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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토론 발표

2012.11.18 10:07

이경규 조회 수:1104 추천:22

우리 중랑감찰에서는 두달에 한번씩 모여 독서토론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 10월에 저희 교회에서 할 차례가 되어 부족하지만 제가 교재를 요약발표하게 되었습니다.

한 번 읽어보시고 생각해 보시기를 바라며 글을 올립니다.

조금은 길고 진부할 수도 있지만 끝까지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댓글은 더욱 환영입니다.

 

 

교회속의 세상 세상속의 교회(김두식 / 홍성사)

 

<저자소개>

저자 김두식 교수는 1967년 서울에서 태어나 고려대 법대를 졸업하고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군법무관과 서울지검 서부지청 검사를 지냈다.

특수교육을 공부하는 아내를 뒷바라지하겠다며 검사직을 사임함으로써 전형적인 법조인의 길에서 이탈하기 시작한 그는 이후 2년간을 딸 아이 양육, 식사 준비, 청소, 빨래, 비디오 관람 등 가사 업무에 종사했다.

평생을 전업주부로 살겠다던 야심 찬 출발과는 달리 ‘등처가’로 전락해가는 자신의 모습에 충격을 받아 진로를 수정했고, 코넬대 법과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한 후 한동대 법학부 교수로 형법, 형사소송법, 사회보장법 등을 가르쳤다.

또한 「복음과 상황」, 「당대비평」에 편집위원으로 참여했으며, 지금은 경북대 법대에서 형법, 형사소송법, 여성과 법률 등을 가르치고 있다.

2002년『칼을 쳐서 보습을 :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와 기독교 평화주의』를 출간하였고, 여러 지면에 장애인, 여성, 병역 거부자 등 소수자 문제를 다룬 따뜻한 글들을 발표해왔다.

『헌법의 풍경』으로 2004년 한국백상출판문화상(교양 부문 저술상)을 수상했다.

그 밖에 『21세기에는 바꿔야 할 거짓말』, 『불멸의 신성가족』, 『교회 속의 세상, 세상 속의 교회』, 『불편해도 괜찮아』등이 있다.

 

 

 

 

1장 교회속의 세상 /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오늘날 교회의 모습은 물신숭배, 목회자의 일신 독재, 세습에 의한 독재 권력 이양, 그에 따른 부정부패가 난무하다.

이런 교회의 모습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이기적이고 말과 행동이 다른 독선적인 모습으로 비춰진다.

이러한 자화상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생명력을 잃은 공동체’로 요약 될 수 있다.

이러한 교회 문화를 함께 아파하며 고민하는 자들과 함께 그것에 대한 대책을 논하여 보고 싶다.

 

2장 비전과 욕심 / 방향을 거꾸로 잡은 교회

 

더 높이 올라가야 더 많이 베풀 수 있고, 더 많이 가져야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다는 식의 생각은 하나님 자신의 본질로부터 흘러나오는 ‘영광’에 대한 반대 개념이다.

이것이 세속적인 세계관이 교회 안에 들어 온 결과이다.

또한 오늘날 한국 교회 안에 무속신앙에 바탕을 둔 목사만 ‘주의 종’이라는 논리는 한국 교회를 더욱 병들게 만들었다.

한국 교회는 이러한 세속화된 생각 속에 많은 젊은이들에게 극단적 선택을 하게 만들었다.

모든 직업에 소명을 가지고 임하기보다 무엇이 안 되고 실패하면 ‘주의 종’이 되는 길을 선택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목회자 포화 상태를 만들어 놓았다.

목회자는 스스로를 높이고 자신 만이 선택받은 사람으로 생각하게 만들어, 잘못된 권위의식과 교권주의를 낳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비전을 자신의 야망을 이루는 것과 맞 바꾸어놓게 된 것이다.

 

3장 진보와 보수 / 세상과 똑같은 좌우 대립

 

초대 교회 공동체는 ‘세상과 구별된 공동체’ ‘세상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교회’ 그 자체로 언제나 정치적일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끝없는 상향성 추구’라는 세상 논리에 젖어 ‘교회 속의 세상’이 되어 버렸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이 만들고자 했던 것은 복지 국가가 아니라 ‘교회’였다.

그러나 한국교회에는 국가 앞에 성경적 소리를 온전히 내지 못 한다는 입장에서 보수와 진보의 차이가 없다.

