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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예식설교 1461: 권면 청학교회

2013.10.20 23:16

김성찬 조회 수:778 추천:22





↓ 아래 동생을 장로로 세우는 황은연 목사. 두 번 째다. 부럽다.

 

 

영혼일기 1461 : 권면 청학교회

2013.10.20(주일) 

 

오늘 오후 4시 교회 창립 14주년 기념 청학교회 임직식이 있었다.

장로장립, 명예권사 취임, 권사 취임, 안수집사 취임이 있었다.

 

담임 황은연 목사의 사회로 진행된 임직식은 1부 지방회장 한기채 목사의 ‘양무리의 본이 되라(벧전5:1-3)’는 제하의 설교가 있었다. 그리고 2부 임직식이 있었고, 3부 권면 김성찬 목사(양지교회), 축사 윤의광 목사(빨래골교회), 축도 정건수 원로목사(장안교회)가 있었다.

 

황은연 목사는 그 임직식을 거행하면서, 직분을 맡게 된 임직자들을 한 분, 한 분 소개했다. 황목사님은 그분들이 어떻게 이 자리에 서게 되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신앙 이력을 소개하면서, 함께한 하객들과 함께 영혼을 알곡 되게 한 기쁨을 나눴다. 나는 그분의 임직식을 진행하는 모습에서 모성애적인 친밀감(Intimacy)를 느꼈다. 나는 바로 저런 목회자의 친밀감이 교회를 가족 같은 친밀감이 넘치는 교회 되게 했고, 교회를 튼실하게 키워왔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임직식이 자연스레 길어졌으나, 다들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긴 목회자의 구령 열정에 감화되어, 영혼구원의 각오를 다졌다.

 

특히 황목사님은 자기 집안에서 맨 처음 예수를 믿게 된 사람이었다. 그분은 그 구원받은 감격을 자기 가족들을 구원해 내는 영적 에너지로 삼았다. 그 영혼 구원에 대한 열정으로 온 가족을 예수 믿게 했다. 오늘 장로 장립을 받은 황동연 장로가 그의 동생이다. 그리고 이미 장로 장립을 받은 황술연 장로도 그의 동생이다. 자기 친동생 두 사람이 청학교회의 기둥이 된 거다. 아들 원현재 서리 집사도 오늘 안수집사의 반열에 올라섰다.

 

나를 비롯한 목회자들은 형제들 일색이라는 염려보다는, 신앙 인격적 감화력으로 불신 동생들을 예수께 이끌어 장로로 세울 만큼 키워 낸, 황은연 목사의 전도자요 동시에 목회자로서의 승리한 삶을 부러워했다. 여전히 믿음 안에 거하지 못한 우리 형제자매의 얼굴이 그 임직식 내내 뇌리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더 늦기 전에 어머님의 기도가 나를 통해서 응답되어지길 기도했다. 그냥 진부한 상투어나 주고받는 관계를 넘어, 전인적으로 하나가 되는 대화(feeling oneness)에 이르는 우리 형제 자매가가 되길 소망한다. 아득하지만, 성령의 도우심과 나를 십자가에 못 박는 역사가 필요하다. 실천이 결코 만만치 않은, 아직 자신이 없는, 주께서 강권적으로 나와 너를 흔들어 주시길 예수 이름으로 빈다.

 

 

친밀감(intimacy)이 있는 대화에는 보통 다섯 가지의 단계가 있다. 1. 일상적인 대화(cliche;진부한 상투어), 2. 자기의 일(사건)을 나누는 대화(reporting the facts), 3. 생각을 교환하는 대화(exchanging thoughts), 4. 감정적으로 공유하는 대화(sharing emotions), 5. 전인적으로 하나가 되는 대화(feeling oneness)로 나눌 수가 있다. 

