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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4: 떨고 놓기를…….

2010.12.31 17:33

김성찬 조회 수:1602 추천:28

영혼일기 634: 떨고 놓기를…….
2010.12.31(금)

난 한 때, 궁켈(Hermann Gunkel)을 비판했었다.
나는 그의 양식 비평사에 이런 일침을 가했었다.

“양식 비평사의 한 창시자로서의 궁켈은 타고난 문학가로서 자신의 저술을 통해 고대 히브리인들의 문학성과 감수성을 파악하는 뛰어난 재능을 보여 주었고, 성서의 ‘문학성’을 체계적으로 발굴하는 지대한 공헌을 끼쳤으나, 결국 그는 성서에서의 미학적이고도 예술적인 요소에만 너무 집착한 나머지, 성서해석의 최고 목표가 신앙인의 믿음과 삶의 법도를 올바르게 밝히는데 있음을 간과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의 일관성 있는 성서가 양식(form)들의 조각들로 분해되는 위험을 안게 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궁켈과 그의 학파는 성서를 무수히 많은 단편(斷片)으로 쪼개 버림으로써, 책 전체의 메시지를 파악하는데 실패한 것입니다.(⌜우리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아나⌟, 본인의 졸서 ,『성경이 말하게 하라』중에서)

이는 그가 성경의 총체성을 왜곡한 우를 범했다는 비판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런 비판이 곧 나에게 해당되는 것임을 이제야 깨닫는다. 나는 벌써 3년 여, ⌜영혼일기⌟라는 문학적 장르를 통해 내 나름대로 성경을 인용하고, 해석하고, 적용해왔다. 그런데 나는 성경말씀을 아전인수식으로 적용해 왔다. 말씀이 나를 끌고 간 것이 아니라, 내가 내 상황에 필요한 말씀만 뽑아내 인용해댔다. 과연 말씀은 말씀이었다. 그 어떤 상황이나 내 필요에 응답하지 않는 말씀이란 없었다. 성경에는 인간만사에 적용되는 모든 말씀이 있었다. 나는 놀랐다. 아니, 이런 말씀도 있나? 이런 식으로 성경은 나를 매번 놀래키곤 했다. 놀라면서 나는 감격해 하며, 내 감정을 충실히 반영해 놓은 말씀들을 마구 끌어다 인용했다. 말씀이 나를 끌고 간 것이 아니었다. 외려 내가 말씀을 마구 내 감정과 요구대로 끌고 다닌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공개하지 않은 영혼일기 중에는, 이런 말씀을 인용한 일기(영혼일기 595: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도 있다.

“내가 해 아래 한 모든 수고를 미워하였노니 이는 내 뒤를 이을 이에게 남겨 주게 됨이라 뒤에 올 그 사람이 슬기로운 사람일지, 어리석은 사람일지, 누가 안단 말인가? 그러면서도, 세상에서 내가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지혜를 다해서 이루어 놓은 모든 것을, 그에게 물려주어서 맡겨야 하다니, 이 수고도 헛되다……수고는 슬기롭고 똑똑하고 재능 있는 사람이 하는데, 그가 받아야 할 몫을 아무 수고도 하지 않은 다른 사람이 차지하다니(전 2:18-19,21).”

이처럼, 성경에는 참 별의별 말씀이 다 있다.
그 마스터 키 같은 성구를 나는 영혼일기에만 끌어다 쓴 것이 아니다.

설교라고 예외일수 없었다. 나는 내 주관적 감정이 입질하는 대로, 내 구미에 맞는 말씀들만 끌어다가 설교랍시고, 힘주어 설파했다. 문학적 단편이 아니라, 감정적 편린들을 파편처럼 내뱉었다. 종합비타민으로서의 설교가 아니었다. 회중들은 그래서 구루병에 걸렸던가? 햇볕도 들지 않는 지하교회당이 상징하는 바대로, 편식을 강제하는 내 설교로 회중들은 골연화증에 시달리고 있다. 그래서 어린이들은 키가 잘 자라지 못했고, 팔다리가 휘었으며, 설사증·기관지염·폐렴 따위에 늘 시달리고 있다. 성인들이라고 온전하겠는가? 어른들은 쉽게도 뼈가 부러지지 않았던가?

정말로 말씀에 나는 큰 무례를 범했다. 말씀을 말씀되게 하는 일에 나는 반역(反逆)을 했다.

