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 외로움과 소외의 시)이제는 다만 때 아닌, 때 늦은 사랑에 관하여
2008.05.03 06:13
이제는 다만 때 아닌, 때 늦은 사랑에 관하여 / 이성복
이제는 송곳보다 송곳에 찔린 허벅지에 대하여
말라붙은 눈꺼풀과 문드러진 입술에 대하여
정든 유곽의 맑은 아침과 식은 아랫목에 대하여
이제는, 정든 유곽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한 발자국을
위하여 질퍽이는 눈길과 하품하는 굴뚝과 구정물에 흐르는
종소리를 위하여 더렵혀진 쳐녀들과 비명에 간 사내들의
썩어가는 팔과 꾸들꾸들한 눈동자를 위하여 이제는
누이들과 처제들의 꿈꾸는, 물 같은 목소리에 취하여
버려진 조개 껍질의 보라색 무늬와 길바닥에 쓰러진
까치의 암록색 꼬리에 취하여 노래하리라 정든 유곽
어느 잔칫집 어느 상갓집에도 찾아다니며 피어나고
떨어지는 것들의 낮은 신음 소리에 맞추어 녹은 것
구부러진 것 얼어붙은 것 갈라터진 것 나가떨어진 것들
옆에서 한 번, 한 번만 보고 싶음과 만지고 싶음과 살 부
비고 싶음에
관하여 한 번, 한 번만 부여안고 휘이 돌고 싶음에 관하여
이제는 다만 때 아닌, 때 늦은 사랑에 관하여
이성복
1952년 경북 상주 출생. 서울대 불문과 및 동대학원 졸업했다. 『문학과지성』을 통해 등단(1977년). 시집으로,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남해 금산』 『그 여름의 끝』 『호랑가시나무의 기억』 『아, 입이 없는 것들』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 산문집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나는 왜 비에 젖은 석류 꽃잎에 대해 아무 말도 못 했는가』 등과 시선집 『정든 유곽에서』, 잠언집 『그대에게 가는 먼 길』, 산문집 『꽃핀 나무의 괴로움』, 문학앨범 『사랑으로 가는 먼 길』 등이 있다. 현재 계명대 불문과 교수로 재직중인 저자는, '김수영문학상' '소월시문학상'을 수상하였다.
그는 개인적인 삶을 통해 서 얻은 고통스런 진단을 우리의 보편적인 삶의 양상으로 확대하면서 우리를 끈질기게 그리고 원초적으로 괴롭히는 병든 상태와 치열한 싸움을 벌여왔다. 많은 미발표시들을 포함한 그의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는 이 같은 우리의 아픔으로부터 깨어나게 하는 진실의 추구에서 얻어진 귀중한 소산이다.
[시인의 산문]
대체로 우리는 아픔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 몸 어딘가가 썩어 들어가는데도 아프지 않다면, 이보다 더 난처한 일이 있을까? 문제는 우리의 아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들에 있다. 오히려 아픔은 <살아 있음>의 징조이며, <살아야겠음>의 경보라고나 할 것이다.
정신의 아픔은 육체의 아픔에 비해 잘 감지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정신은 병들어 있으면서 알아채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정신의 아픔, 그것만 해도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자신이 병들어 있음을 아는 것은, 치유가 아니라 할지라도 치유의 첫 단계일 수는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픔만을 강조하게 되면, 그 아픔을 가져오게 한 것들을 은폐하거나 신비화하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자신을 속이지 않고 얻을 수 있는 하나의 진실은 우리가 지금 <아프다>는 사실이다. 그 진실 옆에 있다는 확실한 느낌과, 그로부터 언제 떨어져나갈지 모른다는 불안한 느낌의 뒤범벅이 우리의 행복감일 것이다. 망각은 삶의 죽음이고, 아픔은 죽음의 삶이다. 황동규
댓글 0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34 | 시 읽기>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2] | 조프리 | 2007.12.21 | 2865 |
33 | 시간의 동공 | 영목 | 2008.05.03 | 1175 |
32 | 산마을엔 보름달이 뜨잖니 | 영목 | 2008.05.03 | 948 |
31 | 그리운 옛집 | 영목 | 2008.05.03 | 704 |
30 | 어둠의 단애 | 영목 | 2008.05.03 | 943 |
29 | 등 | 영목 | 2008.05.03 | 741 |
28 | 6월 | 영목 | 2008.05.03 | 635 |
27 | 나뭇잎의 말 | 영목 | 2008.05.03 | 615 |
26 | 서쪽이 없다 | 영목 | 2008.05.03 | 698 |
25 | 가방, 혹은 여자 | 영목 | 2008.05.03 | 1331 |
24 | '톡 톡' | 영목 | 2008.05.03 | 630 |
23 | 수선화에게 | 영목 | 2008.05.03 | 870 |
22 | 플라타너스 | 영목 | 2008.05.03 | 694 |
» | (이하 외로움과 소외의 시)이제는 다만 때 아닌, 때 늦은 사랑에 관하여 | 영목 | 2008.05.03 | 1120 |
20 | 십자가 | 강요셉 | 2008.05.04 | 598 |
19 | 슬픔 많은 이 세상도 | 영목 | 2008.05.09 | 2144 |
18 | 지하철에서 만난 여자 | 영목 | 2008.05.09 | 2593 |
17 | 침몰하는 저녁 | 영목 | 2008.05.09 | 2178 |
16 | 가을, 빗방울꽃 / 김혜경 | 영목 | 2008.05.09 | 2379 |
15 | 바람은 어디에서 생겨나는가 | 영목 | 2008.05.09 | 228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