진짜 보수는 국가 권력의 절대화에 반대 할 수 있고 자기 자신을 남에게 내어 줄 수 있는 자다.

그리고 진짜 진보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예수님의 관심을 이어받아 그 가르침을 실천하는 자다.

또한 보수든 진보든 교회는 세상 논리에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

교회는 초월성과 영원성에 입장에서 세상의 시스템 자체를 비판하고, 정의와 평화 그리고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 세상을 향한 새로운 대안이어야 한다.

따라서 보수든 진보든 교회의 회복은 성경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4장 콘스탄티누스 / 세상을 교회 속으로 끌고 들어온 사람

 

콘스탄티누스의 칼에 의해 기독교는 로마제국을 점령했지만 이것은 기독교가 콘스탄티누스의 칼을 받아들인 결과를 낳았다.

이것이 곧 기독교가 세속에 길로 접어들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현실 권력의 결탁을 통해 기독교를 세속화 시켰고 ‘세상속의 교회’가 아닌 ‘교회 속에 세상’이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5장 16세기 / 세상이 교회를 지배한 시절

 

종교 개혁에 앞장섰던 루터나 칼뱅도 철저하게 세속 권력에 의존하는 것을 볼 때 가톨릭의 기존 입장과 다르지 않다.

교회 속으로 세속의 논리가 들어와 사회적 지위가 그대로 교회의 지위로 인정되고 나면, 군주에게 기독교 윤리나 도덕을 요구하기란 불가능해 진다.

프로테스탄트들이 종교의 자유를 획득하는 것은 아마도 올바른 목표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수단으로 폭력을 사용한 것은 정당한 것이 아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찾아 볼 수 없는 태도인 것이다.

16세기의 시대상황을 한 마디로 말하면 ‘종교적 불관용’이다.

다른 종교, 다른 교파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공격성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의 어두운 뿌리인 것이다.

예수님의 가르침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는 것이다.

 

6장 중세의 이단 / 먼저 실험을 시작한 사람들

 

현대의 많은 신학자들이 다시 평가하는 것은 중세 가톨릭교회가 이단으로 지목한 상당수가 기독교 소수 종파들인 카타르타, 발도파, 롤라드파 등이었다.

이들은 종교개혁자들 보다 앞서 종교개혁을 시도한 사람들이었다는 점에서 칼뱅이나 후스, 그리고 루터와 재세례파와 입장을 같이 한다.

이들은 평신도의 제사장적 지위를 주장하고 성경의 무호성과 권위를 주장하고 교황의 권위를 공격하였다는 이유로 이단으로 몰려 화형을 당하거나 소멸 당하였다.

이렇게 볼 때 교회개혁을 위한 시도는 이단으로 단죄될 위험이 있다.

프로테스탄트는 끝임 없는 갱신과 개혁과 실험의 정신 속에 누구를 정죄하기 이전에 스스로 안에서 이단적 요소를 제거하여 성경이 제시한 삶으로 나아가야 한다.

 

7장 질문 바꾸기 / 고통 받는 사람들의 친구가 되는 교회

 

우리 주위에는 고통당하는 이웃이 많다.

그러나 교회는 쉽게 그들을 외면하거나 정죄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랑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사랑을 베푸는 주체에 주목하셨다.

누구를 내 이웃으로 삼아야 하느냐가 아니라 내가 어떤 이웃이 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을 따라가는 교회는 ‘우리의 이웃이 누구인가?’ 라는 질문 전에 ‘우리는 우리 이웃에게 어떤 친구인가?’물어야 한다.

 

8장 샬롬의 공동체 / 교회의 교회됨을 위하여

 

교회의 모습에 가까운, 교회보다 더 교회적인 모임이 있다 하더라도 시민단체가 교회를 대체할 수 없다.

교회다운 교회는 그 존재만으로 정치적이며, 충분히 세상을 바꿀 수 있고 초대교회는 그러한 교회의 모습을 로마라는 세상 가운데 보여 주었다.

그것은 교회 안에서 먼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샬롬의 공동체인 하나님 나라가 실현 되면서부터이다.

 

9장 나가는 글 / 실험하는 교회

 

한국 교회의 개혁은 피할 수 없는 과제이다.

