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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찬

이젠, 오늘 이 시대, 이명박 시대(보수정권)의 조중동 사설 같군요. ㅋㅋ

좋은 글 먼저, 감사드립니다.

발터 라우센부시(Walter Rauschenbusch)는 그의 저서 '사회 복음을 위한 신학(Theology for the Social Gospel)'에서 사회 복음을 정의 하기를, 개인주의적인 복음이 외면하고 있는 '죄로 가득 찬 사회 질서,' 그 집합적인 죄를 회개하라고 촉구합니다. 이를테면 그것은 민족의 구원을 믿고 바라던, 옛 선지자들의 신앙과 같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개인의 구원 없이는 사회의 구원이 있을 수 없다는 전통적인 교회의 가르침을 '절반의 진리'라고 지적합니다. 집단이 행한 악행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질 때에야 비로소 온전한 진리를 위해 사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계속 인용해 보자면---.

그는 사회 복음의 신학은 죄란, 본질적으로 이기심이라고 정의 합니다. 하나님께만 범하는 죄는 희귀하다는 것입니다. 죄란 죄인과 하나님 사이의 사사로운 거래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상과 같은 관점에서 볼 때, 대칸님의 이런 글은 신앙적 낙관론이랄 수 있습니다.

대칸님의 글을 여기 옮겨 보자면,

"이 말에 동의 하신다면 사건의 원인과 진상이 교회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문제라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공동체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이고 나의 문제가 곧 공동체의 문제라는 등식이 성립될 것입니다. 이럴때만 목회자인 우리가 취해야 할 진정한 길이 무엇인 지를 알게 되고..."

옳지만, 그대의 '내탓'만으로 이 사태의 근본 원인과 처방을 찾자는 식의 논조는, 절반의 진리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사회(우리 신앙공동체 안에서 움튼) 악의 제거는, 어느 한 개인의 깊은 영성이나 신앙고백만으로는 불가능핟는 것입니다. 라인홀드 니버는 이런 자유주의적 환상, 정치적 낙관론에 비판적 입장을 취하면서, 사회는 결코 개인적 차원에서 처럼 도덕적일 수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 병든 신앙공동체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니버는 정치 세력을 통한 정의를 강조하며 크리스찬 리얼리즘(현실주의)를 그 대안으로 제시합니다.

이런 진단과 관점에서 볼 때, 수도원의 개인 영성만으로 병든 이 신앙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구조 악을 허물, 연대가 필요합니다. 하여, 우린 불의와 정의가 맞설 때, 반드시 어느 편엔가 서야 합니다.

살리는 문법을 구사하고, 상생의 책략을 도모하며, 행동하는 양심 되어야 합니다.
이 일에 우리 적극적으로 참여해야만 할 것입니다.

눈치보지 말고,
당당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