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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626:(강림절)왜 다윗인가? 2(주일설교)

2010.12.19 22:10

김성찬 조회 수:960 추천:47

영혼일기 626: 왜 다윗인가? 2 (주일 설교)
2010.12.19(주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世系:족보)라.-마태복음 1장 1절.

다윗 왕의 후손이신 예수가 메시아(구세주)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왜 다윗의 자손에서 구세주가 나왔을까요? 물론 다윗 가문을 택하신 이유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의 이유를 우리는 다 알 수도, 알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족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다윗의 가문을 택하신, 그 선택에 합한 이유 중 일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과 상황에 필요한 교훈을 그 족보 이야기 속에서 끌어 낼 수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족보는 이렇습니다. 10대조 유다-다말(유다의 며느리) … 현조(오대조) 나손. 고조부 살몬-고조모 라합(가나안 여인;기생), 증조부 보아스-증조모 룻(모압 여인), 조부 오벳, 부 이새, 아들 다윗.


이 족보 이야기는 우리에게 유다지파로 대변되는 애족(가족, 민족사랑)과 애린(이웃, 이방인 사랑)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는 지난 주일 우리가 함께 들은 말씀입니다.

오늘은 유다 지파와 다윗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이어지는 중심에 있는 ‘성전’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유다지파는 애족, 애린하는 지파였습니다. 그러나 유다지파는 무엇보다도 ‘성전 중심주의로 산’ 지파였습니다. 성막 보호(민10:14), 영적 전투(삿1:2), 성전 복구(느13:10-14)등 영적인 일에 유다지파가 늘 선봉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후손 다윗은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특별한 사람(시132:1-5)이었습니다. 그래서 성전 되신 예수 그리스도(요2:21)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Ⅰ. 유다지파는 성전 중심주의 신앙관으로 산 지파였습니다.

1. 성막 보호
(민10:14)에 앞장 선 지파였습니다.

출애굽기가 애굽 탈출에서부터 시내 산에 이르는 과정을, 레위기가 시내 산에서 1년간 머물면서 받은 율법의 기록인 데 반하여, 민수기서는 시내 산에서부터 가나안 건너편 모압 평야에 이르는 과정을 기록한 책입니다. 민수기는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별로 싸움에 나갈만한 이십 세 이상 된 남자의 수를 계수한, 첫 번째 인구조사로 시작됩니다. 이어 각 지파의 진과 행군 순서를 정합니다. 성막 주위에 백성을 배치시킨 사실은 조직적인 행위로써 하나님을 섬겨야 함을 교훈합니다. 각 지파의 진과 행군 순서는 민수기 2장에 열거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 이스라엘 자손은 각각 자기의 진영의 군기와 자기의 조상의 가문의 기호 곁에 진을 치되 회막을 향하여 사방으로 치라 / 동방 해 돋는 쪽에 진 칠 자는 그 진영별로 유다의 진영의 군기에 속한 자라(민2:1-3a)."

'동방 해 돋는 쪽(3)'이란 성막 앞 방향(행진 방향)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영광되고 아름다운 자리임을 암시합니다. 이곳에 위치한 지파들은 유다의 기 아래 모인 자들로서 행군할 때도 제 일대로 진행하는 영예를 차지했습니다. 유다지파가 성막을 보호하는 일에 선봉장이 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이는 유다 지파를 향한 야곱의 예언의 성취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규(圭/珪:옥으로 만든 홀(笏))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매사에 우연이란 없습니다. 이 복종하리로다(창49:10).” 이 예언의 말씀은 다윗 때에 꽃을 피워 예수를 통해 완성되었습니다. 이처럼 성막 보호 선봉장의 위치에 유다지파가 선 것이 우연한 일이 아니듯, 매사에 우연이란 없습니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만이 있을 뿐입니다.

유다지파는 성막보호에 선봉장이었습니다. 성막은 오늘의 성전과 똑같지 않습니다. 성막은 광야를 위해 설계되었고 본성에 있어서 일시적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 너는 첫째 달 초하루에 성막 곧 회막을 세우고(출40:1-2).” 그러나 성전은 왕국을 위해 설계되었고 본성에 있어서 영원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지 사백팔십 년이요 솔로몬이 이스라엘 왕이 된 지 사 년 시브월 곧 둘째 달에 솔로몬이 여호와를 위하여 성전 건축하기를 시작하였더라 / 솔로몬 왕이 여호와를 위하여 건축한 성전은 (왕상 6:1-2a).”