말씀을 말씀되게 하는 일이란 말씀대로 사는 일이다, 라는 일반적 정의에 나는 동의를 표해 왔다. 그리고 나는 내가 택한 말씀에, 나는 나름 충실한 삶을 살아왔다고 자부해 왔었다. 그런데 오늘 나는 그 자부심에 내 스스로도 좋은 점수를 줄 수 없다. 왜냐하면 내가 택한 말씀들이란, 나의 이성, 감성, 영성 그러니까 나의 사상, 생각, 판단, 상식, 원칙, 취향 등등에만 부합하는 한정적인 말씀들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내가 운전석에 앉아 내 맘대로 질주한 내가복음 행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뒤늦게 깨닫는다.

말씀을 말씀되게 하는 삶이란,
말씀이 이끄는 말씀을 받아, 그 말씀을 말씀되게 하는 삶이다.

다시 말해, 말씀을 말씀되게 하는 삶이란, 내 주관적인 판단과 감정으로, 내가 택한 말씀을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내 멋대로 행동하는 삶이 아니라는 깨달음이다. 말씀이 주체가 되어 내게 허락하신 말씀을, 달던 쓰던 받아 그 말씀 따라 준행하는 삶이어야만 한다. 성령으로 예수를 잉태한 마리아처럼, 우리도 성령으로 말씀을 잉태해야만 한다.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1:38a)." 성령으로 잉태한 말씀을 순종으로 말씀되게한 마리아처럼, 나도.

그래서 나는 이 가을에 접어들면서부터 주일 오전 예배에 복음서를 설교하기 시작했다. 마태복음 1장 1절부터 시작하지는 않았지만, 복음서 말씀들을 본문 삼아 설교를 해왔다. 그 이유는 알파요, 오메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삶이 생생하게 기록 된, 복음서들이 말씀의 중심이라 생각됐기 때문이다. (이 말은 물론 복음서만 말씀이라는 말이 아니다. 지금 내게는 그 복음서들이 보다 더 요청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비단, 그 이유만도 아니다. 구약은 자신이 별로 없고, 신약의 서신서의 경우 그 서신서들이 말씀하고 있는 교리적, 목회적, 신앙윤리적 본문들은, 자칫 잘못 설교했다가는 내 감정이 이입될 것 같아(그런 경험이 다분해서), 피했다. 그리고 소망했다. 복음서를 설교하면서, 내 설교와 글과 삶이 복음(福音)이 되길 말이다.

하여. 2010년 세밑,
나는 뒤늦게 그동안 내가 쌓은 알량한 성경지식을 다 파기해 버리기로 결심한다.
사실 버릴 것도 없다. 먹어둔 것이 거의 없기에.

이 영혼일기를 쓰고 있는데, F.M이 날아들었다. F.M은 내가 만든 플래시몹(flash mob)의 약자다. 플래시몹(flash mob)이란, 신어자료집에 의하면 그 뜻은 이렇다. 플래시몹(flash mob) [명사]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일정한 리더 없이 전자 우편이나 휴대 전화로 연락하여 한꺼번에 모여서 행사나 놀이를 하고 나서 금방 사라지는 군중.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플래시모브’로 적어야 한다.

그랬다. 번개가 친 것이다. 서부인 동부에서 점심번개가 쳤다. 난 득달같이 날아갔다. 아침부터 황송한 그 어떤 제안도 누군가로부터 받았는데, 거기다 더해 F.M(flash mob)까지 받게 되다니, 감개가 무량했다. 내가 한 해 어떻게 살았나? 자조적 분위기에 일순 젖었었는데, 그 2통의 복음(?)에 내가 그래도 크게 잘못 살지는 않았구나 싶어, 감사해 했다.

이제 새해에 바란다.

떨고 놓기를…….
그간 일천한 성경지식과 천박했던 삶을 다 털어내고,

새해에는 말씀에 온전히 인도함을 받기를 원하는 이들과 함께,
HBFM(Holistic Bible Flash Mob(통전적 말씀 번개팅))을 즐기고 싶다.

하여,
성서해석의 최고 목표가 신앙인의 믿음과 삶의 법도를 올바르게 밝히는데 있음을,
내 몸으로 증명해 낼 수 있었으면 한다. 

말씀이 이끄는 말씀을 받아, 그 말씀을 말씀되게 하는 삶, 을 살고 싶다.

그리하여 나여,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마3:8),
부디, 새날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