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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12 12:02
10년10월17일생활즉예배
예수 믿고 교회에 다니면 흔히 듣는 용어는 예배이다.
누구든지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면 귀에 들리는 용어들이 많이 있다. 하나님을 찾는 일과 예수님을 알아가는 일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용어들이 믿음과 소망이나 사랑일 것이다. 그밖에도 많은 용어들을 우리는 들먹인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매일 우리 입에서 나오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 일상생활에서 함께 하시는 것을 경험한다. 이러한 것은 바로 성령에 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예배라는 단어는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고백하는 자들에게 있어서 생활이다.
예배는 엎드린다. 존경을 돌리다. 봉사한다. 섬기다. 교제의 의미도 있지만 문자적인 의미로 가치를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돌리다. 란 의미도 있다고 한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있어서 예배는 경건과 의식을 포함하는 존경하는 삶 전체를 포함한다.
예배에는 여러 가지 의식을 동반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다. 형식과 행위에 의한 예배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심을 드러내신다. 호6:6에서“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하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서로 화답하는 관계 즉 교제를 원하시는 것을 보여주신다. 잠15:8에서도“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고 하심을 보아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막힘없는 관계를 바라신다.
이러한 일에서 사울은 사무엘선지자로 호된 질책을 받는다. 삼상15:22에서“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 하시므로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고 있다.
격식을 갖추고 예배에 맞는 의식도 중요할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시51:17에서“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고 하셨다.
예배를 예수믿음과 구분하는 이중적 구조에 익숙한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결코 쉬운 이야기가 아니다. 예배 따로, 생활 따로 교육되어지고 전통과 유전되어진 교회생활로 인하여 예배는 퇴색되어지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 예배와 생활을 분리할 수 없다. 우리의 삶은 순간순간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비추어 보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믿는 자의 삶이 바로 생활이고 예배이다. 성도의 예배가 바로 일상의 삶이다.
언제부터인가 “주일을 성수해야 한다.”라는 교육으로 인하여 주일만 그것도 “11시 예배만 잘 드리면 된다.”라는 외침은 그리스도인들을 이중적으로 만들어 가게 하였다고 본다. 그래서 나온 말이 일요일은 주일, 평일은 죄요일이라 하였던가.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구원에 감격에 지낸다면 날마다 예배요 함께 모여 교제에 기대하며 기다릴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구원에 감격된 삶을 사는 것이 .........
성령에 의하여 사로잡힌 삶이 바로 이렇지 않을까?
그것은 바로 말씀에 사로잡힌 삶이다. 말씀에 예수 생명이 있고 길이 있고 진리이기에 그래서 요8:31에서 말씀하신대로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이 중요하다.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앞에서 산다. 내가 알들지 모르든지 깨닫든지 못깨닫든지 주앞에 살고 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난 자의 삶이요 내가 주도권을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권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주님의 뜻하신대로 이끌어 가신다.
예수님을 이것을 요4:24에서“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고 하셨다. 하나님이 영이시고 말씀이시기에 우리에게 만유를 통해서 드러내신다. 우리가 진실된 마음과 영에 속한 자로 살고 있다고 하신다. 이것이 바로 생활 즉 예배를 말씀하신다.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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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재천
2010.10.12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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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석
2010.10.13 15:43
구목사님
뵌 적없지만 주안에서 예수 보혈로 형제임을 확인합니다.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유용했습니다.
주님 사랑으로 평안을 전합니다.
박원석드림 -
김성찬
2010.10.14 09:31
한 때, 'Living the Word - 말씀의 생활화'라는 용어가 유행어였던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여전한가? 이젠 그런 용어도 망각한 상태이니) 우리의 신앙생활이 말씀 따로 생활(삶) 따로였기 때문이지요. 물론 지금도 우리는 여전하지만 말입니다.
박목사님의 고뇌에 찬 성찰, '생활 즉 예배'라는 용어도 'Living the Word - 말씀의 생활화'라는 말과 그 뜻을 같이 합니다.
앞으로 주일예배 한 번으로 족한 90%의 신자들과 목회를 해야할 우리들로서는 '생활 즉 예배'라는 강조가 보다 더 절실합니다.
말씀과 삶, 예배와 생활 사이에 그 괴리가 심각하다 했어도, 적어도 이전 세대에는 신자들이 적어도 일주일에 세 번 정도는 예배를 드려왔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리고 내일은. 예배가 자취를 잃을 듯 합니다.
