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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1: 존경하옵는 조병하 장로님 전 상서

2011.09.14 22:14

김성찬 조회 수:1821 추천:70

영혼일기 801: 존경하옵는 조병하 장로님 전 상서
2011.09.14(Wed.)

존경하옵는 조병하 장로님 전 상서

관생(冠省)하옵고,

지금 제 손엔 이태 전에 장로님께서 저에게 보내주신 책, 행동경제학자인 리차드 H. 탈러와 법률정책자인 캐스 R. 선스타인 공저,『넛지 Nudge』(리더스북, 2009)가 들려져 있습니다. 이 책을 장로님께서 저에게 선사하신 연유는, 지난 2009년 8월 25일 화요일 총회 본부에서, 「한국성결신문」 사장이신 장로님께 제가 총회적 현안에 대한 저의 공적 입장을 표명했던 사건과 무관하지 않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날 제가 쓴 일기의 제목이 「영혼일기 367: BIG BANG」이었습니다. 바로 그날 103년차 우리 총회 실행위원회에서 권총회장님께서 총회장 사의를 표명하셨습니다. 총회가 공동으로 결의한 「성령컨퍼런스」를 눈앞에 두고 행정수반이 자진 사의를 표명하셨던 것입니다. 교단 총회 103년 역사상 전례에 없었던 교단 수장의 사퇴 선언은, 우리들에게는 빅뱅과도 같은 충격(a big bang-like impact)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본인도 모르게 총회가 결의한 경주 「성령컨퍼런스」의 ‘동원부장’으로 임명되어 있었습니다. 하여 총회결의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저는 성령컨퍼런스 성공적 개최를 위해 한 힘을 기울였습니다. 바로 그런 의무감이 미묘한 정치상황과 맞물려 주체할 수 없는 격론을 표출해내게 했었습니다. 그리고 그 정치적 공방의 한 축에 「한국성결신문」이 있었습니다.

「한국성결신문」은 제718호 2009년 8월 22일(토)자에 ‘성령컨퍼런스 준비단계 ‘혼선’-총회장단과 총무 갈등…원만한 보고․논의 부족’이라는 헤드라인을 뽑았습니다. 그러니까 기껏해야 한 줄 가십(gossip)성 기사에 불과한 입방아거리를, 마치 교단 최대 현안인 것처럼 잔뜩 부풀려, 1면 상단에 100호(?) 활자로 때려 그 불화(?)를 각인시키려 들었던 것입니다. 그때 그 상황에서 저는 그 기사내용이 한마디로 성령컨퍼런스 동원해제령 같은 선전선동 문구라고 여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기사가 불씨가 되어 저는「한국성결신문」사장이신 장로님과 그 사명의식으로 대면해야만 했었습니다. 조사장님께서는 그 기사는 성령컨퍼런스의 ‘공론화’를 위한 것이었다고 해명하셨고, 저는 귀 신문이 그 행사에 대한 ‘건설적인 공론화’를 통해 총회결의를 존중해주는 신문이 되길 바란다는 고언을 드렸었습니다.

그 후 어느 한 날, 저에게 한권의 책이 배달되어 왔습니다. 모두(冒頭)에 언급한 책을 뜻밖에 장로님께서 저에게 보내주셨던 것입니다.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읽지는 못했습니다. 경제학에 문외한인 제게는 낯설고, 벅찬 책이었기 때문입니다. 단지 ‘넛지(Nudge)’라는 단어가 생경했고, 그 단어의 의미가 ‘팔꿈치로 슬쩍 찌르다,’라는 의미를 지닌 ‘타인의 선택을 유도하는 부드러운 개입(by 탈러 & 선스타인)’이라는 정도로만 깨우쳐 아는 것만으로도, 제겐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내가 다시 그 책을 뒤적인 것은, 연전에 저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슬쩍 찌르신 장로님께서, 지난 8월 31일에 개최 된 전국장로회 수련회 때에 “「한국성결신문」 사장 조00 장로가 마이크를 잡고 선동을 하여 812장의 연판장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성결네트워크, 김명기 땅끝 컬럼 「전국 장로회의 실수」(2011. 9. 13.))”는 기사를 접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기서 그 책의 내용을 요약 정리할 생각이 없습니다. 단지 간간이 제 눈에 밟히는 내용만 인용하려합니다. 그리고 이제야 생각해 봅니다. 그때 그 상황에서 당신은 왜 그런 책으로 내게 말을 걸어 오셨을까? 당신이 내가 읽었으면 하는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김명기 목사는 장로님의 적극적인 개입을 “마이크를 잡고 선동하여,”라는 문구를 채택했습니다. 그 개입이 만일 부드러운 개입이라 여기셨다면, 그 문구가 다소 불만족스러우실 거라 생각합니다.  

