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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칸

김성찬님의 글에서 저의 글이 아슬 아슬 하다고 하셨는데 그것은 이런 뜻입니다. 앞에 있는 글에서 관상기도에 대하여 강력히 부정하는 것에 대한 대응으로 한 예를 든것입니다. 사실 토마스 머턴이 활동하던시대는 모던시대가 끝나가고 포스트모던시대로 넘어가던 시기입니다. 서구의 젊은이들이 기독교에서 새로운 미래적 좌표를 찾지 못하고 동양의 종교에 매력을 느껴 동양으로 몰려가던 시기에 머턴 같은 영성가들은 동양의 종교에 무엇이 그렇게 젊은이들을 끌어드리는가 라는 것때문에 관심을 가졌다고 합니다. 관상기도는 알아가면 갈 수록 교회성장과는 특별히 관련이 적다는 느끼게 됩니다. 관상기도는 철저히 하나님과 1:1의 관계형성을 목적으로 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능동적인 자기의지의 노력이 필요하지만 어느시점에서 하나님을 만나면 철저하게 수동적인 기도의 자리로 내려가게 됩니다. 광상기도는 해도되고 안해도 되는 그런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이면 그 기도에 이르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의 중간지대가 없다면 기도역시 중간지대는 없습니다. 관상기도 몇번 참여했다고 하여 관상기도자가 된것도 아니고 관상기도에 대하여 다 아는것도 아닙니다. 끊임없는 기도훈련을 통해서만 관상에 이른다는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 단계는 하나님이 기도를 응답햇다 안했다하는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관상기도는 철저히 개인적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자기부인의길이요 자기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길입니다. 관상기도는 313년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기 이전의 박해받던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과 그 맥이 닿아 있는 것입니다. 강요셉님의 글을 읽고 공감하는바가 많습니다만 중도적인 입장이 느껴져서 몇글 올렸습니다. 2007-12-12
00:16: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