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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3: 격조(格調)

2009.06.22 22:52

김성찬 조회 수:1627 추천:19

영혼일기 323: 격조(格調)
2009.06.22(월)

어제 시온교회 입당예배 행사에서 만난 한 후배 목사가 이렇게 말했다.

직접 총을 쏘지 마세요. **학번들 시키세요.

늘 은유와 해학이 넘쳐나는 그 후배 목사의 한마디 충고가 가슴 깊이 파고들었다. 어제는 주일 낮 예배시간부터 오후 행사 설교 그리고 밤 깊은 시간까지 계속해서 나에게 성령께서는 ‘격조 높은 삶’을 살라 명하셨다.

난 엊그제 미국 발, ‘한낮의 총성’(오해춘 목사의 글)에 이런 댓글을 달았었다.


금 이곳은 소리 없는 총성이 빗발치고 있습니다.

죄로 가득 찬 인간들의 그 간악하고, 추악한 본성이 여지없이 때를 만난 듯 번뜩거립니다.


총기 단속이 위헌인 세상은 비단 그곳만은 아닙니다.


내 안에서 발사 일보 직전에 있는 충동이

두렵습니다.


그 후배는 이 댓글을 읽었음에 틀림없다.

그런데 오목사의 ‘한낮의 총성’에는 이런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미국인은 총을 쏘고 싶으면 언제든지 아무에게나 총을 쏜다. 때문에 옆 사람이 총부리를 들이대지 않을까 싶어 헬로우! 헬로우! 미소문화가 자리매김하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가 부러워하는(부끄러워하는) 그 황야의 건맨들의 ‘헬로우! 헬로우! 미소문화’가 본능적 자기방어의 발로였다는 말 아닌가? 문화란 충족되지 않고는 해소될 수 없는 본능적 욕구를 창조적으로 승화시킨 것이라고 한다면, 그 총잡이들은 상호 격발본능을 미소 문화로 승화시킨 것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나는 그 ‘헬로우’에 약하다. 아니 우리네는 너나 할 것 없이 ‘헬로우’에 약하다. 그뿐 아니라, 말이 거칠고, 글이 거칠다. 우리는 단아한
에티켓, 촌철살인의 위트, 감칠 맛 나는 해학이 빈곤하다. 반말, 비속어, 은어 등 막말 공화국이라고 할 만큼 우리는 속 시원히 내뱉는 막말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다. 한마디로 격조 높은 말씨와 예절이 빈곤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격조 있는 언어는 결코 범박하거나 세속적이지 않다.

우리 속담에
‘썩어도 준치’라는 말이 있다. 같은 의미를 지닌  ‘물어도 준치 썩어도 생치’라는 속담도 있다. 그 뜻은, “본래 좋고 훌륭한 것은 비록 상해도 그 본질에는 변함이 없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자칭 고대 법대를 나왔다는 사기꾼을 천 년 전에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 그  자칭 고대 법대 출신의 사기행각에 휘말린 우리네를 도와주던 후배 변호사가 이렇게 말했다. “썩어도 준친데 고대 법대 출신들은 그런 짓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 변호사는 고대 법대 출신들은 그런 짓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할 수가 없다, 고 했다.

이는 격조 있는 배경이 격조 있는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다. 사람의 품격과 취향은 환경의 산물이라는 말이다.
격조 있는 삶이란 격조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장치에서 가능하다. 그 장치는 화려하거나 번잡할 이유가 없다. 빈 화병에 장미꽃 한 송이는 삶의 격조를 높인다. 불치 병상 그 절망어린 머리맡에 놓인 성경책 한권이 한 인생의 삶과 죽음의 격조를 드높인다.   


제 때에 사례비를 챙겨주지 않는 신자들에 대해 섭섭함을 토로하던 한 목회자는 이런 말을 했다.


이 섭섭함은 돈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들의 목회자에 대한 예의 때문입니다. 그 기본 예의조차 없는 이들의 무례함이 날 좀 힘들게 합니다.


격조 있는 목회를 위한 최소한의 격조 있는 예의에 대해 그는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그는 흔들리고 있다. 흔들리지 않으며 피는 꽃이 어디 있느냐고 그 성도들에게 역설했다는 그가 흔들리고 있다. 이젠 격조 있는 장치가 그에게 필요한 것 같다.

오늘 귀한 중진 목사님에게 격조 있는 흔연대접을 받았다. 40년 전통의 격에 맞는 그 ‘사노리’에서. 우린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격에 맞는 목사, 격에 맞는 교회, 격에 맞는 지방회, 격에 맞는 총회 등등, 격조 높은 삶에 대한 염려와 관심을 우린 서로 나누었다. 그리고 우린 다짐했다. 우리 신앙공동체가 격조 높은 관계를 가능케 할 장치와 환경을 조성하는 일에 서로 협력하자고 했다.

격조 있는'(Decent) 삶이란, 옷을 걸치는 삶이다. “Are you decent?”라는 영어 문장은, “옷은 입으셨나요?” 라는 뜻이다. 격조 있는'(Decent)이라는 단어가 ’옷을 입는‘이라는 의미가 있다는 말이다. 타락한 인간들에게 최소한의 격조 있는 삶을 위해 야훼께서는 가죽 옷을 입히시지 않으셨던가?

한낮의 총성이 가득한 세상에는 반드시 보안관이 있다.


그렇다. 나를 격조 있는 사람 되게 하는 비결은, 그 말씀을 내 적신에 걸치는 것이다. 그 말씀이 내 삶의 보안관 되게 해야 한다. 보안관은 격식 있는 예복을 입은 사람들이다. 막말과 막된 행동이 난무하는 황야 같은 이 신앙공동체가 보안관을 부르고 있다. 그 말씀의 옷을 걸친 보안관의 등장이 절실한 시점이다.

나는 내가 그 보안관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착각이라 여겨진다. 왜냐하면 나는 온전히 말씀의 옷을 걸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제부터 오늘까지 계속해서 내 안의 성령께서는 내게 절제라는 말씀의 옷을 입히시려는데, 나는 자폐증에 시달리는 아이처럼 자꾸만 그 옷을 벗어 내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 루비콘 강을,
엘리야의 겉옷으로 강을 갈라 권위의 강을 건넌 엘리사처럼(왕하 2:14),
그 말씀의 옷의 권능으로 이 강을 건너야 한다. 

끝으로 말합니다.
여러분은 주님 안에서 그분의 힘찬 능력으로 굳세게 되십시오.
악마의 간계에 맞설 수 있도록, 하나님이 주시는 온몸을 덮는 갑옷을 입으십시오.
에베소서 6장 10-11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