「의도적으로 설계된 세상에서 똑똑한 선택을 이끄는 힘, 넛지」

'넛지(Nudge)'는, 당신만의 설계도를 그리고 싶다면 그들의 넛지를 거부하라, 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저는 궁금합니다. 언론의 공정성여부는 차치하고라도, 저에게 의도적으로 설계된 세상에서 똑똑한 선택을 하는 힘을 길러라, 는 의중으로 제게 부드럽게 충고하신 장로님께서, 왜 당신은 의도적으로 설계된 그 세상의 넛지를 거부하지 않으셨는지? 말을 바꾸자면, 넛지를 강조하신 장로님께서 어떻게 타인에게는(제1부, 제3장 떼 지어 몰려다니는 인간), 의도적으로 설계된 강력한 넛지를 구사하셨는지? 넛지는 사람들의 선택에 부드럽게 간섭하지만 여전히 개인에게 선택의 자유가 열려 있는, ‘자유주의적 개입주의’를 뜻한다는 점에서, 장로님의 넛지는 넛지의 폐해, 즉 우리 안에 가두고 일방적인 입장만 강요한, 극도의 개입주의적 간섭이 아니었는지? 의문이 듭니다.

“개와 고양이를 구분하는 단순한 테스트에서 혼자 결정을 내리라고 요구했을 때, 사람들은 거의 오류를 범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모두 틀린 답을 내놓은 모습을 지켜본 사람들은 그 중 1/3이상이 틀린 답을 내놓았다. 해당과제는 매우 단순했다. 그들은 자신보다 먼저 실험에 참가한 사람에게 강력하게 넛지를 당한 것이다. 과제가 더 어려워질 경우 이 같은 집단동조 현상은 더욱 뚜렷이 드러났다. 탈러는 그 이유를 두 가지로 풀이한다. 첫 번째는 사람들의 답변에서 정보가 전달되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사람들이 대세(틀)를 따르려고 하기 때문이다.”

행여 지난 전국장로회 수련회에서 조장로님께서 내놓은 답이 만일 틀린 답이었고, 무려 800 여명의 장로님들께서 조장로님의 강력한 넛지에 밀려, 그 틀린 답에 집단으로 동조한 것이었다고 한다면, 그 넛지의 폐해는 그 누가 책임질 수 있을까 염려 됩니다. 그리고 만일 그것이 정답이라 할지라도 왜 객관성을 담보해야하는,「한국성결신문」사장께서 그 넛지 아닌 넛지에 앞장서야만 했는가라는 점이 궁금합니다. 이 경우, 이는 언론이 권력의 시녀인 경우입니까? 아니면 언론이 그 권력의 주체인 경우입니까? 이 사건과 관련지어 유추해 보건데, 왕왕 「한국성결신문」은 틀린 답을 성결가족에게 강력하게 넛지 아닌 생사람 잡는 금지(禁止)로 호도하곤 했습니다. 최근의 한두 가지 예만 들어 봐도 그 사실을 이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2011년 7월 16일자 제812호 ‘전남서지방회 세례 교인수 허수 보고’에 관한 조심성 없는 폭로. 그리고 2011년 6월 15일자 제808호「애오개」가 발한 ‘오적(五賊), 삼백삼장(三白三張) 〓 예부호(예성출신, 부흥사, 호남사람)’ 라는 적반하장격인, 교단을 반쪽 내려는 해괴망측한 등식(等式) 제시 등등이 근거로 들 수 있는 단적인 사례들입니다.

