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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몰하는 저녁

2008.05.09 19:02

영목 조회 수:2183 추천:43

이혜미 침몰하는 저녁/이혜미


  
내가 밑줄 친 황혼 사이로 네가 오는구나. 어느새 귀밑머리 백발이 성성한 네가 오는구나 그 긴 머리채를 은가루 바람처럼 휘날리며 오는구나. 네 팔에 안긴 너는 갓 태어난 핏덩이, 붉게 물든, 모든 저물어가는 것들의 누이가 되어 오는구나 네가 너에게 젖을 물리고 세계의 발등이 어둠으로 젖어든다. 너의 모유는 계집아이의 초경혈마냥 붉고 비리고 아픈 맛, 나는 황홀하게 너의 젖꼭지를 덧그리고 있었다

  
내가 붉게 표시해 둔 일몰이 세상으로 무너져 내리던 날 배냇시절의 너를 안고 네가 나에게 오는구나 네가 발 디디던 곳마다 이름을 버린 잡풀 잡꽃들이 집요하게도 피어나던 거라. 옅은 바람에도 불쑥 소름이 돋아 위태로운 것들의 실뿌리를 가만 더듬어 보면 문득, 그 뿌리들 내 속으로 흘러 들어와 붉게 흐르고 나 역시도 이름 버린 것들의 누이가 되고 말 것 같은데

  
나에게 진한 붉음으로 표식을 남긴 저물녘을 건너 비로소 네가 오는구나. 세계는 자꾸 움츠러들며 둥글어지려 하고 잘려진 나의 탯줄에 다시 뿌리가 내리면, 너는 저물며 빛을 키우고 빛이 저물며 어둠을 잉태하고 어둠이 다시 너를 산란한다. 그 속에서 나도 세상과 함께 움츠러들며 둥글어지던 것인데, 처음으로 돌아가려던 것인데, 내 속의 실뿌리들이 흔들리며 누이야 누이야, 내가 버리고 온 나의 이름을 목놓아 부르던 거라. 물관으로 흐르는 맑은 피는 양수가 되고… 체관으로 흐르는 진득한 피가 세계에 지천으로 꽃을 피워내는데… 아아 네가 오더구나, 모든 것들의 처음과 끝인 네가 오더구나

 

 

1987년 경기도 안양 출생
2006
년 중앙신인문학상 시 부문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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