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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찬

동의합니다.

수도원의 영성이 피폐한 유럽사회를 지탱해 준 유일한 힘이었다고. 진정한 개혁은 골방에서 완성된다는 것을.

그러나, 침묵은 다릅니다. 칼 발트에 대한 라일홀드 니버의 비판은 정당합니다. 칼 발트의 3년여의 침묵은 침묵이 아닙니다. 비겁한 외면이요, 방관이요, 보신주의입니다.아니 또 다른 동조입니다.

신앙은 태도다, 라고들 말합니다.그런데 그의 파시스트들에 대한 신앙적 태도는 어떠했습니까? 야수적 인간 사냥에 혈안이 된 파시스트들의 집단 광기에 대해,이래서는 안된다, 고 그는 소리를 질렀어야만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민주적 독재와 살육에 대해서도 분연히 항거해야만 합니다. 그러니까 체제나 사상이 어떠하든지, 그 행위의 열매가 비진리일 경우 우리는 결코 잠잠해서는 안됩니다. 이데올로기나 윤리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본질적 인간됨, 인간되기, 인간답게 살기가 우리의 과제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영성에 대한 대칸님의 정의는 인상적입니다. 참된 영성 안에 공의도, 사랑도 공존한다고 저도 믿습니다. 그리고, 그 참된 영성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이 관상기도 라는 말이 내 안에 큰 기대를 불러 일으킵니다. 녹슨 수도관 교체만으로 근본 오염을 막을 수 없다는 성찰도 눈 길을 멈추게 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말하는 공의는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우리 소견에 옳은대로 말하는 정의가 아닌가, 라는 대칸님의 체험적 고백에 대해서도 부분 동의를 표합니다.

허나, 저는 내가 곧 정의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이 시대의 불화에 대해서는 침묵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집합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 그분의 전능과 우리의 무기력 사이의 불화를.

왕이 없어 모두가 왕된 포스트모던한 세상에, 중심되신 예수그리스도를 다시 모셔 들여야 합니다. 그 일을 위해 고난을 자초하신 성전 청결 예식이 우리 안에 재현되어야 합니다.

채찍을 들어 치시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