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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8: 예수가 없던 그 추도예배

2011.02.22 11:36

김성찬 조회 수:1627 추천:41

영혼일기 668: 예수가 없던 그 추도예배
2011.02.22(화)

어제 고(故) 박** 목사 1주기 추도예배가 있었다. 그에게 영적 양육을 받은 성도들과 그에게 음덕을 입은 이들이 함께 모여 그를 추도(追悼)했다. 그가 잘 살다갔다는 삶의 성적표를 그는 다시 받았다. 인간 편에서 보면, 한마디로 아까운 사람이 너무나 일찍 갔다.

그런데 좀 박절하게 표현하자면, 오늘 추도예배는 추도식일 뿐 예배는 아니었다. 추도(追悼)란 사전적 의미에서 ‘죽은 사람을 생각하여 슬퍼함.’이다. 그랬다. 오늘 예배는 그랬다. 그래서 예배가 아니라, 추도식일 뿐이었다.

그 추도예배에는 절제가 없었고, 예수가 없었다.

먼저, 절제를 말하자면, 그건 그 예배시간에는 절대로 소리 내어 울어서 안 된다는 거다.

지금부터 약 30여 년 전, 학우 유광재 전도사가 나이 삼십 갓 넘어갔다. 겨우 스물 넷, 돌도 지나지 않은 젖먹이 딸을 가슴에 품은 꽃다운 아내를 두고 먼저 갔다. 칠보산 기도원에서 금식하다 갔다. 금식 20일째 연탄가스 사고로 갔다. 그 전도유망한 촉망받던 젊은 목회자의 요절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헤아려 보려 무진 애를 썼으나, 헤아릴 길이 없었다. 천한 것들 남겨 회개할 기회를 더 주시려고 우리들은 살려 놨다, 라는 자조적 해석으로 유족들을 우리는 위로했을 뿐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산정묘지에서 피에 물든 세마포로만 칭칭 감긴 시신을 땅에 묻는 장면에서도 그 젊은 아내는 울지 않았다. 신음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렇게 모진 절제로 점철된 그 하관 예배가 끝나고, 부활의 소망을 안고 모두가 하산한 후, 학우 심원용 목사와 나 그리고 그의 아내와 그녀의 친정어머니만 남은 산정묘지에서 일순 통곡이 터져 나왔다. “이젠 실컷 울어!” 그녀의 신심 깊은 어머니의 하명이 떨어지자, 그녀는 통곡했다. 산이 울고, 하늘이 울었다. 우리도 주저앉았다. 그녀의 통곡은 하늘을 울렸다. 그건 절제의 극치였다.

예배 시간에 소리 내어 울다니. 나는 용납할 수 없었다. 하나님께 올리는 찬양이 숨을 고르던 순간, 한동안 이어진 그 한풀이는 우리 모두의 영을 산란케 했다. 누구를 위한, 그 무슨 예배인지?

그 무슨 예배인가? - 추도식인가? 예배인가?

그 예배에는 ‘예수’가 없었다.

예수의 부활이 없었다. 부활신앙 고백도 없었다. 다시 오실 주님도 없었다. 놀라웠다. 심각했다. 예배 시간 내내, 예수는 거의 한마디로 나오지 않았다. 이것이 우리네 수준인가? 예수 없는 예배. 그리고 그 예배시간에 그 죽은 자를 찬양하는 추모사만 난무했다. 예배 따로, 추모식 따로 드렸어야 했다. 추도예배가 뭔지 성경적으로, 신학적으로, 교리적으로, 감정적으로 정리되지 못한 상태로 우리는 그 예배에 임했다. 예배라는 명칭을 빌어 추도식 행사를 한 듯, 내내 내 심령이 불편했다. 나뿐만 아니라, 영적 감각이 있는 선배들도 그랬다고 털어 놓았다.

누구를 위한 예배인가?

추도예배란, 죽은 자를 위한 예배가 아니다. 이는 산자를 위한 예배다. 우리의 예배 중에 죽은 자를 위한 예배는 없다. 우리는 죽은 자를 위한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 드려서도 안 된다. 예배는 산자를 위한 예배다. 산 자를 위한 예배라면, 오늘 그 일 년 전에 죽은 자가 오늘 저 천국에서 그분 안에서 누리는 복락을 말해야 한다. 우리 오늘 비록 땅에 발을 딛고 있어도, 하늘 소망을 바라며 살아야 한다고 전해야 한다. 죽어 다시 사는 영생복락이 예수 안에 있음을 전해야 한다. 먼저 간 그분이 마음에 품어 오늘 누리고 있는 부활신앙 고백을 증거 해야 한다. 천국환송예배로 그를 보냈다면, 오늘 우리는 눈물을 감추고 그 소망의 기쁨을 나눠야 한다. 그 소망의 기쁨을 유족들은 뭇 영혼들에게 몸으로 증거 해야만 한다. 그 자리에는 신앙적인 유아들이 많지 않았던가? 집에 가서 울었어야 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28).”

무슨 말씀인가? 예수의 죄 없는 죽음조차도 추모의 대상일 수 없다는 말이다. 그의 대속적인 죽음 앞에서, 그 죽음을 애도하지 말고, 우리는 우리와 우리 자녀들의 영적 형편을 점검해야 한다. 천국행 티켓을 발부 받기에 합당한 삶인지, 산자 자신을 살펴보라는 말씀이다.

우리 어머니께서 그러셨다.
“나 죽거든 추도예배 같은 거, 절대로 드리지 마라.”
나는 그 깊은 뜻을 이제야 확실히 깨닫는다.
하여, 나는 그 누군가에게 그 공개적 추모는 오늘로 끝내라 말했다.

그리고 그 예배는 없고, 호곡성만 울린 예배당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 예수가 살아 증거 되는 예배, 설교, 기도만이 요청된다. 극단적인가? 아니다. 우리의 영적 무지와 무감각은 그래도 깨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호곡성을 들으며 나는 이 말씀이 떠올랐다.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를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마8:21-22).”

죽은 자로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 그 교회는 그 호곡에 더 이상 묻혀서는 안 된다. 우리 사역에 있어서 공적(功績)은 없다. 크던, 작던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은혜다. 하나님의 은혜를 누린 만큼 우리는 그 은혜를 불신영혼의 구원을 위해 나눠야 한다. 인간들의 눈에 뵌 업적의 크기가 그 은혜의 크기가 아니다. 그 은혜를 깨달아 안 만큼, 그 은혜는 깊고, 넓은 것이기 되기 때문이다. 그 은혜에다가 사람의 공적을 곱하지 마라. 인간의 공적은 언제나 ‘-’ (빼기)일 뿐이다. 만일 그 은혜에 사람의 공적을 곱하려 들면, 산수처럼 마이너스만 곱하는 꼴이 된다. 알고 있지 않은가? ‘+ ☓ - = -’다. 그 은혜에 내가 깨달은 은혜를 곱해야만 이웃에게 전할 수 있는, 차고 넘치는 은혜가 된다. 이것이 ‘+ ☓ + = +’다.


더 이상 그 호곡이, 그 공적이, 그 유지가 그 교회를 지배해서는 안 된다. 그 누군가는 3년은 가야 한다고 했으나, 그렇게 오래가면 안 된다. 교회 안에 유훈 통치는 없다. 이번으로 종결해야 한다. 영적 권위 이양을 신속하게 하라. 그것이 교회를 교회되게 하고, 서로의 살길이다. 그것이 하늘에 거한 고(故) 박** 목사를 진정으로 위한 길이며, 그것이 그의 진정한 바람인지도 모른다.

감히, 그 은혜에 기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