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2283: 특강 Creating Love

2017.07.04 13:07

김성찬 조회 수:52

강의 안 2.
한국상담심리연구원 패밀리 크레이팅 러브
17/07/04(화)
Creating Love / 김성찬
 
1.
"크리에이션(creation)은 존재하지 않았던 어떤 것을 고안하고 드러내는 것이다. 크리에이티브(creative)는 차별화하거나 독특하게 변형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혁신은 creation이 아니라 creative의 영역이다."(돈 슐츠 노스웨스턴대 교수의 혁신에 대한 정의)
 
'Creating Love'라는 말도 없는 사랑을 만들어 낸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 창조작 사랑에 어떤 일률적인 원안이나, 모범 답안이 있다는 말이 아닐 것이다. 아니다. Creative-제 각각 제 나름대로의 제 격에 맞는 사랑 가꾸기에 대한 고찰이라는 말일 것이다.
 
그 사랑 가꾸기를 혁신적으로, 생산적으로, 창조적으로 행하는 심리학적인 기본 자세를 존 브래드쇼(John Bradshaw)는 우리에게 자기 체험에서 우러른 체계적 이론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거기에 일정한 대안과 한계가 있다. 진행형이기에.
 
사랑 창조 라는 말은 우리 피조물 사전에는 
없다.
우리는 조물주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넘어지면서 걷기를 배웠듯이, 실패에서부터 사랑을 배운다. 실패한 사랑은 사랑 만들기의 필수적인 과정이다. 그 어떤 사전 예행 연습 없이 우리는 단번에 가정을 꾸리게 되고, 부부가 되고, 부모가 되기 때문이다.
 
하여 실패를 거듭해 나아가다가, 그 실패를 통해 배운 바를 자기 방식으로 개선 또는 혁신해 나아가는 것이 제 각각의 사랑이다. 이게 Creating Love다. 또한 타인의 Creating Love를 통해서도 우리는 사랑 만들기 팁을 배울 수가 있다. 
 
반면 우리는 타인의 성공한 사랑 만이 아니라, 타인의 실패한 사랑을 통해서도 그 어떤 교훈을 배울 수 있다. 그러나 그 실패한 사랑은 사랑에 실패한 이들에게 사랑 포기하기를 따라하게 만들기도 한다. 베르테르의 효과라는 게 바로 그거다. 아픈 최진실이 남동생 최진영을 전남편을 조성민을 함께 아파하게 만들게 한 것 아닐까?
 
그래서 Creating Love는 사랑 만들기는 계속되어야 한다. Creating Love는 완성이 아니라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모든 문제의 해답은 추구(탐색, 모색)하는 데 있다.
 
2.
Creating Love의 궁극적 목표(Ultimate goal)는 있는가? 있다면 무엇인가?
 
아가페(AGAPE ἀγάπη 신적 사랑)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아가페(AGAPE ἀγάπη 신적 사랑) 사랑이 그 궁극적 목표라고  말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사람 안에는 아가페가 없다. 
없기에 계발할 수도, 혁신할 수도 없다.
 
내겐 없지만, 하나님은 있다. 
그게 우리의 한계지만
달리 말하면
그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영존하신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가페 신적 사랑이기에
 
그래서
우리가 언제, 어디서든지 
빌려 쓸 수 있고, 얻어 누리며, 나누고, 전할 수 
있다.
 
돈이 없으면 돈을 못 빌리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오늘 날에는 돈이 없어도 돈을 빌릴 수가 있다.
신용만 있으면 돈을 빌려주는 신용 사회다.
 
하나님께 있는, 하나님 자체이신
신적 사랑 아가페도 
우리는 내 것 삼을 수 있다.
 
그러나
돈이나, 힘으로 내 것 삼을 수 없다.
신용으로도, 신념으로도 안 된다.
 
믿음으로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다.
 
성령 하나님을 믿음으로 받아 모시면 
우리는 아가페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
 
만일 아가페 사랑이 특정한 그 어떤 사람만이 지닌 사랑의 기술이라고 한다면, 마치 어떤 장인만이 소유한 비법 같은 것이라면, 시공간의 제약을 받는 인간이기에 오늘의 우리가 전수를 받는 데,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 하나님은 
영존하신 하나님이며, 누구에게나 차별 없는 그사랑에 풍성하신 하나님이시며,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아니하시는, 내 곁에 계시는 분이시다.
 