실험의 중심에는 예수님이 계시고 예수님은 잘못된 구조를 진리로 깨트리셨다.

이러한 실험은 말씀을 나누는 공동체, 돌봄의 공동체이다.

교회는 서로 다른 은사를 가진 자들이 함께 성장하는 유기적 공동체이다.

영화관식 예배를 드리고 목사 한 사람이 주도하는 예배에서 벗어나 공회당 식으로 예배를 드리며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는 발상의 전환하여 많은 사람들이 함께 은혜를 나누는 실험을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어려운 사람들이나 필요에 굶주린 사람들을 함께 찾아내어 교회 공동의 책임으로 돌봄이 일어난다면 교회는 건강해 질 것이다.

실험을 가감하게 시도하는 교회는 이 시대를 이끌어 갈 교회가 될 것이다.

 

 

서평 및 결론

 

저자 김두식은 ‘교회속의 세상 세상속의 교회’에서 한 사람의 기독교인으로 가지는 고민과 아픔을 쏟아 놓았다.

그 가 본 교회는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교회의 본질의 모습과는 멀어진 ‘생명력을 잃은 공동체’였다.

이러한 교회에 그가 제시한 해답은 교회는 자신의 모습을 성경에 비추어 개혁 되어져야 하고 교회와 세상 속에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살아있는 공동체로서 교회가 갖는 배타성을 바꾸어 과감하게 ‘사랑과 돌봄’의 실험을 교회에서부터 시작하고 그동안에 목회자 중심의 목회가 가지고 온 잘 못된 권위주의에서 목회자들이 자신의 왕좌를 내려놓는 것으로부터 개혁의 실험은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에서 나는 그동안에 가져 왔던 생각의 폭을 넓힐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나는 목회자와 교회 그리고 교회의 여러 조직과 직분과 교회의 역할에 대해 그동안에 가졌던 생각을 정리하고 일부는 수정하고 보안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참으로 고맙고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몇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첫째, 지나치리만큼 독설을 아끼지 않는 저자의 주장에 때로는 공감하면서도 일부 논리적 비약이 있었음을 보게 되었다.

예를 들어 오늘날 교회가 극장식 예배를 드리며 성도 안에 교감 없이 성직자들의 교권강화와 신본주의를 부추기고 더 나아가 중세의 교황이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로 대체 대었다는 주장에 일부는 공감하면서도 또 한편 오늘날 교회의 목회자들안에 성경 말씀에 비추어 자신을 개혁하며 복음 말씀 앞에서 진실 된 도구로 사용되어지는 수많은 목회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들의 교회는 교회 속에 세상을 몰아내기 위해서 영적 전투를 벌이고 있다.

그들의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는 살아 있고 생동감 있다.

수많은 성도들이 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의 빛 가운데 살기를 소망하고 있다.

문제는 극장식 예배나 공회당식 예배가 교회의 본질을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능력의 사로잡히고 성령의 능력에 자신을 온전히 깨트린 하나님의 사람들이 일어나는 것이고 이것은 본질적으로 우리에게 속한 영역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오늘도 교회 가운데 이러한 자를 일으키고 계심을 직감해야 한다.

따라서 성경의 본질과는 상관없이 교권중심과 자신의 욕망을 종교적 위치로 채우려는 잘 못된 목회자들의 사악한 죄악들이 교회를 존재를 본질에서 멀어지게 한 것은 철저히 비판되어지고 회개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극장식 예배’나 ‘공회당식 예배’가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기준이 될 수 없으며 모든 목회자들이 우리의 형제로 돌아온다고 해서 결코 그 자리를 또 다른 조직이 대신하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다.

다만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힌 겸손한 리더들이 일어나는 것을 위해 함께 기도해야 하고 나 자신 또한 늘 겸허한 마음으로 성령에 사로잡힌 하나님의 도구가 되기를 소망해야겠다고 생각한다.

 

둘째, 저자의 오늘날 교회를 바라보는 시각에서 ‘교회속의 세상’은 잘 그려졌는데 ‘세상속의 교회’로서의 대안이 부족했다.

교회는 늘 세상 속에 존재해 왔다.

예수님 당시에도 그랬고 오늘날에도 그렇다 세상 속에 교회는 교회의 본질로서 빛과 소금이다.

