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591: 반 시(半 時)의 고요

2010.10.12 17:30

김성찬 조회 수:1630 추천:31

영혼일기 591: 반 시(半 時)의 고요
2010.10.12(화)

‘반 시(半 時)의 고요’ 앞에서 난 멈춰 섰다. 그 구절이 묵시문학적 상상력을 돋우는 시구(詩句)같았기 때문이다. 하여 나는 시적 상상력을 동원해 운문식 단상으로 그 지면을 메우고 싶었다. 그러나 그 구절은 묵시록의 한 구절이었다. 나는 그 묵시를 자의적 단상으로 정리한다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 글은 일기문이 아니라 보편타당한 성경해석이 요청되는 큐티 자료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구절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종합할 석의적 역량이 내게 부족하다는 거였다. 그 묵시에 대한 해석이 다양해서 나는 어느 한 편의 교리를 내세울 수 없었다. 물론 내가 동의하는 한 해석이 있지만, 한쪽에 치우친 교리적 해석을 강조해서는 안 되는, 신학이 아닌 신앙 말씀묵상 자료를 내가 집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무적인 이유가 그 진행을 멈춘 이유로 그 무엇보다 선행했다.

일곱째 인을 떼실 때에 하늘이 반(半) 시간쯤 고요하더니(계8:1)

이 반(半) 시간의 고요에 대한 몇 가지의 견해가 있다. 하나는 안식일의 휴식. 둘, 하나님의 백성들의 찬양 소리를 듣기 위한 고요. 셋, 환란과 고통 가운데 처한 성도들이 부르짖는 간구 소리를 듣기 위한 침묵. 넷, 바로 이어서 나타날 일인 일곱 나팔 재앙의 준비 기간인, 그 징벌로 나타날 동요 이전의 고요와 침묵. 그리고 다섯,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직전의 고요.

‘반 시(半 時)의 고요’ -Ⅰ.

10. 08 지난 금요일 나는 ‘반 시(半 時)의 고요’ 앞에서 머리를 숙였다. 내 어머니 같은 압해도 이모님께 향년 89세로 2010년 10월 7일(목) 하늘의 부름을 입으셨기 때문이다. 그 영정 사진 앞에서 한 동안 나는 그 미소를 바라봤다. 그 후덕하고, 너른 가슴으로 군핍한 우리네를 보듬어 안아 주었던 이모님. 그 애통하고, 절통했던 한 생. 그 굳은 믿음. 그 ‘반 시(半 時)의 고요’ 앞에서 나는 눈물을 삼켰다.

그래도 그 ‘반 시(半 時)의 고요’는 지상에서 천국으로 향하는 천국환송식의 일순 고요였다. 이 ‘반 시(半 時)의 고요’는 안식일의 휴식 같은 고요이기도 하고,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직전의 고요 같은 고요였다.

‘반 시(半 時)의 고요’ -Ⅱ.

10. 09 지난 토요일 나는 이렇게 기도했다. 나눔아트센터 Nanum Art Center 개원감사예배가 있었다. 그 ‘반 시(半 時)의 고요’ 앞에서 나는 애찬기도를 했다.

역사와 창조의 하나님. 주께서는 오늘 여기 새 역사를 창조하셨습니다. 주께 영광을 돌립니다. 이 새 역사 창조는 주님의 긍휼에 풍성하신 은혜의 열매(현현)입니다.

35년 전 체념이 만성화 되어 삶의 의지조차 잃은 영혼들이 모여든 베데스다 못에 주님께서 친히 다가오셨습니다. 그 임재로 베데스다 못가에서 서성이던 영혼들이 전인적 치유를 맛보았습니다. 이제 베데스다 못 가의 영혼들이 그 임재로 체험한 기적을 맛보고, 누린 은혜를 세상과 나누겠다는 결단을 이 시간 주님께 드립니다.

나눔아트센터 Nanum Art Center.  이름 그대로 그 사랑을 나누는 예술적인 삶을 그 힘의 능력에 의지하여, 온누리에 펼치고자 합니다. 우리를 부요케 하기 위해 가난을 택하신 그 은혜(고후8:9). 그리스도의 자원하신 가난을 기억하며, 자진해서 가난해지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이 결단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는 실천적 각오가 되게 도우소서. 하여,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골1:29)”게 하소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주안에서 최선을 다한 양동춘 목사님과 그의 다른 한 팔 된 이광옥 사모님을 위로하시고, 복주소서. 이제 애찬을 받습니다. 이 식탁이 벳새다 광야의 오병이어 그 기적의 첫 날 되게 도우소서. 감사드리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나눔아트센터 Nanum Art Center 개원감사예배. 그 ‘반 시(半 時)의 고요’는, 하나는 안식일의 휴식. 둘, 하나님의 백성들의 찬양 소리를 듣기 위한 고요. 셋, 환란과 고통 가운데 처한 성도들이 부르짖는 간구 소리를 듣기 위한 고요이기도 했다.

‘반 시(半 時)의 고요’ -Ⅲ.