하여,
의존해야 한다.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의지해야 한다.
의지할 수밖에 없다.
 
무엇으로?
단지 믿음으로 성령님을 모시고
오직 믿음으로 성령님을 의지해야
한다.
 
그렇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가페 사랑을 누리고 나누며 베풀려면,
보혜사 성령님을 의지하는 수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3.
기독교인들도 실패한다.
이유는 하나다. 성령 충만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수를 아는 지식만으로도 안 된다.
거기엔 아가페가 없다. 잘해야 필레오(affection 호의, 우정)뿐이다. Love가 아니라 Affection일 뿐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요한복음 21장 15~17절에 기록된, 부활하신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에 있었던 디베랴 호숫가의 사랑 타령이다. 근데 이상하다. 말이 엇갈리고 있다. 삐걱댄다. 아니 당연하다. 두 사람 사이에 그사랑에 대한 일치된 이해와 의식과 의지가 다르기 때문이다. 아니 없기 때문이다.
 
15절
 예수-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사랑하다 아가파오 ἀγαπάω)
 
베드로-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필레오(φιλέω;affection 호의, 우정)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16절
예수-아가페(ἀγάπη)
베드로-필레오(φιλέω)
 
17절
예수-필레오(φιλέω)?
베드로-Yes,
 
그랬다. 베드로는 아가페를 몰랐거나, 아가페를 감당할 능력이 없었다. 그는 모처럼 자신의 진리이신 예수에 대한 믿음와 사랑 앞에서 정직해졌다. 그러나 너희 인간들이 감당 못한다고 내 기준을 낮출 수 없다고 예수는 말씀하신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3,44)
 
아가페 사랑의 구현이 불가능하다고 여긴, 영리한 인간들은 의도적으로 성경을 멀리했다. 청교도였던 프랑스의 문호 앙드레 지드는 1893년 아프리카 여행 길에 나서면서 일부러 성경을 가지고 가지 않았단다. 그 이유는, 성경이 자신을 너무 비참하게 한다는 거였다. 거울 같은 성경. 성경을 너무 잘 알기에 성경을 싫어한 것이다.
 
술집 들어가면서 성경 들고 가는 사람 없듯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 예수를, 아가페 사랑을 잘 모르기 때문에, 함부로 아가페 사랑 운운한다. 무지의 용기일 뿐이다. 우리가 밥 먹듯 아가페 사랑 운운하는 설교 행위가 말이다.
 
4.
그런데
아가페이신 예수께서는 창녀 집에 들어가셨다. 
 
******************************
(전략)
예수는 왜곡된 리비도의 화신이 된 그녀와 발끈 그녀를 죽이고자 남근석를 치켜 든 잔인한 초자아(무리들)를 향해 이렇게 말한다.   
 
"너희들 중에서 'Sex'가 소망이 아니었던 자가 먼저 ‘Sex'가 전인격인 이 여자를 그 돌로 치라!”   
 
여기에 극적 반전이 있다. 여기에 구원이 있다. ‘새 여자 되기’가 유일한 소망이었으나, 새 여자가 될 가능성이 현실 무망한 세계에 처한 ‘헌’ 여인이 그 로마가 아닌 골고다로 선회하고 있다. 이젠, 헌데나 서로 핥아 줄 수밖에는 별도리 없는 로마가 아닌, 그녀를 새로운 피조물 되게 하는 골고다의 예수에게로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있다. 
 
그녀는 생애 최초로 Sexless의 쾌감을 누리고 있다. 이드와 수퍼 에고 사이에서 압사되어 가던 퇴행적 자아(가학적-항문기적)가 위에서 임하는(from above) 은총으로 회복되어 가고 있다.
 
“(그들처럼) 나도 너를 정죄치 아니하노니”   
 
그 정죄는 하나는, 돌든 자 즉, 그 누구도 정죄할 수 없는 자(에고)들의 정죄(수퍼 에고)요 다른 하나는 정죄할 수 있으나(수퍼 에고) 정죄하지 않는(above Super Ego) 그분의 정죄이다. 그녀는 정죄할 수 없는 자들의 정죄에 시달려 왔다. 
 