 

첫째, 일상적인 대화(cliche)는 일상생활에서 흔히들 하는 이야기지요. 그러나 일상적인 대화가 원만하지 못한 사람은 더 깊이 있는 대화를 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일상적인 대화는 무의식적으로 행해지는 태도를 표현한다고도 할 수도 있는데, 대화의 첫 단계로 중요합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말 한마디가 천 냥 빚을 갚는다"라는 말이 있는데 참으로 공감이 되는 속담입니다.

 

둘째, 자기의 일(사건)을 나누는 대화(reporting the facts)는 나와 친분이 있는 사람들과의 대화를 말할 수 있습니다. 나에게 일어난 일들에서 기쁨이나 슬픔을 솔직히 나눌 수 있는 이 대화에는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만 가능하답니다. 신뢰가 형성되지 못할 때는 많은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는 대화입니다.

 

셋째, 생각을 교환하는 대화(exchanging thoughts)는 토픽 위주의 대화가 이에 속한답니다.

예를 들어 부부대화에 있어서 자녀양육의 원칙이나 물질 쓰임에 대한 생각 등 서로의 지적인 부분이 합의가 되는 대화를 말하며 서로의 다름을 인정할 때 더 효과적인 대화를 할 수 있는 단계입니다.

 

넷째, 감정적으로 공유하는 대화(sharing emotions)는 사랑이 없이는 하기 힘들고, 한번 형성되면 그 사람과 날마다 대화하지 않아도 기쁨과 믿음을 공유할 수 있어 삶을 풍성하게 하기에 매우 중요합니다. 나에게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남편(아내)이 있다던가 친구가 있다면 매우 풍성한 삶을 산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다섯째, 전인적으로 하나가 되는 대화(feeling oneness)는 매우 이상적인 대화로서 둘이 하나가 되는 대화입니다. 이때는 굳이 대화를 하지 않아도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전인적 체험을 하게 됩니다.

http://cafe.daum.net/bsj58/IKv5/89?q=%C4%A3%B9%D0%B0%A8%20intimacy&re=1

 

 

권면 / 교회와 임직자에게 주는

 

 

말씀 앞에 일어서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 8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 9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 10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 / 11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야고보서5:7-11)

앉으십시오.

 

이상과 같은 야고서의 말씀을 들어 청학교회와 오늘 임직 받은 분들에게 권면을 드립니다.

 

 저는 이 시간 야고보 사도에 대한 이야기 보따리를 간략히 풀어 보겠습니다. 야고보 선생의 신앙 일대기에서 오늘 성령께서 청학교회와 임직자들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권면을 깨치시기 바랍니다.

 

첫째,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이었지만, 그는 예수님의 공생애 시기에는, 즉 예수 부활 이전에는 예수를 좇지 않았습니다. 

 

야고보는 예수에 관해 “그가 정신이 나갔다”고 말한 친족들 가운데 포함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 막 3:21-

 

둘째, 그런 그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이후, 자기 어머니 마리아와 형제들과 사도들과 함께 기도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마가의 다락방에 나타납니다. (행 1:13, 14)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거대한 음모를 꾸몄습니다. 예수 이야기가 그 누군가가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함을 학문적, 역사적으로 밝혀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들이 절대로 부인할 수 없는 두 가지 사실을 역사 앞에 고백했습니다. 하나, 예수는 분명히 존재했다. 역사적 예수를 발견했습니다. 둘째, 예수의 부활 없는 교회는 없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부활 신앙 공동체입니다.

부활 신앙

청학교회와 임직자들이 부인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도 가슴이 뜨거워지는, 몸이 다시 사는 부활 신앙에 굳게 서기를 권면합니다.

 

셋, 야고보는 자신과 예수님과의 관계를 분명히 합니다. 한 형제지만, 야고보는 자신이 그분의 종이라고 밝힙니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약1:1)." 그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또 다른 동생 유다도 그가 쓴 유다서 첫머리에,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는 부르심을 받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라(유다서 1:1) 라고 자신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분명하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형을 형이라고 부를 수 없던 홍길동처럼.