그래서 우리는 늘 ‘삶의 예배자’, ‘영적 예배자’로 24시간을 아니 더 나아가 7일을 살아야 한다.

여기에 ‘교회 속 세상’에 마음 아프고 답답하다.

그러나 그에 대한 대안으로서 ‘세상 속 교회’가 되기 위해서 어떻게? 그리고 그러한 모델로 살아갔던 인물과 교회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제시 했더라면 답답한 마음에 크나큰 위로와 소망이 되었으리라 생각되어진다.

실험을 시작한 사람들과 교회가 있다고 말했지만 그 실험이 목회자의 왕권을 내려놓고 공동체적 돌봄을 가지라는 제시는 너무나 식상하다.

이론과 현실은 늘 차이가 있다.

우리가 가지는 고민은 이론을 현실 속에서 이루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럴 때 그 이론은 단지 이론이 아닌 살아 있는 진리가 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이 책 ‘교회속의 세상, 세상 속의 교회’를 통해 독자는 교회 속에서 세상의 논리와 사고방식이 교회에서도 적용되는 것을 함께 공감하며 아파하며 예수님이 가르치신 복음의 본질로서의 교회의 모습이 회복되어지길 소망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 안에서 개혁과 갱신이 일어나야 한다.

지금 이대로의 모습이 정상이 아니고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삶도 올바른 모습이 아니라는 것은 요즘을 사는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한다.

문제가 인식 되었다면 해답도 제시 되어야 한다.

그 해답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처럼 오늘도 역사하시고 일하시는 성령님이시다.

그 분은 교회 갱신에 선두에서서 오늘도 쉬지 않고 일하시는 분이시고 그분은 그분의 방식대로 지금도 일하고 계신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를 바라볼 때 절망을 넘어서 소망을 갖게 되는 것이다.

 

저자의 성경 해석이나 주장 중에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 도 간혹 눈에 띄였다.

하나, 에베소서 6장 12절에 대한 성경해석에서 저자는 정사와 권세를 영적인 존재가 아닌 실제 세계의 정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일반적인 해석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둘, 국기에 대한 경례에 대한 저자의 입장(반대)에 대해서는 조금 지나친 감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십계명 중 제2계명을 들어 국기에 대한 경례도 우상숭배에 준하는 행위가 아닌가 라는 입장을 표명하고 있는데, 이런 저자의 주장을 보면서 저자는 부모님께 세배도 드리지 않나 하는 궁금증이 생기기도 했다.

셋, 양심적 병역 거부에 대한 저자의 입장(지지)에 대해서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되었는데, 뒤로 가면서 저자가 왜 양심적 병역 거부에 대해 지지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넷, 또한 저자는 이 책의 절반 가까이를 교회가 역사 속에서 폭력을 통해 자신들의 뜻을 관철하고자 했던 사건들을 다루면서 그것이 결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기초한 것이 아니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발도파나 롤라드파의 평화주의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그리고 저자의 이러한 설명은 결코 가볍게 거부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목회자인 저로서도 잘 알지 못하고 있었던 사실들을 저자를 통해 알게 되기도 하였다.

저자의 인용글을 통해 그 유명한 프란시스 쉐퍼 부부가 실제로 어떤 가치관의 소유자였는가 하는 것도 알게 되었다.

또 헨리 나누웬이 동성애자였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는 바였지만 그가 그 사실에 대해 구체적으로 어떤 고민을 했고 어떤 입장을 표명했는가에 대해서는 이 책을 통해 제대로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저자가 기독교 역사를 전체적으로 훑어가면서 소개해 준 내용들은 신학교에서 기독교 역사를 공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은 생소하거나 기억 속에서 잊혀져 있었던 것들이었기에 참으로 귀한 공부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무엇보다 교회가 교회되기 위해 어떠한 노력들이 필요한가에 대한 저자의 고민에는 상당 부분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자가 비판하고 있는 영화관 교회의 문제점에 대해서 전적으로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고, 특별히 교회가 교회 내의 가난한 이들을 위해 어떠한 노력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저자가 말하고 있는 내용이 제가 평소에 가지고 있었던 생각과 다르지 않음을 확인하고 반가운 느낌을 받기도 하였다.

보험회사가 교회의 일을 빼앗아 갔다는 주장이나, 교회가 가족과 같은 공동체를 이루어 경제적인 부조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에도 전적인 지지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