저는 오늘 우리 교단의 제2의 빅뱅은, 누구랄 것 없는 승자독식주의에서 기인했다고 단정합니다. 이젠 세상도 폐기한, 역사는 승리자만 기억한다, 는 역사왜곡 자기기만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오만에서 말입니다. 이런 무지몽매한 권력에 부역하는 논조로 불행하게도「한국성결신문」이 일관해 왔습니다. 그러나 “시인 유홍준은 ‘저 일몰 끝에 /발목을 내려놓은 그’는 ‘눈멀고 귀 멀어’ 아무런 소통도 할 수 없지만 ‘누가 먼저 궁둥이를 털고 일어나’는 순간 상대편은 곤두박질칠 수밖에 없다. 이 시소의 자세는 유홍준의 타자에 대한 윤리를 압축한다. 시소는 이쪽과 저쪽 사이에 대화를 가능하게 해주는 기구가 아니라,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무게를 지키는 바라봄의 거리로 지탱하는 기구다(오연경 「죽음의 슬하에서 나는 본다」- 유홍준 시집 「저녁의 슬하」,창비),”라고 ‘타자에 대한 윤리’에 대해 일갈하고 있습니다.

미우나 고우나 우리는 시소 각각 한편에 올라탄 운명공동체에 속한 신앙적 동지들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는 그 누구랄 것도 없이 상대를 인정하지 않고, 궁둥이를 털어 버린 우(愚)를 범했습니다. 하여 세상이 뒤집어진 것입니다. 「한국성결신문」이 낳은 신문고(申聞鼓)가 「기독교성결신문」이라는 아이러니하며, 세속도시로 내 몰린 제(諸) 고소고발사건들이 여기서 원천봉쇄당한 우리들의 치부가 아닙니까? 왜 우리는 6억 5천만 원이나 되는 막대한 헌금을 세상의 강요에 의해 토해내야 합니까? 하여, 언로를 막고, 돌들의 외침을 외면해 버린, 보도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교단 본부에 자리한 언론의 오만과 허구를 세상이 백일하에 폭로해 버렸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네 일그러진 자화상입니다.

우리는 자정능력을 상실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물의 자정능력이란, 오염된 물이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점차 다시 깨끗한 물로 되돌아가는 현상입니다. 그런데 자정 작용이 잘 일어나기 위한 조건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구정물도 흘러야 자정이 된다는 것입니다. 물이 흘러감에 따라 공기와의 접촉면이 증가하여 용존 산소량이 증가되고, 물이 흘러감에 따라 오염 물질이 확산, 희석, 침전되어 농도가 낮아진다고 합니다. 오염된 물도 흐를 수 있도록 배려하는 여유가 있어야 그 강물이 정화된다는 말입니다. 물길을 내어주고, 언로를 터주고, 당신들의 비대한 몸집으로 시소 저편에 있는 상대를 지탱해 줘야 한다는 말입니다. 강원도의 상습적 산사태는 물길을 막아서 버린 나무 등걸들 때문에, 물길을 잃은 물줄기가 우회하여 마을을 쓸어가 버린, 수마(水魔)된 연고입니다. 지금 우회한 노도(怒濤)가 우리네 마을을 덮치고 있습니다.

존경하옵는 조병하 장로님.

그 책이 일러 준바, 깨끗하고 쾌적한 화장실을 만들기 위해 지저분한 사람 ‘출입엄금’ 대신, 소변기에 파리 모양 스티커를 붙이는 넛지를 우리 상호 구사해 보면 어떨까요? 우리 성결공동체를 오염시킨다는 혐의를 받는 사람들을 금지(禁止)가 아닌, 「한국성결신문」이 소변기의 파리 모양 스티커가 되어, 적어도 신앙 양심을 지닌 성결가족들의 자발적인 정화를 꾀하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부드러운 '넛지(Nudge)'를 구사해 봄이 어떨까 싶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손실기피현상에 빠져 한 줌 손에 쥔 권력에 집착하는 이들에게, 땅엣 것이 아닌 영원한 하늘 상급을 그 언론에서 계시(啓示)해 줌으로써, 움켜쥔 그 손을 놓게 하는 부드러운 힘, '넛지(Nudge)' 를 구사해 보심이 어떠하실는지, 감히 아룁니다.

부드러운 넛지 아닌, 두서없는 천학과 무례로, 존경하옵는 조장로님의 맘을 불편하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해서(海恕)를 빕니다. 총총.

김성찬 배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