어머니를 어머니로 불러서도 안 되고, 누나를 누나라 불러서도 안 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야고보와 유대가 자신이 쓴 서신서 첫머리에,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동생 야고보라고 썼거나, 예수 그리스도의 동생 야고보, 그 야고보의 동생 유다라고 썼다고 한다면, 성경의 권위가 얼마나 실추되었겠습니까? 그런데 두 형제는 겸손하게도 자기들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육적 형제로 밝히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한 결 같이 자신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선언합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이렇게 칭찬합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2:13)

 

그리고 강단의 사자에게는 ‘허용된 위선’이 보장되어 있음도 알아야 합니다.

 

청학교회와 임직자들은 강단에 선 주의 사자 황은연 목사님의 말씀을 대할 때.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주의 종들이 되길 바랍니다. 그럴 때 말씀의 권능이 이 교회 안에서 역사하실 것입니다.

 

넷, 야고보 사도는 선교 지향적, 열린 비전을 깨친 영적 선각자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으로서의 야고보. 그가 예루살렘 공의회 의장으로 있던 주후 49년 경에 구원을 위해 할례나 기타 의식적 율법이 필요한지에 대한 논쟁이 벌어집니다. 이방인 선교에 나섰던 바울과 바나바와 베드로의 선교 증언을 듣는 자리였습니다. 야고보는 그 공의회에서 구약성서의 정신을 언급합니다. 이방인의 구원, 그 길이 구약성경에도 나타나 있음을 제시하며, 그는 이방인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를 드높입니다. 그래 그는 바울과 바나바 특히 권위자 베드로 사도의 증언에 표를 던집니다.

 

“야고보가 대답하여 이르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14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그들을 돌보신 것을 시므온이 말하였으니 /15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일치하도다 기록된 바 /16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암 9:11,12 /17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18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19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20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21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라 하더라(행15:13-21).”

 

야고보 사도 그는 구약에 정통한 신학적 입장과 성령 사역의 새 역사를 동시에 인정한 균형 잡힌 교회 지도자였습니다. 바울은 후에 그 공의회 때에 야고보가 이방인의 선교의 문을 적극적으로 열게 해준 결정을 언급하면서,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을 가리켜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기둥같이 여겨지는” 사람들이라고 칭송합니다. (갈 2:1-9)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갈2:9).”

 

이처럼 야고보 사도는 선교 지향적 비전을 지닌, 예수 정신에 투철한 사도였습니다. 그는 차별 없는 복음 정신 구현해 낸, 선교의 걸림돌이 아니라 선교의 새 지평을 연 선견자요, 선구자였습니다.

 

이처럼 야고보 사도는 예루살렘 행정적 리더로서 올바른 식견과 예지력을 가지고 바울의 사명을 사명되게 했습니다. 교회의 행정적 리더의 사명은 교회가 교회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도록 돕는 일입니다. 임직자들은 지하수를 끌어 올리는 첫 마중물입니다.

 

마지막, 야고보는 소망의 인내, 그 재림 고대의 기수였습니다.

 

모두에 여러분에게 낭독해 드린 야고보서 5장 7절 이하에 가까운 주의 강림을 바라며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고 권면합니다.

 

교회는 예수 부활로 시작된 부활신앙공동체입니다. 몸이 다시 사는 부활신앙이란, 주 예수의 강림으로 완성됩니다. 그러므로 주의 재림을 소망하는 교회는 재림 신앙 공동체입니다. 다시 오실 주님, 속히 오실 주님.

 

우리도 재림을 대망해야 합니다. 그리고 재림에 필요한 것은 소망의 인내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인내의 기수요, 향도였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이었습니다. 모두 다 예루살렘을 떠났어도 그는 예루살렘 교회를 굳건히 지켰습니다. 끝내 죽음으로 지켰습니다.