큰 도둑은 저 회당에 있고 작은 도둑은 이 무저갱에 처한 현실에 분노해 마지않던 그녀의 무기력한 분노는 이 한 말씀에 의해 그 기력을 잃는다. 자신과 교접한 자 그 누구도 그녀를 새 여자(New being) 만들어 주지 못한 현실 세계가 갑자기 그 아가페적 사랑 안에서 새 세상으로 바뀌는 신비를 맛본다. 
 
끝없이 손가락을 빨아대면 나올 것이 ‘구토’ 밖에 없다고 말하는 사르트르의 실존, 그 한계를 그녀는 여기서 뛰어 넘는다. 그것이 ‘from above’ 다.
(후략)
 
(김성찬 <뮤지컬 마리아 마리아-프로이트로, 프로이트를 넘어 - 로마를 넘어 골고다로>중에서)
******************************
 
5.
우리는 예수가 아니다.
창녀 집에 들어가면 안된다.
 
숱한 기독교인들이 
사랑에 실패했다. 실패하고 있다. 실패할 것이다.
 
김 원장이 사랑 타령을 하라면서, 
자꾸만 최진실 이야기를 하라고 했다. 
 
나한테 그 책임이, 최진실 죽음에 대한 책임이 당신 김목사에게 있다는듯 말이다. (상담학의 한계인가 ㅎㅎ)
 
내 책임?
기실 틀린 말이 아니다.ㅠㅠ
 
여기 소개한다.
 
****************************** 
(전략)
故 최진실은 MBC 무릎팍 도사에게 그 밤의 시린 고독을 당신이 채워 줄 수 있겠느냐 따져 물었었다. 
 
알프레드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는 “종교는 다른 사람이 침범할 수 없는 혼자만의 영역으로서의 고독을 처리하기 위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녀는 무릎팍 도사(道士)에게 그런 구원을 요청했었던가 보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그녀도 기독교신자였다는데, 故안재환도, 故이은주도 역시 크리스천이었다는데. 그런데, 그 종교도 그를 구원하지 못했단 말인가? 아니, 그 종교가 아니라, 그 예수를 믿는 이들이 그녀의 사랑의 대상일 수도 없었단 말인가? 
 
오츠의 글이다.
 
"어떤 여 환자가 병원 원목에게 했던 다음과 같은 말은 목회자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하나님이 우리를 돌본다는 말은 이제 그만 해 두시고 당신들이나 우리를 도와 줘 보세요!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시는지는 당신들의 행동에 따라 우리 스스로 결정하겠어요!”
 
한때 내게 너무도 사랑스러웠던 청춘. 
그러나 파경 무렵 내 미움덩어리였던 여인. 
그러다 맹순이로 회복되면서 다시 내 안의 연인이었던 
故 최진실. 
그녀는 예뻤다. 
 
그리고,
그녀를 지켜주지 못한, 종교가 
이 시간 밉다. 
(김성찬의 영혼일기82 : 故 최진실 2008.10.02(목))
******************************
 
최진실만 아가페 사랑 따르기에 실패한 게 아니다. 조성민도, 이은주도, 안재환도 그렇게 갔다. 다들 교회가 지켜주지 못한 이들이다. 살아 있으나 죽어 있는 너와 내가 그들인지 모른다.
 
이 시대는 사랑 만들기, 진정 위기의 시대다.
 
그 때에 내가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 기뻐하는 소리, 즐거워하는 소리, 신랑의 소리, 신부의 소리가 끊어지게 하리니 땅이 황폐하리라(예레미야 7장 34절)
 
그래서 오늘 우리 자녀들은 우리의 실패한 사랑에 큰 상처를 입어, 가정 사랑 만들기를 거부하고 있다. 혼밥, 혼술, 혼거를 숭상하고 있다.
 
6.
다시, 문제는 어디에 있는가?
 
교회가 팔아 먹고 사는 아가페에 있다. 교회가 아가페를 왜곡하고 있다. 자신들에게 없는 아가페를 자칭 아가페연 하면서 팔아 먹고 있다. 남발하고 있다. 자신이 하나님이요, 예수요, 성령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 한국 교회는 신천지로 대표되는 확실하게 속이는, 진짜 가짜가 영생불사 운운하며 메시아연 하면서 판치는 이단자들의 세상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고, 
예수께서는 자신의 몸으로 나타내 보이신 아가페, 그 사랑의 목표를 낮추어 주지 않으신다. 아니, 낮추실 수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아가페 사랑을 이루라.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 거룩한 백성인 우리에게, 새 제사장 나라가 된 이땅에 내리신 정언 명령이다. 
 
