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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8: 마을로 들어가지 말라 하심에 대하여

2009.05.21 21:32

김성찬 조회 수:1623 추천:27

영혼일기 298: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라 하심에 대하여
2009.05.21(목)


어떻게 그 나이에 시력이 1.5냐고 그 누가 그에게 물었다. 그는 도봉산 산신령이다. 날마다 그 산을 탄단다. 그가 그 날마다의 산행을 강행하는 이유는 산이 좋아서가 아니라 산이 좋다는 처방 때문이었단다. 그는 민간요법의 달인이다. 그 입에서 나오는 그 상식은 도를 넘는다. 그래서 그는 도를 넘는 산신령 칭호를 받고 산다. 그가 그의 궁금증을 이렇게 해소해 줬다.


“아침에 일어나서 눈을 뜨자마자 자기 침을 검지에 찍어 눈에 살살 마사지 하듯 바르면 눈이 좋아져요.”


그래 추접스럽긴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침은 과학적으로도 항균 작용을 하는 효능이 있다. 성경에도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실 때, 종종 침을 사용하셨다는 구절이 나온다. 마가복음 7장과 8장에 연달아 나온다. 마가복음 7장 33절에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고치실 때,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라고 기록되어 있다. 침 뱉어 에바다(열리라) 하심으로,(막 7:35)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여졌더라(막 7:35). 또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막 8:23).” 이렇게 침 뱉어 벳새다에서 맹인을 고치셨다.

바로 그 벳새다에서 맹인을 고치신 마가복음 8장 22-26절 말씀을 묵상한다.
그 본문 가운데,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이르시되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라 (막 8:26)”을 묵상해 본다.

예수께서 시각장애인의 개안시켜 주신 기적은 마가복음 8장 이외에도, 복음서 두 군데(눅7:21과 요9:1-7)에도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마가복음 8장 22-26. 벳세다의 소경을 고치신 사건은 다른 본문에 나오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신 사건과는 전혀 다른 개안사건으로 연이어진다. 벳세다는 베드로의 고향(요1:44)이다. 바로 자신의 고향에서 베드로는 이 개안의 기적과 마주한다. 살가운 향리 형제의 개안 체험은 바로 자신 자신의 개안인 양 베드로는 받아 들여졌을 것이다. 하여 그 개안체험은 바로 자신의 개안체험으로 이어진다. 그는 그 육체의 개안을 통해 자신의 영적 개안을 체험한다. 그 증거가 바로 그 본문에 연이어 나온다.

마가복음 8장 27-38절에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과 예수의 죽음과 부활 예고(마 16:13-28; 눅 9:18-27)가 기록되어 있다.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막 8:29),”
그러나 그의 영적개안은 예수의 수난예고로 이어졌다. 그는 그 영적개안을 감당치 못했다. 그는 영적개안 후, 이내 주님의 꾸중을 듣는다.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막8:33).”

그랬다. 영적 개안(開眼)이 만개(滿開)되지 못한 베드로의 영적 연약함은 그에게 영적 좌절만 안겨 주었다. 그는 그 영안이 열린 후 예수님의 공생애 내내 영적 헛발질만 거듭해댔다. 말고의 귀를 잘라버리는 일시적 육적 만용을 부렸지만, 그는 끝내 십자가의 예수를 유기해 버렸다. 아버지에게 유기당한 예수를 그는 유기해 버렸다. 아버지 하나님의 그 외아들 예수에 대한 유기는 하나님께서 인간 구속의 은총을 이루시고자 그 아들에게서 얼굴을 돌리신 뼈저린 사랑의 유기였지만, 그 제자의 유기는 세속적 욕망과 위협에 굴복한 철저한 배신의 유기였다.

