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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권 보편적 개별성에 대한 단상
2008.02.26 12:34
"보편적 개별성"이라는 개념을 들었습니다.
'사도 바울'이라는 책을 쓴 프랑스의 철학자 바디우가 정리한 개념입니다.
그는 사도바울이 차별없는 평등을 진리의 핵심으로 삼았다고 하였습니다.
성별이든 신분이든 진리에 참여하고 진리를 공유하는 데는 장애가 되지 않는 다는 것이지요
할례를 받든지 받지 않든지, 유대인도 헬라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고 남자도 여자도 없는,
그리하여 유대의 울타리를 넘어 모든 이들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에 거할 수 있다는 전제입니다.
이러한 진리가 구체화 하면서 가는 곳마다 교회가 세워졌고 이 교회를 통해 세포적인 생명활동이 일어났으며
이러한 교회가 교회로서 존재하려면, 곧 진리의 실천이 진리를 배반하지 않고 올곧게 존재하려면
"보편적 개별성" 차원을 유지하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진리의 보편성은 개별성과 특수성을 뛰어 넘어야 한다.
곧 차이와 차별을 극복하여야 한다.
그 보편성이 차이의 억압이나 부정이어서는 안된다
차이가 보편을 부정하지도 않고 차별을 용인하지도 않는 차원이 보편적 개별성이다.
진리을 깨닫는 주체로서 개인의 개별성이 훼손되지 않으면서 그 개인들이 모든 차이를 넘어
보편적 진리의 지평에 나란히 서는것이 보편적 개별성이다.
나를 돌아보고 주변을 살펴보면 어찌도 편협하게 살고 있는지를 알게됩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그러더군요,
"눈을 치켜뜨고 한 마디 하면 교인들이 무지 무섭게 여길 것 같다구요"
평소에 만나면서 인상이 강하고, 말하는 표현방식이 강하고 분석적이고 냉정스럽게 보인 모양입니다.
사실 제가 논리도 부실하고, 괜히 큰 소리하지만 제대로 아는 것도 없고,
이렇다 저렇다 하면서 분석한다지만 그게 다 저에게 하는 말인 것을 제가 잘압니다.
내가 받고 싶어하는 귀중한 대접을 상대에게 먼저 하고
내눈의 들보를 보면서 상대의 눈에 있는 티를 인식하고
내 생각과 달라도 그가 생각하는 것이 충분이 일리있다고 용인하고
내 삶의 스타일과 달라도 그 나름대로는 충실한 방식인것을 인정하여야 겠다는 단상을 품어봅니다.
요즘 주변에선 작은 교권을 둘러싸고 여러 말들이 오고 갑니다.
누가 옳고 그르고, 나의 생각과 같으니 한 편이고 다르니 상대편이고,
상대의 약점을 헤집고 나는 대접받아야 하겠고 등등등
차이가 보편을 부정하지 않고 차별을 용인하지 않는 멋진 상생관계를 보고 싶습니다.
* 관리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8-07-22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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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모처럼 좋은 글 올려 주셔서, 그 격에 맞는 답글을 올려 볼까합니다.
Volf는 그의 저서 “Exclusion and Embrace(배제와 포용)”에서,
“우리 모두”라는 말의 존재성을 없애 버리고, “우리와 저들”이라는 양극성(대립)으로 치닫는 현실에 직면하여, 그 '불화'라는 공포스런 삶 속에서의 “받아들임”이라는 길 찾기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 '받아들임'의 방편으로 그는 '회개와 용서'와 '기억의 치유' 등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그는 더 나아가 매우 혁신적인 방안을 제시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이젠 아무 방법이 없는 독점적인 양극성(대립)에서 벗어나는 길은, 상대를 파멸 시키는 방법도 있지만, 내가 스스로 파멸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그런 해법에 비추어 봤을 때 낯선 이방인들을 위해 자기 안에 공존의 공간을 만드신 그리스도의 '자초한 수난'이 대표적인 갈등해소의 방법이다. 이는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다. 포용은 언약의 내면이고, 언약은 포용의 외면이다"라고 말입니다.
우리 그 분처럼 남 탓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스스로 파멸해 버리는 것이 어떨까요?
물론, 매우 어려운 일이지요.
그러나, 박목사님의 '생각하는 양심 갖기'도 아주 훌륭한 해법 중 하나라 여깁니다.
보편적 개별성은 고하간에, 상식도 없는,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사람들 틈에 살다보니 말입니다.
깊고, 시의 적절한 글 감사합니다.
그리고, 묻고 싶습니다.
이 시점에서 내가 이 왜곡된 공동체를 회복시키는데 일조 할,
스스로 파멸하는 구체적인 방법이란 그 무엇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