 

성경에는 야고보의 죽음에 관한 기록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속 역사가인 요세푸스에 따르면, 총독 페스투스의 사망 시기인 기원 62년경과 그의 계승자 알비누스가 도착한 시기 사이에 대제사장 아나누스(아나니아)는 “산헤드린의 재판관들을 소집하고,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의 동생인 야고보라는 사람과 그 밖의 몇 명을 재판관들 앞으로 소환하였다. 그는 율법을 범한 죄로 그들을 고소한 후 돌로 쳐 죽이도록 넘겨주었다”고 한다.—「유대 고대사」(Jewish Antiquities), XX, 200 (ix, 1).

 

우리는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고전4:2)이라는 말씀을 즐겨 낭독합니다. 그러나 그 충성은 이내 한계를 드러냅니다. 그 이유는 충성의 시한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그 충성의 열매를 따먹으려 들기 때문입니다. 안수 집사가 될 때까지, 권사가 될 때까지, 장로가 될 때까지만 충성합니다. 한국교회 굴지의 교회는 장로로 피택 되기 전에 의무적으로 일정기간 주차 안내 등 온갖 궂은일에 봉사하게 합니다. 그리고 장로를 세웁니다. 그래서 장로가 되기까지가 충성 봉사의 기간이라 여기게 합니다. 그래서 그 후에는 충성봉사 대신 회중들 위에서 군림하려 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할만 큼 했어, 10년이나 충성 봉사했어. 교회를 위해, 목사를 위해.

 

그러나 이런 변명이나 투정은 바른 것이 아닙니다. 서로 원망해서도 안 됩니다. 성경이 말하는 충성의 기간 죽도록 충성하는 것입니다.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

 

그런데 ‘죽도록 충성하라’는 구절을 임직자들이 아전인수 식으로 해석해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기가 충성의 기간을 정해 놓고 충성합니다. 충성을 온전한 충성되게 하려면 우리는 ‘죽도록’이란 구절을 올바르게 해석해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은, 전심전력하여 주님이 오실 때까지 충성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온전한 충성은 그 끝이 주님 오실 때까지입니다. 재림 고대 신앙이란, 온전한 헌신을 주님께서 다시 오실 그날까지 인내하며 행하는데 있습니다.

 

야고보 선생은 인내의 기수였습니다.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이 신앙고백에 굳게 서서, 끝내 순교까지 당하는 소망의 인내로 우리 앞에선 재림 대망의 향도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하십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 /8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 … / 10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 / 11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야고보서5:7-11)."

 

그 재림고대의 신앙을 소망의 인내로 오늘 이어가고 있는 이가 계십니다. 그분이 청학교회 황은연 목사님이십니다. 그분은 순교자 문준경 전도사님의 후예입니다. 그래서 그 기념관 운영위원이시기도 합니다. 교단은 순교자 기념관 운영위원 중 한 자리를 여성 몫으로 배정했습니다. 문준경 순교자가 여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단 수많은 여자 목회자 중에서 한 사람 적자(嫡子)를 찾았습니다. 그분이 바로 청학교회 담임 황은연 목사님이십니다. 황은연 목사님은 순교신앙의 적자(嫡子)입니다. 그리고 청학교회는 구속사적 적통(嫡統)을 이어가는 교회입니다.

 

저는 지난 몇 주 전 CTS 기독교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다음 세대에 주는 이런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신앙은 강요되지 않습니다. 단지 때때로 불러일으킬 수 있을 뿐입니다. 신앙을 불러일으킬 도구가 순교신앙입니다. 그리고 순교는 주께서 가까우시다는, 재심 신앙으로만 가능합니다. 이 시대에 스스로 드러내신 순교 성지가 발하는 바, 그 절박한 재림고대 신앙을 회복하는 일이 한국교회의 가장 큰 숙제입니다.”

 

종말론적인 재앙인 임한 이 말세지말에, 재림고대 신앙 회복이라는 역사적 사명을 황은연 목사님을 모신 청학교회가 앞장 서서 이룩하길 소망하며 권면합니다. 그리고 늘 세움을 받은 임직자들은 주의 재림을 앙망하는, 그 소망의 기수들이 되길 바랍니다.

 

마라나타,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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