그래 눈을 뜬다는 것. 영안을 뜬다는 것. 그것은 또 다른 사명의 출발이다. 그러나 그 사명은 감내키 결코 쉽지 않은 은총이다. 개안은 그래서 어렵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 벳세다의 소경을 단번에 고쳐주실 수 있었을 것이다. 말씀 만으로. 그런데 성육신 하시듯, 절차를 밟고, 그 소경의 발달한 육감을 선용하시는 그 눈에 침 바르고 안수해 주시는 점진적 절차를 통해 그의 개안을 허하셨다. 그리고 그것도 단 번에 모든 것을 밝히 볼 수 있게 하지 않으셨다. 말씀을 잘 살펴보라. 이런 절차를 밟으셨다.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 쳐다보며 이르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이것이 계시의 점진성이다. 한 번에 모든 것을 다 보여주시지 않는다. 만일 나에게도 이 목회적 사명에 대한 그 청사진을 미리 다 보여주셨다면 난 이 길을 택하지 않았을는지도 모른다. 작금 우리 안에서 인 진리수호의 힘겨루기를 몇 달 전에만 보여 주셨더라도 난 그 대표회장 자리를 사양했을는지도 모른다. 발을 적시고 무릎을 적시고 가슴을 적시듯(겔47장) 그렇게 우린 거역할 수 없는 사명의 강을 건너는 거다.이렇게 점진적 개안 작업을 해 나가신 우리 주님께서 그 소경의 눈을 온전히 밝혀주신 연후에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이르시되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라 (막 8:26).


앙드레 지드의『『전원교향곡』은 ‘개안 이후’를 감당하지 못한 눈먼 고아 소녀 제르트뤼르의 슬픈 사랑 이야기다. 개안 후 계곡의 급류에 몸을 내던진 한 떨기 피어나지 못한 꽃망울.

『기꺼이 길을 잃어라』(로버트 커슨 지음 |김희진 번역)는 책이 있다. 시각장애인 마이크 메이가 어릴 적 시력을 잃은 후, 약 40년 만에 줄기세포 이식이라는 과학의 발달로 시력을 되찾게 되는 과정과 그 이후의 예기치 못했던 문제점과 그 원인을 다룬 책이다. 시력을 잃어서 세상과 사물에 대한 지속적이고 직접적인 상호교감과 실험 과정을 제대로 거치지 못했던 시각장애인들에게는, '본다는 것'은 너무 고되고 힘든 투쟁일 수밖에 없다는 생생한 증언이 담긴 책이다. 그는 비록 시각장애인이었지만 그는 스포츠 선수로, 사업가로 당당히 성장했다. 그러던 그에게 개안의 가능성과 기회가 찾아왔고, 그는 호기심 때문에 개안수술을 받기를 선택했다. 그러나 개안 이후, 그에게는 예기치 않았던 문제들이 발생했고, 개안 적응 과정은 일종의 장애물 경주였다.

 

그야 말로 보이는 것들과의 투쟁이 시작되었다. 어릴 적 눈을 통해 인지했어야 했던 두뇌의 사물 판단능력이 생성되지 않아 모든 걸 다시 익히고 학습해야 했던 것이다. 그랬다. 아는 것과 보는 것이 일치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책은 우리에게 ‘눈만 뜨면’ 한 순간에 모든 것을 한 눈에 볼 수 있을 거라는 착각을 여지없이 깨뜨려 버린다.

왜 우리 주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이르시되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라” 당부하셨을까? 라는 의문이 여기서 다소 풀리는 듯하다. 물론 그의 사명의 때가 아직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신앙고백을 한 베드로에게도 입을 더 이상 열지 말라 하셨던 것처럼, 예수께서는 그 사명의 완성을 이룰 십자가의 때를 위해 그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자제를 당부하신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개안의 은총을 받은 자에게 그 은총을 온전히 누리게 하시려고, 그 개안 이후의 적응기간 준수를 요구하신 것 아닐까?만일 그가 개안 이후, 곧 바로 마을로 뛰어 들어갔다면. 그는 아는 것과 보는 것 사이의 낯선 충격을 견뎌내지 못했을는지도 모른다. 눈먼 고아 소녀 제르트뤼르의 투신이 그에게 더 익숙했을는지도 모른다. 자신을 무시하고, 자신을 저주하며, 능멸하던 이들의 얼굴을 그는 감정 없이 바라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오늘 난 오랜 칩거 끝에, 그 은총으로 칼자루를 쥔 자가 되어 있다.
그런데 주께서 내게 이 시간 명하신다.


“그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