형식이 내용을 결정할 수도 있듯, 정기적인 예배가 신앙을 증진시킬 수도 있는데. 예배가 사라지고 있으니---. 그 형식마저 붕괴할 위기에 처해 있으니.
두, 세 사람일찌라도, 그 장소가 어디든지 - 예수만 모신 곳이면 그곳이 예배 처소요, 생활 즉 예배, 예배의 생활화를 이룰 수 있다는 '참예배'의 정의를 우리가 모르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내용이 중요하다해도, 형식없는 내용이 가능할 것인지?
예배당에 함께 모여 예배하는 시간이 급격히 줄어드는 오늘.
박목사님의 '생활 즉 예배'가 가능할 건지, 궁금합니다 -
박원석
2010.10.16 15:53
우리 생활속에 파고 드는 다양한 요소들이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을 복잡하게 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예배를 생각하면서
공동체와 개인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차라리 공동체라면 짦은 시간이지만 준비하고 정리하여 마음을 한 곳에 할 수 있겠지만 개인적인 예배는 생활이 제외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것은 각 개인 그리스도인이 예수님과 어떤 관계아래 있는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각 개인의 그리스도인들이 주님과 깊이 말씀과 기도가운데 교제하는 삶이 회복되면 그 영향은 공동체 예배로 흘러가리라 생각됩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제자훈련이나 각 교회의 성경공부반들이 무수하게 많은 한국교회에서 말씀이 흥왕한다면 그 말씀의 능력아래 잡혀있는 한 그리스도인이 있는 곳에서 예배는 드려지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너무나 이중적인 것이 익숙되어졌습니다.
그리고 이원론적인 것에 젖어있어서 쉽게 예배와 생활이 다르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말씀에 젖어 있는 영혼이라면 그 말씀이 그를 생활가운데서
주님과 함께 하는 가운데 주앞에 사는 삶 즉 예배는 저절로 되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하나님과 함께 하는 그 시간이 정해져 버린다고 하면 하나님을 제한하는 사람의 방법입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물론 하나님께서 사랑하게 하시는 은혜를 주시면 날마다 모이기를 힘쓰는 역사가 일어나고 행2장의 사건이 우리에게도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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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예배 드릴 때 거의 습관적으로 인용하는 성경 말씀이 있다. 그것은 요한복음 4장 24절에 나오는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는 표현이다. 일반적으로, 이 본문을 인용함으로써 나타내고자 하는 의미는, 예배 드리는 자가 갖춰야 할 경건하고 겸손하며 진실된 마음 자세, 한마디로 예배 드리는 사람이 예배에 임하는 내적인 마음 상태 정도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습관적이며 형식적인 마음 자세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 구절에 대한 이러한 ‘영적’ 이해는 비단 현재 우리 교계뿐만 아니라, 이미 오래 전부터 서구 교회 안에서도 만연해 있다. 물론 이러한 정성어린 자세는 예배에 임하는 사람이면 당연히 갖춰야 할 것임에는 두말 할 나위 없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마음 자세를 나타내기 위해 인용하는 요한복음 4장 24절 말씀이 본래 그러한 뜻이냐 하는 것이다. 만일 요한의 의도가 그게 아니었다면, 기독교 역사 속에서 이 표현만큼 오래도록 본래의 의미에서 왜곡되게 사용된 성경 말씀이 없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Ⅰ. 내적인 혹은 영적인 하나님 섬김(?)