7. 아가페 사랑이란?
 
앤더스 니그렌의 <<아가페와 에로스>>에 
의하면,
 
기독교의 사랑은 아가페 다.
 
아가페 사랑이란, 
 
 1.자발적, 무동기적이다. motivation이 있는 것은 조건적이다. 예수는 아무 조건 없이 십자가를 지셨다.
 
motivation,  의도의 순수성을 말하는데,
여기에는 의도도 없다.
 
 2.가치에 무관심한 것이 아가페다. 대상이 무가치하더라도 조건 없이 사랑함으로 나의 사랑을 너의 감정에 전달하는 것
 
 3.가치 창조적이어야 함
 4.하나님과 교제를 이루는 기폭제가 되어야 한다. 
 
아가페적 사랑이란 하나님과 인간의 교통을 뜻한다.
 
아가페 사랑을 이론적으로 안다고 행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마귀도 하나님을 안다. 알기에 오히려 그분 앞에서 떨고 있을 뿐이다. 마귀도 믿고 떠는 데, 우리는 안 떤다. 그만큼 우리는 신양 양심이 무뎌져 있다. 
 
8. 성령만이 답이다.
 
어떻게 아가페 사랑을 나타내 보일 수가 있을까?
 
성령만이 답이다.
 
우리는 무기력하다.
은과 금은 없지만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준 
성령이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그 아가페 사랑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 예수께서 우리에게 아가페 사랑을 이룰 권능자를 우리에게 보혜사로 보내 주셨다.
 
아가페 사랑을 나타내 보일 유일한 힘을 우리는 성령님께 의지함으로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성령님을 분석하지 말고 마음에 모셔라. 너와 나의 사이에 모셔라.
 
믿음으로 모셔라.
J.B 필립스 "너희들이 믿는 하나님은 너무 작다"
 
9. 성령을 너와 나 사이에 모셔라
 
******************************
행복한 부부 '사이' 만들기
 
 (전략)
3)
해법 1 - 시소, 그 바라봄의 미학, 배려의 미학을 구사하라.��Seesaw(시소), 상대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바라봄의 미학), 상대를 살피면서 내 몸처럼 대함으로 나 자신도 균형을 잡는 시소, 그 바라봄의, 배려의 미학을 구사하라.
 
나는 행복한 부부 사이를 만드는 비결은, 시소 타는 지혜에 있다고 생각한다. 시소(seesaw) : 긴 널빤지의 한가운데를 괴어 양끝에서 사람이 타고 오르락내리락하게 만든 놀이용 기구. 나와 똑같은 몸무게 지닌 상대와 시소를 타는 법이 거의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시소를 흥겹게 타곤 한다. 그것은 놀이 기구인 시소가 선사한 배려의 미학이 있어 가능하다. 배려의 미학으로서의 시소 타기의 예절은 적절하게 균형을 맞추려고, 즉 수평(안정)을 유지하려고 몸무게가 무거운 사람이 자기편에서 앞으로 이동하며 시소를 조율한다. 
 
체중이 더 나가는 사람, 즉 가진 자, 힘센 자, 더 배운 자가 약자를 배려하려 자신을 먼저 움직이며, 상대편으로 더 다가서는 것. 그것이 시소가 마련한 ‘사이’를 원만하게 하는 비결이다. 
 
그리고 상대를 배려해야 하는 시소 놀이는 힘센 그 누가 시소를 타던 중에 혼자 벌떡 일어나 버리지 않는다. 만일 그럴 경우 상대가 시소에서 나동그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시소에서 잠시 내리고 싶을 때에 상대에게 알리고, 상대를 배려하며 운신하는 것이 시소의 예절이다. 시소는 외래어다. 영어 Seesaw에서 음을 빌려왔다. 한자 육서(六書) 중의 하나인 가차(假借)와 같은 경우다. 그런데 시소는 ‘See' 즉 상대를 보고하는 놀이다. 특별히 잘보고 놀아야 하는 놀이 기구라는 말이다. 상대를 무시하거나, 외면해서는 안 되는 공동운명체로 얽힌, 너와 나, 나와 이웃 그리고 부부관계를 잘 설명해 주는 놀이기구다. 참 멋진 이름을 가진 놀이기구다. 시소는 인간관계, 부부 사이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비결과 지혜를 우리에게 일러주는 놀이기구다.
�4) 해법 2 - 성령님을 부부 ‘사이’에 모셔라.
 
