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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일기 873: 후회 없이, 산뜻하게-故 김일환 장로님 별세에 부쳐
2011.12.10(토)


목포엘 다녀왔다. 세상이 좋아져 하루 만에 서울과 목포를 오갈 수 있는 열차를 이용 했다. 겨울로 진입해 들어가는 12월의 풍광이 나를 우수에 젖게 했다. 하여, 오가는 내내 故 박화목 선생 작사, 채동선 작곡의 가곡 「망향」을 듣고, 또 들으려 오갔다. 바이올린 선율이 내 가슴을 에어냈다.

<망향> 박화목 작사 채동선 작곡

 

꽃피는 봄 사월 돌아오면 / 이 마음은 푸른 산 저 넘어 / 그 어느 산 모퉁길에 어여쁜 님 날 기다리는 듯


철 따라 핀 진달래 산을 덮고 / 먼 부엉이 울음 끊이잖는


나의 옛 고향은 그 어디런가 / 나의 사랑은 그 어디멘가


날 사랑한다고 말해 주려마 그대여, / 내 맘속에 사는 이 그대여.

그대가 있길래 봄도 있고 아득한 고향도 정들 것일레라

이 노래의 가사를 쓴 故 박화목 선생.
내 젊은 날 그분과 함께 「기독교아동문학 신인상」수상 작품들을 고르던 기억이 새로웠다.
그분은 지난 2005년도에 가셨다.

오늘은, 교단 부총회장을 역임하신 북교동교회 원로 장로 김일환 장로께서,
어제(12월 09일 오후 17시 30분) 90세 일기로 소천 하셨다는 부음을 듣고,
고향엘 내려갔다.

내 맘속에 사는 이 그대여. / 그대가 있길래 봄도 있고 아득한 고향도 정들 것일레라.

이제 故人이 된 김일환 장로님도 고향의 지인 중 한 분이셨다. 고인은 우리 어머니와 갑장으로서 당신은 장로님으로, 우리 어머님은 전도사님으로 북교동교회에서 동역을 하셨다. 그리고 우리 가정에 대한 그분의 사랑의 배려가 극진했었다. 그래서 오늘까지 그분의 자녀들과는 형제처럼 지내고 있다. 맏형은 가까이 할 기회가 거의 없어 얼굴만 아는 정도이지만, 창기, 문기, 명기, 정기, 완기 그리고 정민, 연숙이는 매우 살가운 사이다. 김일환 장로님의 자녀들은 여전히 한 고향 형제자매요, 내 맘속에 사는 그대들, 이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정지용은 고향을 그렇게 읊었다. 인걸이 간 데 없는 고향을 아쉬워했던가 보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내 맘을 설레게 하는 곳이 고향이다. 맘속에 사는 이 그대, 어머니를 그 땅에 묻었기에, 나는 그곳을 그리워하지 않을 수 없다. 내 육신의 모체가 묻힌 곳. 언젠가 나도 묻힐는지도 모른 곳.

야곱과 요셉이 애굽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기대했던 가나안 땅으로 상징되는 헤브론을 죽어 그렸듯, 어머니처럼, 나도 그곳에 머리를 둘지도 모른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형제들이 그들 형제간의 화해를 이루었던, 헤브론처럼 우리네 얽히고설킨 형제간의 갈등과 불화도 내 맘속에 사는 그대, 어머니 앞에서 해소되리라 확신한다. 아브라함 사후 이삭과 이스마엘이 그랬고(창25:9), 이삭이 죽자 야곱과 에서가 역시 그런 것처럼(창35:29), 내 주검도 그 누군가의 화해의 디딤돌이 되길, 고향 땅이 화해의 장이 되길 바란다.

고 김일환 장로님의 자녀․손들도 그 천국환송예배 축제의 장에서, 고향 선영에서 화해의 잔치를 벌이게 될 것이다. 그랬다. 오늘 내려갔더니, 그 자녀 중 한분이 이렇게 말했다. “누가 모시나, 돌아가면서 홀로 된 노부를 모시는 일로 궁리 중이었는데, 하늘 하나님께서 모셔가 버렸어요.” 환히 웃었다. 사위목사가. 사위자식 * 자식이라더니, ㅋ,ㅋ 그런데 그 사위목사의 아내인 막내 딸 연숙이의 눈은 벌갰다. 입관예배 기도를 내가 했다. 예배 내내 그 붉은 눈시울이 변색하지 않았다. 명기 목사의 아내인 넷째아들 며느리가 젤로 서럽게 울고, 또 울었다. 그간 몸과 정신이 쇠약해지신 시아버님을 모시고 수발들며 사느라, 제일로 수고를 많이 했을 터이나 더 잘 모시지 못한 회한에 눈물겨워 했다.

고 김일환 장로님은, 자신은 후회 없는 삶을 살았다, 라고 말씀하셨단다. 그랬다. 가정적으로, 신앙적으로, 사회적으로 그분은 승리한 삶을 사셨다. 그런 분께서 가시는 길도 깔끔하게 가셨다. 노환으로 병원에 입원한 지, 단 사흘 만에 자신의 마지막 길을 산뜻하게 가셨다. ‘산뜻하게’라는 말은 ‘산듯하게’라는 말로 나는 풀이한다. 산 듯, 가셨다는 말이다. 자녀들에게 수발의 수고를 끼치지 않고 그분은 가셨다. 담당의사가 그랬단다.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버티시다가 막판에 몸을 놔버리신 경우”였다고. 정신력. 그분은 노령에 접어들면서 성경 필사에 매진 하셨다. 인터넷 신문 「성결네트워크」에 이런 기사가 올라와 있다.

故 김일환장로는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작은 붓을 이용해 다섯 번째 필사본 성경을 완성, 주목을 받았는데, 특히 성경 필사의 원본이 한문성경이었다는 점에서 그 정성은 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는 지난 2002년 12월 당시 북교동교회는 중국 단둥에 교회를 창립키로 하고 이를 위해 준비하고 있었는데, 김 장로는 당시 단둥교회에 소중한 선물을 전달하고 싶은 마음에서 성경필사를 시작했고 필사를 마친 후 귀한 다섯 권으로 제본을 마친 성경은 5월말 중국 단둥교회 창립예배 때 전달되었다.

 

故 김일환 장로는 1997년 2월 성경필사를 시작해 468일만에 첫 번째 성경필사를 마무리하고 이를 북교동교회에 헌사하였으며, 두 번째 권은 이명직 목사기념사업회에, 세 번째 권은 셋째 아들 교회사 박사 김문기 교수에게, 네 번째 권은 교단 100주년 기념사업회에 기증하는 등 총 다섯 번째 성경 필사를 완료한 것이다.

후회 없이, 산뜻하게

후회 없이 살다가, 산뜻하게 가신 것이다.
故 김일환 장로님께서는 정말 멋지고, 복된 삶을 살다 가셨다.
이는, 우리 모두가 바라는 삶과 죽음이 아니던가?


후회 없이, 산뜻하게

디 그 유족들도 그 생을 선친의 삶을 본받아
후회 없이, 산뜻하게, 살고 마감하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