언급했듯이 지금까지 대체로 요한복음 4장 24절에 나타난 표현을 인간의 내적인 마음 상태 혹은 인간 마음의 영적 상태와 관련시켜 해석해왔다(spiritualistisches Verst ndnis). 예배 드리는 자가 갖춰야 할 경건한 마음 자세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보는 해석은 헬라적인 사고 방식에 젖은 서구인들의 이해와 관련되었다고 볼 수 있다. 헬라적인 사고방식에 따르면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은 서로 대립되어 있다. 특별히 고대 헬라 신비주의와 스토아 사상 혹은 영지주의의 이해에 따르면, 이른바 유치한 원시종교의 외적이며 육적인 예배 이해와 대립된 것으로, 영적이고 신비적인 예배를 참된 예배로 간주하였다.1온전한 예배란, 제물을 바치는 제의적인 예배가 아니라 이웃에 대한 자비와 선행과 정의를 실천하는 진실된 마음과 관련된 것이라는 점이 이미 구약성경 여러 구절 가운데 언급되어 있다. 예컨대, 이사야서 1장 11~17절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온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 (개역개정판).2
또한 헬라 유대 종교철학가로 통하는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 von Alexandria, 대략 BC 20~AD 50년경)에게서도 그런 표상을 찾을 수 있다: “유일무이한 제물로서 진리를 바치는 마음의 섬김은 진실되다”(det. 21), 혹은 “하나님 보시기에 흡족한 마음의 경건성을 떠나 진실되며 신성한 제물이 있단 말인가?”(Vita Mos. II, 108). 요한복음 4장 24절에서 언급하는 예배가 바로 이와 같은 구약/유대적인 물질주의적인 예배 표상에 대립된 영적인 예배를 뜻한다고 해석하는 가운데, 이와 같은 영적 예배(곧 우리의 인간적 정성과 종교적 노력을 기울이는 예배)가 참된 예배라고 오랫동안 이해해왔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계몽주의 이래로 더욱 강하게 자리잡았다. 그리하여 이 말씀은 긴 세월 동안 내적으로 혹은 영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고,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와 같은 이해가 만연하게 된 것이다.
우리의 한글 ‘개역성경’도 그와 같은 영향을 받아 요한복음 4장 24절에서 “신령과 진정으로”라고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진정’이란 단어는 그리스어 ‘알레테이아’(aletheia)를 번역한 것인데, 인간 마음의 내적 상태를 표현한다. 또한 ‘으로’라는 표현은 그리스어 전치사 ‘엔’(en)을 우리말로 바꾼 것인데, 수단적 의미로 해석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예배하는 자가 ‘신령하고 진정한 마음을 가지고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말로 이해된다. 즉 ‘개역성경’에 나타나는 번역은 예배를 완전히 내적인 의미로 이해한 번역임을 알 수 있다.3 ‘공동번역’(1997/1999년)에는 그리스어 원어 ‘프뉴마’와 ‘알레테이아’가 전치사 ‘엔’과 합하여 완전히 부사적으로 파악하는 가운데, “예배하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참되게 하느님께 예배 드려야 한다”로 번역했다. 이로써 소위 ‘영적 의미’를 더욱 강조하여 번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요한복음 4장 20절을 예배 드리는 자가 갖춰야 할
인간적인 경건한 마음의 자세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보는 해석은 헬라적인 사고 방식과 관련이 있다.
한편, 요한복음 4장 24절을 내적 혹은 영적인 의미의 예배로 이해하는 것은 이미 서구 학자들의 주석 가운데서도 찾을 수 있다. 한 좋은 예가 고데의 요한복음 주석에 나타난다. 고데는 요한복음 4장 23~24절과 관련하여 ‘영성’(Geistigkeit)과 ‘진정’(Wahrheit)을 미래에 있을 예배의 두 가지 특징으로 규정하면서, 이 두 단어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여기서 영은 인간적인 영혼(=정신)의 최고의 활동(die hochste Lebenstatigkeit der menschlichen Seele)을 가리킨다. 이로써 영혼은 신적인 세계와 관계를 맺게 된다. 곧 경건의 장소요, 영혼이 하나님과 만나는 장소며, 진실된 예배가 이루어지는 성소이다. … 이와 같은 첫 번째 특징은 새로운 예배의 내적인 세력을 묘사한다. - 두 번째 특징인 진정은 첫 번째를 보충한다. 영혼의 내적 성소에서 거행되는 예배야말로 유일한 참된 예배이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하나님의 본질이라는 대상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 영혼 가운데 또한 진정 가운데라는 이 두 표현은 단지 양태(die Art und Weise)와 관련된 것이다.”4 또한 하이트뮐러(W. Heitmuller)는 이렇게 해석했다: “영 가운데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 혹은 민족과 제의의 경계를 넘어서 특정 지역과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그분을 경배하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순수히 내적이며 영적인, 따라서 모든 민족을 포함하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이다.”5 혹은 바우어(W. Bauer)는 다음과 같이 이해했다: “신성한 시간과 장소와 제의와 결부된 육(Sarx)의 영역에 속한 모든 멍에에 구속됨이 없이 ‘진실된’ 기도자(wahrhaftige Anbeter)는 순수히 내적이며 ‘영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할(geistige Gottesverehrung) 것이다.”6 그러나 우리의 인간적인 정성을 다해야 한다는 이 모든 영적 혹은 내적인 해석은 본래 요한이 의도했던 의미와는 차이가 있다.
