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김성찬

시대적 트랜드를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관상기도가 모던에서 포스트모던한 시대 흐름의 산물이라는 식의 해명은 저를 더 아리송하게 합니다. 중심해체라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음모는 우리의 거룩한 중심마저 해체해 버리려는 영적 도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좋은데 예수는 부담스러운 시대가 아닙니까?
그러나 관상기도에 그런 음모가 없다손 치더라도, 기도훈련의 한 프로그램으로 한 시대를 풍미하다가 언젠가 시들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기도훈련이라는 말도 작위적 냄새가 배어 있는 듯 합니다. 기도는 훈련없이도 누구나 가능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