. 작금에도 그 ‘풍성한 구속’을 희구하는 이들의 기원(祈願)만이, 풍성히 구천(九泉-九天)을 떠도는 현실태를 보면.


근데, 왜 작자미상일까? 그 무언가 짜릿한 성취 없는 공허가 그는 부끄러웠던 걸까?


그런데 난 응답도 없는 면구스런 희원을 이렇게 만천하에 공개하고 있다. 응답도 받지 못한 자가 응답을 갈망하는 청중들을 대상으로, 응답을 논하고 있는 형국이다. 치유 받지 못한 생이 치유를 기다리는 베데스다 못가에서 치유를 설파하고 있다. 하여, 풍성한 구속도 없이, 풍성한 잡설로만 충만하다.


근데, 왜 작자미상일까?  그는 그 이름 석 자까지 감추며 오직 하나님과만 연통(連通)하고팠던 걸까? 


작자 미상(未詳) -그는 아니 그녀는, 하나님으로만 직통하고픈 신비주의자였을까? 근데, 난 내 영혼일기를 만천하에 공개하고 있다. 그래서 자기 상(賞)을 이미 받아 버린 것 아닐까? 아니 벌까지 다 받아 버린 것 아닐까? 그간 100회의 영혼 일기를 써오면서 받았던 시시비비가 하늘의 응답을 가로막고 선 것 아니었을까? 하늘로 직통하지 못하고, 스멀스멀 방바닥 균열을 틈타 은밀하게, 땅 끝에서 땅 끝으로만 파고들어 영혼들을 질식시키는 연탄가스 같은 내 음모. 그래서 응답이 없는 것 아닐까? 풍성한 구속이 없는 것 아닐까?


그런데도, 나는 왜 영혼일기를 쓰는가?

내 생애에는 ‘없는 풍성한 구속’이 ‘불가피한 축복’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 그 ‘응답 없는 풍성한 구속’이 나에게는 ‘피할 수 없는 축복’이다. 응답이 없는 희원이 나에게 피할 수 없는 직무이기 때문이다. 그래 나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풍성한 구속 없이 풍성하게 사는 법’을 신속히 접수하는 것이다. 항산(恒産)이 없어도 항심(恒心)을 유지하며 사는 일이다.( 일정한 경제적 바탕을 갖추는 것이(여기선 경제적 바탕만을 말하는 것 아니다.) '항산(恒産)'이고, 일정한 정신적 안정을 기하는 것이 '항심(恒心)'이다.) 


나는 왜 영혼일기를 공개하는가?

‘소멸의 아름다움’을 쓴 작가 필립 시먼스는 겨우 서른다섯 되던 해에 루게릭병에 걸려 5년 시한부 인생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그는 “이 책을 쓴 것은 쓰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글쓰기는 결국 작가가 사물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들이 저마다 자신의 존재를 신성한 것으로 느끼도록 도와주고 싶었다”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인생은 우리가 소망했던 것보다 더하기도 하고 덜하기도 한다. 또한 우리가 알았던 것보다 희극적이기도 하고 비극적이기도 하다. 희극은 행복으로 끝나고, 비극은 지혜를 낳는다. 우리는 행복하게 현명하고 현명하게 행복해지기를 바란다.”


‘죽어가는 기술’(art of dying)을 배워 가야했던 그가, ‘살아가는 기술’(art of living)을 터득하여 되살아나는 ‘풍성한 구속(救贖)’을 오늘 죽어가는 자들에게 전하고 있다. “불완전한 삶이 주는 뜨겁고 고통스런 기쁨”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난 그래서 영혼일기를 쓴다.

다시 필립 시먼스 이야기다. “한 번에 찻숟가락으로 하나씩 생명력을 덜어내는……날마다 당하는 이 느리고 성가신 폭력……죽음이 언제 닥칠지 모른다는 공포가 항상 눈앞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결함 있는 삶이 어떻게 충만한 삶이 될 수 있는지, 깨진 꿈이 어떻게 우리를 더 완전한 상태로 깨어나게 할 수 있는지” 생각하는 기회를 얻기 위해 난 영혼일기를 써 내려갈 것이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는 일 없다는 말이 진리라면, 난 먼저 자진해서 드러냄으로 치유받고 싶다. 그리고 치유하고 싶다. 그 풍성한 구속(救贖)을 기다리는 이 땅의 모든 작자 미상(未詳)들을.



저 나지막한 함석집, 저녁밥을 짓는지 포르스름한 연기를

곧게 피워올리며 하늘과 內通하는

굴뚝을 보고 내심 반가왔다

거미줄과 그을음이 덕지덕지 달라붙은 창틀에

올망졸망 매달린 함석집 아이들이 부르는

피리소리, 그 單音의 구슬픈 피리소리도

곧장 하늘로 피어오르고 있었다

울어도 울어도 천진한 童心은

목이 쉬지 않고

저처럼 쉽게 하늘과 連通하는구나!


아 아직 멀었다 나는

저 우뚝한 굴뚝의 정신에 닿으려면!

괄게 지핀 욕망의 불아궁이 속으로

지지지 타들어가는, 본래 내 것 아닌 살, 하얀 뼈들

지지지 다 타고 난 하얀 재마저 쏟아버리지 못하고

다만 無心川邊에 우두커니 서서

저녁밥 짓는 포르스름한 연기 피어오르는

저 우뚝한 굴뚝을 바라만 보고 있는


-고진하 「굴뚝의 정신」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