Ⅱ. 요한의 사고에 따른 이해
요한은 이 구절을 어떻게 이해했는가를 파악하기 위해 먼저 문맥을 살필 필요가 있다. 이 구절은, 요한복음 4장 1~26절에 나타나는 예수님과 한 사마리아 여인이 수가성 우물가에서 나누는 대화 가운데 나오는 말이다. 이 대화가 평범한 대화가 아님을 요한은 처음부터 강조한다. 한 유대인 남성과 한 사마리아 여인 사이에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1. 요한복음 4장 24절의 문맥 이해
어느날 예수께서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는 동네에 이르렀다. 그곳에는 야곱의 우물이라고 옛날부터 유래한 한 우물이 있었는데, 행로에 지친 예수께서 그 우물가에 앉아 쉬고 있었다. 그런데 제6시(=정오)가 되자 한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길으러 그곳에 왔고, 마실 물을 청하는 예수님과 대화가 벌어지게 된다.
이 여인이 사마리아인이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들은 오늘날의 시리아 지방에 거주하던 사람들로서 이방인과의 혼혈족이고, 모세 오경만을 성경으로 인정했던 사람들이었다. 9절에 예수께서 유대인이라는 사실이 강조되고 있다. 유대인들은 바빌론 포로로부터 돌아온 이래로, 사마리아 사람들을 정통 유대인으로 간주하지 않았고, 예수님 당시에는 이들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예수께서 물을 청하자, 그 여인은 어찌 유대인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청하느냐고 묻는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두 사람 사이의 대화를 보다 높은 차원으로 올리는 가운데, 우선적으로 메시아 계시의 문제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10절에서, 예수님은 여자에게 말씀하시길, “내가 누군인줄 알았더면 (역으로) 네가 나에게 생수를 구하였으리라”고 말씀하신다. 그러자 여자는 물 길을 그릇도 없이 도대체 ‘생수’(=샘솟고, 흐르는 물)를 어디서 얻겠는가 하고 11절에서 상당히 이성적인 질문을 한다. 아마도 여인은 예수께서 다른 우물을 알고 있지 않나 생각한 모양이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러한 종류의 물이 아니라, 전적으로 다른 종류의 물임을 설명한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13~14절).
여기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선물’이요 ‘생수’라고 우회적으로 말함으로써, 여인에게 물을 청하는 자기 자신이 바로 메시아라는 점을 표현한다. 그러나 여인은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모든 갈증을 해소시키는 마법의 물과도 같은 물,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14절)을 달라고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여인이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러자 16절에서 예수님은 다른 각도로 대화를 돌린다. 갑자기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말씀하신다. 그러자 이 여인은 자신의 삶의 여정을 꿰뚫고 있는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을 엿보게 된다. 여인은 남편이 없다고 말하자, 예수께서 (남편 다섯을 두었다는) 여자의 과거사를 정확히 밝히게 되고(18절), 그러자 비로소 여인은 예수님의 존재를 어느 정도 인정하고서는 예수님을 예언자라고 고백한다(19절).
이어서 여인은, 사마리아인과 유대인 사이의 오랜 논쟁거리인,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참된 장소가 어디인가 하는 문제를 언급한다(성전을 예루살렘에 갖고 있는 유대인과 달리, 사마리아인은 자신들의 성소를 그리심 산에 세웠다). 21절에서 예수는 여인에게 대답한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고 말함으로써, 두 장소와 상관없이 하나님 아버지께 온전히 예배 드릴 때가 지금 이르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온전히 예배 드릴 때’란, 바로 예수와 함께하는 시간을 의미한다. 예수와 함께하는 현재에는 예배를 위해 특별히 구별된 장소가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예루살렘이나 그리심이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다.
23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는 참된 예배가 무엇인가를 또한 그런 예배를 드릴 때가 언제인가를 말씀하신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참된 예배가 바로 지금 자신과 더불어 성취되고 있음을 여인에게 말씀하신다. 여기서 ‘이때’란 바로 앞서 언급했듯이 예수께서 오신 때, 바로 지금을 가리킨다. ‘이때’라는 단어가 헬라어 원문에는 문장의 맨 앞에 놓여 강조되고 있다. 이어서 우리의 관심의 초점인 24절 말씀을 예수께서 하신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영과 진리 가운데) 예배할지니라.” 사마리아 여인은 이와 같은 예수님의 설명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선포할 메시아를 기다린다(25절). 그러자 예수께서 자신이 바로 그 메시아임을 계시한다(26절).