10. 10. 주일 제주선교 60주년 기념교회 공동설립 및 개척자 박재우 목사 파송을 위한 제 25회 서울중앙지방회 선교대회.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한 신앙공동체의 헌신이 아름답게 열매를 맺었다. 정상을 향하여 나아가는 알피니스트가 돌부리에 넘어졌다고 등정을 포기하는 법이 없다. 그가 정통 알피니스트라면 말이다. 그랬다. 제주 선교에 걸림돌 된 이들이 한, 둘이 아니었으나 우리는 오늘 그 목적을 주안에서 이뤘다. 충만했고, 은혜가 넘쳤다. 서울중앙지방회 선교대회 역사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대회였다. 바울이 안디옥교회에서 이방인을 위한 전도자로 파송을 받듯, 중앙교회에서 부교역자로서의 사명을 마감할 때 그런 은혜를 입혀달라고 박재우 목사는 주께 간구해 왔단다. 그런데 그 파송 예배에서 구름 떼 같은 100여 교회의 성도들과 수 십 명의 목회자들의 축복 기도와 찬송을 들으며, 그는 그 기도의 응답을 맛보았다고 감격해 했다.

이 선한 일에 산파역을 주께로부터 받은 나는 그의 파송패에 이런 내용을 적어 줬다.

파 송 패 / 제주선교 60주년 공동설립 기념교회 개척자 박재우 목사


역사를 주관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서울중앙지방회, 제주직할지방회, 중앙성결교회는 제주선교 60주년 기념교회를 공동으로 설립하는 귀한 영적 사업을 추진함에 있어, 박재우 목사를 개척자로 선정하였습니다.

아울러 우리는 이 영적 사업이 완성되는 그 날까지 영적, 물질적 협력을 아끼지 않을 것을 다짐하며,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1:6)”는 말씀에 의지하여 귀하를 파송하며, 이에 파송패를 드립니다. 2010년 10월 10일


충만하고, 풍성한 선교대회였다. 신원그룹회장 박성철 장로님의 간증과 김철규목사님의 파송설교는 은혜 위의 은혜였다.

제주선교 60주년 기념교회 공동설립 및 개척자 박재우 목사 파송을 위한 제 25회 서울중앙지방회 선교대회. 이 ‘반 시(半 時)의 고요’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찬양 소리를 듣기 위한 고요다.

‘반 시(半 時)의 고요’ -Ⅳ.

10. 11(월) 우리는 작금 지방회 현안에 대한 견해를 나누었다. 하얀 물결이 일었다. 물결은 의당 하얀 것인데, 하얀 물결을 검다고 하거나, 검게 물들인 손들 때문에 물결은 흑 빛이 된다. 그래서 그 상투어인 하얀 물결, 이라는 상호에 사람들은 낭만을 느끼는 것일까? 동일한 사건을 어느 측면에서 보는가? 어떤 안경을 쓰고 보는가에 따라 물빛이 흐리기도 하고, 맑기도 한 것이리라. 그래서 사람이 중요하다. 중심에 선 사람이 중요하다. 그러나 중심에 섰다 하나, 중심이 아닌 경우가 그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 역사가 왜곡된다. 진실이 빛을 잃는다. 진정성이 훼손 된다. 중심은 입장이 없다. 치우침이 없다. 그런데 중심 없는 이들이 그 중심을 논한다. 팔이 안으로만 굽은 이들이 중심을 설파한다. 중심 없는 중심을 중심되게 하는 고언은 외려 매도된다.

2009년 제주도 표성면 성지 도예방에서 내 손으로 빚은 도자기에 나는 이런 글귀를 새겼었다. 내 책상 머리에 그 도자기가 놓여있다. '손이 中心을 잃으면, 흙도 그 中心을 잃는, 中心.' 그 도자기를 빚는 장인의 손이 중심을 잃으면, 그 흙도 중심을 잃는다는 그 도공의 말을 듣고 난 그렇게 그 도자기에 새겼다. 우리 공동체는 지금 수전증이 심한 도공의 손이 중심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 신앙공동체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중심이 없으니, 중심이 없다. 중심없는 중심을 중심이라 호도하는 옹위는 중심을 잃은 행위다. 그 중심을 바로 잡는 충언만이 중심을 중심되게 할 것이다. 그 손이 중심을 잡아야, 그 흙(공동체)도 중심을 잡게 될 것이다.

하얀 물결 - ‘반 시(半 時)의 고요.’ 그는 응답이 없었다. 그들은 메아리도 없다. 그 응답없는 의도적인  ‘반 시(半 時)의 고요’는 넷, 바로 이어서 나타날 일인 일곱 나팔 재앙의 준비 기간인, 그 징벌로 나타날 동요 이전의 고요와 침묵인가? 극히 염려된다.

‘반 시(半 時)의 고요’ -Ⅴ.

묵도. 예배 시작 전의 촌각의 침묵. 우리는 세속의 분진을 온 몸에 묻히고 살다가, 성전에 들어서면 반 시(半 時)의 고요 속에 잠긴다. 왜냐하면 그 시간은 성속(聖俗)이 분별되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그 시점의 고요는 우리를 순간에서 영원으로 이끈다. 영혼일기. 요즘은 듬성듬성 체력 때문에 사돈네 벌초하듯 쓰고 있지만, 오늘 다시 나를 돌아보는 이 ‘반 시(半 時)의 고요.’ 그 고요 속에서도 나는 여전히 성속(聖俗)을 오간다. 아서라, 이방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