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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칸

관상기도는 기도 중에 최고의 경지라고 말하면 좀 이상할 까요? 지금 우리 개신교 지도자들 중에 는 아무도 관상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 없다고 생각합니다.관상기도는 말씀묵상의 단계를 지나서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는 단계입니다. 가장 쉬운 성경구절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관상기도는 바로 이런 단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관상기도는 기독교영성의 최고의 단계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불교 영성의 최고의 경지는 선(禪)입니다. 이 선은 고요함에 이르는 것입니다. 지면관계상 깊게는 설명을 못드립니다만 기독의 관상기도는 고요함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위 관상기도는 예수님처럼 사도들처럼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편모두는 관상기도에 이르는 기도요 이미 관상에 이른 기도도 있습니다.사도 바울이 관상기도자요 사도들이 관상기도자들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이 관상기도를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7장의 예수님의 기도는 이미 관상에 이른 상태에서 아버지와 주고받는 대화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하나님을 직접 뵐 수가 없어서 계시된 말슴인 성경을 가지고 하난님께로 나가지만 주님이 오시면 그 때도 성경이 필요할 까요? 관상 기도에 대하여 섣불리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토마스 머턴이 동서를 넘나들면서 그가 동양의 신비 종교에 놀랐다고 하는 것은 서양적 사고방식만 가지고 그것만이 전부인 줄 알았는데 이곳에도 와보니 그들 나름대로의 종교를 가지고 그들만의 문화를 이루어왔다는 데에 대한 신비감의 표현이었음을 알아야할 것입니다. 하나만 더 예를 든다면 기독강요를 쓴 칼빈은 동양에 고등윤리인 유교가 한 문화를 형성하며 수 십억 인간의 정신사를 이끌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저술되었다는 것은 알고 계신지요? 관상기도는 말씀과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관상으로 나갈 수가 없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독교의 관상에서의 침묵은 그냥 침묵이 아닙니다. 이 침묵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한 것입ㅈ니다. 성경에 나타난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장면이 부지기 수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말슴에 대한 묵상은 말씀으로부터 하나님의 뜻과 음성을 듣기 위한 묵상이요 침묵입니다. 말씀을 넘어 관상으로 초대되는 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사도 바울도 갈라디아서 2장20절에서 고백은 관상에 이르자의 고백인데 이것은 성령의 역사 없이는 불가능 한 것임을 기억할 것입니다. 이 글을 올린이는 영성에 대하여 80년초반부터 고민해온 사람입니다. 지금도 기독교의 참된 영성에 대하여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며 고민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알아갈수록 부끄럽고 사기꾼이며 주님과는 전혀 상관 없는, 하나님을 이용하여 밥벌이 하고 있는 것은 아니가? 하는 생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사람입니다. 두서 없는 글 너그럽게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은 2007-12-11
15:21: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