2. 요한이 의미하는 ‘영’과 ‘진리’
요한복음 4장 24절의 말씀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기에 나타나는 두 핵심어인 ‘영’과 ‘진리’를 요한은 어떤 의미로 사용했는가 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요한은 이 두 개념을 인간의 심성과 관련된 내적인 차원에서 이해하지 않고, 하나님과 관련하여 이해하였다. 즉 영이란 하나님의 영을 가리키며, 진리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를 의미한다. 이와 같은 요한의 이해를 분명히 하기 위해 각각의 개념에 대하여 좀더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1) 요한의 ‘영’(pneuma) 이해
요한복음의 ‘프뉴마’(pneuma)는 플라톤적인 의미에서 ‘혼’(psyche)/‘마음’(nous)/‘몸’(soma)과 대립된 인간학적인 개념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요한은 프뉴마를 인간적인 영역에 속하는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세력을 나타내는 개념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이다.7 요한복음 3장 6절(“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에 잘 나타나듯이, 하나님의 세력으로 이해되는 ‘영’(pneuma)과 대립된 개념은 세상 세력을 대표하는 ‘육’(sarx)이다.
요한의 문맥에서 '신령'은 오직 성령과 동일한
개념으로 사용되는 가운데 '진리의 영'으로 이해되며,
따라서 제자들을 계시의 진리 가운데로 이끈다.
이와 같이 이해된 하나님의 영은, 보이지도 않으며 단지 그 활동을 통하여 인식될 수 있을 뿐이기에(요 3:8), 인간의 접근이 근본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고 말한다(요 1:18). 이 요한복음 4장 24절에 나타나는 “하나님은 영이시다”라는 말이 바로 인간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빛이시라”(요1 1:5) 혹은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1 4:8)라는 표현 역시 하나님의 본질을 설명하는 개념이 아니라, 요한적인 이원론의 의미에서 하나님의 활동하심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이해해야 한다. 즉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것은, 인간에게 어둠이 아니라 빛을 비추신다는 것을 뜻하며,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또한 요한의 영 이해와 관련하여 우리말로 ‘보혜사’ 혹은 ‘협조자’로 번역하는 ‘파라클레토스’(Parakletos)를 빠뜨릴 수 없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오직 요한복음(요 14:16f, 26; 15:26f; 16:7b~11, 13~15)과 요한일서 2장 1절에만 나타난다. 종교사적인 유래와 관련하여 논란이 많은 이 개념은, 그리스어 동사 ‘파라칼레오’(parakaleo)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특별히 법정에서 변호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불러들인 자’를 뜻한다.8 즉 누군가를 돕고 보호하는 역할을 맡은 자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요한의 문맥에서 이 개념은 오직 성령과 동일한 개념으로 사용되는 가운데, ‘진리의 영’으로 이해된다. 요한복음 14장 16~17절에서 파라클레토스는 단지 예수께서 제자들과 이별한 뒤 하나님께서 주시기로 약속한 선물로서 나타난다. 그런데 요한복음 14장 26절은 파라클레토스의 기능에 대해 언급한다. ‘가르치며’(cf. 요1 2:27) 예수님의 말씀을 ‘상기시키는’ 것이 파라클레토스의 기능으로 나타난다. 또한 요한복음 15장 26~27절은 파라클레토스의 또다른 기능으로서 예수님을 (세상 사람들에게) ‘증거하는’ 기능에 대해 말한다. 게다가 파라클레토스는 하나님의 법정에서 믿지 않는 세상을 고소하는 기능도 갖고 있다(요 16:8~11). 마지막으로 요한복음 16장 13~15절에 언급된 파라클레토스는 신앙 공동체의 활동과 관련하여, 예수님에 의해 계시된 진리 가운데로 제자들을 인도하는 기능에 대하여 언급한다.
