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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요셉

이동원 목사가 관상기도에 대해서 세미나까지 했고, 서울신대에서도 영성신학 시간에 관상기도에 대해서 실습도 한적이 있습니다. 사실 관상기도가 되는 사람은 관상기도를 하고, 안되는 사람은 안하면 되는 것인데, 자꾸 이게 좋다. 개신교는 이런게 약하다는 등등의 현실적인 조바심과 호기심 내지는 욕심으로 하다 보니 정상적으로 잘 이뤄지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기독교가 오리엔탈인가 옥시덴탈하는 것에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기독교를 터툴리안의 서양주도의 흐름으로 보자면 관상기도를 포함한 가톨릭적 요소는 굉장히 이국적이고, 개신교와 대비되는 개념입니다. 하지만 지리적으로나 성서학적으로 봐서 동양적인 흐름으로 받아들이면 영성수양및 훈련은 자연스럽게 될 것같습니다.

원래 기독교의 전통이 쿰란공동체라든지 요한공동체라든지 엣세나 파든 바리새파든 전통과 영성훈련을 중시한 것이고, 그런 흐름은 사막교부와 중세 그리고 현대 우리들까지도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금욕적 기독교, 자기희생적 기독교, 철저한 자기부정, 봉사와 구제등을 성서에 있기에 라고 볼 수 만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영성 훈련의 자기 빈곤에서 한국교회가 택하고 있는 것은 한마디로 따라하기와 흉내내기입니다. 리처드 포스터의 영성훈련 또한 토마스 머튼의 그런 요소를 상당부분 그대로 수용하고 있고, 그런 영성을 대형교회, 유명한 목사가 초청을 하고 레노바레 성경까지 편찬을 했죠... 관상기도 또한 그것 자체의 신학적 시시비 문제 이전에 이런 현실적인 상황에 대한 정확한 목회자들의 자기 결단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자꾸 잊어 버리는 것 두 가지가 있는데 사명과 검증입니다. 정치인, 경제계획도 작게는 몇 년에서 많게는 수십년까지 걸쳐서 검증을 하고 평가를 하는데 요새 신학이나 목회는 검증단계가 생략된 채로 부흥의 도구로 쓸만하면 우선 도입하고 보자는 생각이 강한 것 같습니다. 금이빨, 발길이 조정등 눈에 보이는 것을 가지고 목회에 써먹고자 하는 얄팍한 기술에 교회는 성서 중심이 아니라 목사중심, 부흥중심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관상기도에 대해서 긍정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비단 위에서 지적한 인본주의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기도행위다. 비성서적이다는 지적도 옳습니다. 하지만 그런 위험은 현재 우리가 하고 기도에도 얼마든지 존재합니다. 예수님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조차도 주문처럼 외우고 있는 우리가 관상기도에 대해서 단정짓는 것이 좀 어색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상기도는 검증되어야 하고, 개신교에서 널리 사용하고 권장하는 것 또한 매우 위험천만한 것입니다. 저도 관상기도를 교수님의 지도에 따라 해봤습니다만 기도에 몰입하기 보다 신비자체를 느끼려고 하는 의식이나, 관상기도에 대한 대단한 경외, 기도대상자에 대한 의지가 아니라 기도 자체에 대한 신뢰나 존경등 사실 잘 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훈련 부족이겠죠... 하지만 어떤 친구는 뭐 이런 저런 것을 느끼고 보고 들었다 하는 고백을 하는데, 개인의 고백이니깐 존중은 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정말 성서적이고, 영적인 것인지는 검증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단순히 무슨 신비한 것을 체험하고 듣고 보는 것이 관상기도의 목적이라면 차라리 안하는게 낳다고 봅니다. 꼭 관상기도가 아니더라도 황홀경에 빠지고 신비를 체험하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으니깐요... 하지만 관상기도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과 그 순간에 스스로를 평안하게 정리하고 생각을 비우고 말씀에 집중하는 것 자체가 매우 즐거운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꼭 관상기도를 해야만 무슨 깊은 기도와 탁월한 영성을 소유한다는 생각은 누구말대로 관상기도를 두 번 죽이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관상기도는 여러가지 기도 방법 가운데 하나로서 분명 다른 기도 방법들 처럼 장단점이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본인이 스스로 장점을 극대화 해나가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