행복한 부부 관계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너와 나 사이에 선한 중재자를 둬야 한다. 그것이 속 깊은 이해, 인격적 배려, 상호 신뢰, 원만한 타협의 기술 등이 필요하다.
�그런데 성령님은 그 모든 해법의 총합이시다. 열매를 보아 나무를 알 듯,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이기 때문이다.
�부부 ‘사이’에 성령님을 모셔라. 그분을 통해 서로를 바라보고, 그분을 통해 서로에게 말을 건네고, 그분을 통해 모든 문제를 해결하라. 그분의 중재를 통해 ‘사이’를 원활하게 하라. 그분의 중재로 부부 사이를 채워라. 
 
르우엘 L. 하우의 말을 빌자면, "사람은 누구나 잠재적인 대립 감정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도 이러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뜨거운 사이일지라도, 잠재적인 대립 감정이 그 ‘사이’에 도사리고 있다는 말이다. 화평과 오래참음과 온유와 절제의 성령님을 사이에 두고 살면 우리는 행복한 부부 사이가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상대에 대한 자비심 즉 측은지심을 선사하시는 성령 충만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소중한 신앙의 일이라 생각한다.
 
(김성찬의 영혼일기 1250: 행복한 부부 '사이' 만들기 2013.04.05(금))
******************************
 
10. 결어
 
아가페 사랑이 하나님의 것임으로 우리에게 없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나 거저 주시는 그 사랑의 권능을 내 것 삼을 수 있는, 은혜가 있다. 
 
단지 믿음으로, 
오직 믿음으로,
나를 위해 보내신 아멘으로 성령님을 모시어 
전적으로 의지하라.
 
그 아가페 사랑이란
갈빗대 하나 잃고 동반자(사랑의 대상)를
발견하는 것이다.
 
시소 타듯, 시소 한 가운데 성령님을 모시고 배려의 미학을 강구하자. 갈빗뼈 하나 내주고 이브를 창조해 내셨듯이, 우리도 갈빗뼈 하나 내주는 창조적 사랑을 베풀자. 
 
하여, 
그 사랑의 행위를 통해 
서로가 사랑의 짝, 동반자가 되도록 하자.
 
아가페 사랑의 열매를 맺는 
새 창조의 역사가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우리네 삶의 현장에서 나타나기를 
소망한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73 2623: 더 조이 유니언 창립총회 개회사 김성찬 2017.12.17 30
172 2584: 축사 서교련 체육대회 김성찬 2017.11.07 97
171 2572: 추석명절설교 극동방송 ‘산 자들을 위한 순수한 기쁨의 명절’ 김성찬 2017.10.01 330
170 2418: 격려사 평신도부 김성찬 2017.09.01 21
169 2407: 축사 새창조 16/08/28 김성찬 2017.08.29 29
168 2391: 축사 금호교회 16:08/21 김성찬 2017.08.21 20
167 2352: 빛고을 목회자, 노용찬 목사의 설교집 김성찬 2017.08.05 87
166 2332: about 「중앙시장론(論)」 김성찬 2017.07.29 23
165 2307: 한국성결교회 기원에 대한 논란을 보며 김성찬 2017.07.17 75
» 2283: 특강 Creating Love 김성찬 2017.07.04 52
163 2270: 격려사 가락로고스교회 설립 김성찬 2017.06.26 204
162 2264: 청학교회 담임목사 이취임 • 선교사 파송 및 임직예배16/06/19 김성찬 2017.06.20 63
161 2261: 주례사 16/06/18 김성찬 2017.06.19 42
160 2244: 축사 정릉교회 16/06/11 김성찬 2017.06.13 119
159 2243: 헌시 손길 김성찬 2017.06.13 40
158 2180: 횃불 극동방송 설교 아버지 하나님 김성찬 2017.03.31 59
157 2259: 몸의 부활 16/05/06 김성찬 2017.05.06 84
156 2225: 왼손잡이** 사사 에훗 양동춘 목사는 김성찬 2017.04.22 213
155 2215: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하는 기도문1 16/04:17 김성찬 2017.04.17 99
154 1736: 도미일지 1. (2015.05.12(화)~29(금)) file 김성찬 2015.06.03 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