2) 요한의 ‘진리’ 이해
요한은 ‘진리’(aletheia)라는 개념을 자기 특유의 신학적인 표현으로 이해하였다. 그가 이 단어를 공관복음서 기자와 달리 훨씬 자주 사용하였다는 점만 보더라도,9 이 개념을 중요하게 간주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요한이 어떠한 의미로 이 개념을 이해했는가를 파악하기 위해, 이 개념과 관련하여 사용된 언어 사용법에10 유의할 필요가 있다.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형태의 사용법이 눈에 띈다11첫째, ‘진리’는 다음과 같은 동사와 관련하여 사용된다: 진리를 ‘알다’ 혹은 ‘보다’(요 8:32; 1요 2:21); 진리를 ‘말하다’(요 8:40, 45, 46; 16:7); 진리를 ‘증거하다’(요 5:33; 18:37); 진리를 ‘행하다’(요 3:21; 1요 1:6); 진리에서 ‘나오다’(요18:37; 1요 3:19). 여기에서 요한이 뜻하는 ‘진리’는 계시를 나타내는 언어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계시를 가리킨다.
둘째, ‘진리’가 전치사 엔(en)과 함께 사용된다: 영과 진리 ‘안에서’(요 4:23, 24); 진리 ‘안에’ 서다/서지 못하다(요 8:44); 진리 ‘안에서’ 거룩하게 하다(요 17:17, 19); 행함과 진리 ‘가운데’(1요 3:8). 여기에서 ‘진리’는 전치사 엔(en)과 더불어 일종의 부사적인 표현으로 이해되지 않고, 영향력이 미치는 공간적인 개념으로 사용됐음을 알 수 있다. 이때 진리의 영역은 이와 대립된 영역을 전제한다. 이를 요한은 ‘어둠’(요 1:5) 혹은 ‘세상’(요 1:10)으로 부른다.
예배란 초월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인데, 이 만남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실 때에야 비로소 가능하다.
따라서 참 예배는 말씀의 온전한 선포를 전제한다.
셋째, 진리가 마치 독립적인 존재로 나타난다: 은혜와 진리가 나타나다(요 1:17);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 나는 진리다(요 14:6). 여기에선 ‘진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하다는 점이 강조된다.
요한복음 1장 17절에 ‘은혜와 진리’라는 한 쌍의 명사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은 본래 구약적인 표현 ‘헤세드’(dsj)과 ‘에메트’(tma)에 상응한다.12 하나님의 자비와 당신의 백성과 맺은 언약에 대한 신실함을(출 34:6) 요한은 자기 식으로 해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하나님께서 아들을 파송한 것을 자기 백성과 맺은 언약의 성취로 이해했다. 아들 파송 사건은 종말론적인 사건으로서 동시에 하나님의 계시를 뜻한다. 따라서 예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진리’와 동일하다(요 17:17). 결국, 본질적인 의미로 볼 때, 요한의 ‘진리’가 뜻하는 것은 아들을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를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다. 이점은 위에서 언급한 첫 번째 경우의 언어 사용법 가운데 특히 잘 나타난다.
이렇게 볼 때, 요한에게 나타나는 ‘영’과 ‘진리’란 서로 보충하는 개념으로서, 한마디로 세상적인 것 혹은 인간적인 것과 대립된 것을 가리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영과 진리가 서로 연결되어 나타난 이 표현은 요한 특유의 성령을 가리키는 칭호 ‘진리의 영’(요 14:17; 15:26; 16:13)을 연상시킨다. 또한 ‘진리의 영’은 다음과 같은 표현, ‘참 빛’(요 1:9; 1요 2:9), 혹은 ‘참 떡’(요 6:32) 또는 ‘참포도나무’(요 15:1), 또는 ‘선한 목자’(요 10:11, 14)와도 상응한다.
3. 참된 예배란
이제 다시 우리가 문제삼고 있는 구절 요한복음 4장 24절로 돌아가서, 요한이 의미하는 참된 예배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참된 예배의 특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1) 특정 예배 시간과 장소의 극복
참된 예배란 특정한 예배 시간과 장소에 얽매이지 않는다. 유대인들은 참된 예배는 오직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가능하다고 믿은 반면, 사마리아 여인은 오직 그리심 산에서만 가능하다고 믿었는데(요 4:20), 요한은 그것을 참된 예배의 본질로 보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요한은 유대 전통적으로 내려온 제의적 관습을 거부한다. 예배의 본질은 제의 자체에 있지 않음을 뜻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러한 이해는 요한 특유의 사고가 아니라, 이미 오래 전부터 구약성서 및 유대 전통에서도 익히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2)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현재에 가능
긍정적으로 말하자면, 참된 예배란 요한복음 4장 23절에서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 가운데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하고 강조하듯이, 하나님의 영과 아들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진리)가 드러난 현재, 즉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된 순간에 가능한 것이다. 곧 예배하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지금의 순간을 가리킨다(요 3:19; 5:25). 예배의 ‘참됨’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결부된 순간에 제한되고 있다. 바로 그때 구원의 시대에 합당한 장소가 펼쳐진다. 참된 하나님 경외는 제의적 형식을 통해 인간이 주도가 되어 드리는 것이 아니다. 요한은 예배를 특정 시간과 공간에만 가능한 것으로 생각함으로써 가속화된 예배의 형식화를 거부한다.
3) 현재 종말론적인 예배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현재에 완성된 것으로 보는 현재적 종말론은 요한복음의 특징에 속한다(요 3:19; 5:25; 4:23; cf. 12:31; 16:11). 예수의 오심은 바로 종말론적인 현재와 관련된 것이다. 선재한 로고스요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땅에 오심으로 미래 종말에 있을 사건이 바로 지금 실현되고 있다고 요한은 믿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할 때가 바로 지금이라는 말(요 4:23)은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함께하신다는 근거에서 가능한 말이다. 인간의 구원과 관련된 종말의 시간이 기다려야 할 미래에 나타날 것이 아니고, 예수의 운명 가운데 바로 지금 성취되고 있다는 말이다.13 그러나 이러한 구원의 현재성은 신앙,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가운데 적용된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가운데 참된 예배가 종말론적인 현재에 가능하다고 요한은 강조한다.
4)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예배
요한은 그리스적인 사고보다 훨씬 더 철저한 이원론적인 사고를 하였다. 요한에게 있어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이 세상적인 것을 초월한 분이시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경배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요한은 하나님에 대하여 존재론적인 정의를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활동하심의 차원에서 묘사할 뿐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스스로를 계시하실 때에 비로소 그분의 존재에 대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예배란 이처럼 초월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인데, 이 만남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실 때에야 비로소 가능하다. 요한복음 3장 23절에서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는 진술은 바로 이것을 가리킨다. 즉 예배란 우리의 힘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가능하다는 말이다. 하나님을 경배하며 온전한 삶을 이루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자비로운 은혜에 대한 우리의 답변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요한은 하나님을 찬미한다는 것이 우리의 힘으로가 아니라, 그분의 도우심으로 가능해진 것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예배는 우리의 인간적인 노력으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그 근본에 있어 하나님의 역사가 전제된 것이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허락해주신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랑할 것이 없고 단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할 뿐이다.
Ⅲ. 나가면서
오늘날 우리는 예배의 특정 시간과 특정 장소에 너무도 집착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마치 하나님은 예배시 교회 건물 안에만 임재하고 계신 듯이 말이다. 요한복음 4장 24절을 통하여, 참된 예배란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계신 주로서 바로 지금 우리와 더불어 역사하고 계신다는 믿음 가운데, 하나님의 영과 하나님의 진리 가운데 이루어지는 우리의 삶 전체를 가리키는 말임을 살펴보았다.
예수께서 이땅에 오심으로, 모든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귀한 피조물이라는 차원에서, 성과 속(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을 더 이상 구분하지 않고 모든 것과 모든 날을 성스럽게 여기셨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로부터 속되다고 천대받던 창녀, 세리, 어린아이들과도 사랑의 교제를 나누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주일과 평일을 더 이상 구분하지 않고 모든 날을 마치 주일처럼 귀한 날로 여기셨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주님과 함께 하는 날은 바로 성스러운 주일과 다름없다는 말과 같다. 이런 의미에서 평일에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의 삶이 곧 하나님께 드리는 산 예배가 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예배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금 나의 주로 고백하는 믿음 가운데, 장소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우리의 삶 전체를 바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동시에 그러한 삶이 나의 노력에 달려있지 아니하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달려있음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두 무릎을 꿇는 삶인14 것이다. 참된 예배 가운데 우리는 하나님과 만나고 하나님을 체험하게 되는데, 이 체험은 우리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분의 전적인 자비로 말미암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깨달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부지런히 다양한 예배에 참여한다 할지라도, 이러한 점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아직도 참된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통해 드러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의 표현이요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하나님의 값진 선물인 것이다.
김창선 신약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