그러나 하나님의 거처인 성막은 이후 성전으로 대치됐습니다. 따라서 성막은 성전과 연합되었습니다. 열왕기 상 8장(1-11)과 역대 하 5장(5:2-6:2)에 ‘언약궤를 성전으로 옮긴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궤와 회막과 성막 안의 모든 거룩한 기구들을 메고 올라가되 제사장과 레위 사람이 그것들을 메고 올라가매 / 솔로몬 왕과 그 앞에 모인 이스라엘 회중이 그와 함께 그 궤 앞에 있어 양과 소로 제사를 지냈으니 그 수가 많아 기록할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었더라(왕상 8:4-5).”

참고로 성막(聖幕)과 회막(會幕)에는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출애굽기 40장은 성막을 말합니다. 그러나 출애굽기에 이은 레위기 1장 1절은 회막을 말합니다. 이들 두 용어는 같은 대상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굳이 문자적으로 구분하자면, 성막은 하나님이 거주하는 장소라는 의미의 용어이고, 회막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구속하신 백성을 만나는 장소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성막과 회막이란 같은 대상을 가리키는 용어로, 하나님께서 임재하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뜻을 계시하시는 거룩한 장소이며, 동시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부르시고 만나시는 곳입니다. 오늘날 교회도 성막이며, 동시에 회막입니다.

유다지파는 성막보호의 선봉장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있었지만, 그들은 그 무엇보다도 성막을 보호하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그러했기에 하나님께서는 유다지파의 후손 다윗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를 이어가는 교량 되게 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유다지파처럼 교회를 위하는 마음을 주심은, 주께서 예비하신 복을 받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입니다. 성전 마루를, 강단을 쓸고 닦는 우리 신앙의 선배들의 충성과 헌신이 오늘 한국 교회에 임한 부흥과 복락을 가능케 했습니다.

2. 유다지파는 성전회복에
앞장 선 지파였습니다.

출애굽 광야 시절에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였던 성막은 솔로몬 때에 성전으로 대치됩니다. 그러나 솔로몬의 성전은 B.C 586년 바벨론에 의해 폐허가 됩니다. 허나 그 강력한 황금의 제국 바벨론도 주전 B.C 539년 바사(Persia)에 의해 패망했습니다. 하여 바사(Persia) 고레스 왕은 B.C 538년에 바벨론으로 끌려갔던 유대인들은 고국으로의 귀환을 허락합니다. 더불어 성전을 재건해도 좋다는 칙령도 함께 주어졌습니다. 하여 다윗 왕의 직계인 스룹바벨의 영도 하에 제 1차 포로 귀환이 이루어집니다. 스룹바벨은 제2성전이라 불리우는 스룹바벨 성전을 폐허가 된 솔로몬 성전의 터에 세웁니다. 그러나 성전재건을 순탄치가 않았습니다. 성전재건은 약 15년간 중단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학개, 스가랴의 권고와 스룹바벨의 영도하에 성전재건은 재개되었고, 드디어 주전(B.C) 515년 경에 제2성전이 완공되었습니다. 흔히들 바벨론 포로기간을 70년이라고 셈하는 것은, 유대들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던 586년부터 귀환 후, 제 2성전, 스룹바벨의 성전이 재건된 주전(B.C) 515년까지의 70년을 가리킵니다. 유대인들은 성전 재건을 진정한 해방으로 간주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성전이 다시 폐허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외부의 침략에 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내적 부패 때문이었습니다. 스룹바벨의 1차 귀환(주전 538년), 2차 에스라가 이끈 포로귀환(주전 457년)에 이어, 3차 포로 귀환을 이끈 느헤미야는 스룹바벨보다 무려 94년이 지난 주전(B.C) 444년 경에 고국에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에 눈에 비친 제 2성전은 제사장 엘리아십에 의해 더럽혀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앞장 서야 할 신분에 있는 제사장이 이방인(도비야)을 성전에 끌어들여 성전을 더럽히는 일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이르러서야 엘리아십이 도비야를 위하여 하나님의 전 뜰에 방을 만든 악한 일을 안지라 / 내가 심히 근심하여 도비야의 세간을 그 방 밖으로 다 내어 던지고 / 명령하여 그 방을 정결하게 하고 하나님의 전의 그릇과 소제물과 유향을 다시 그리로 들여놓았느니라 (느13:7-9).”

느헤미야 13장은 부패한 성전을 정화하고, 백성들의 부흥운동을 이끈 느헤미야의 개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과 같이 성전이 더럽혀져 있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성전을 지키는 직무를 맡은 레위인들이 성전 직무를 저버리고 각자의 생업을 찾아 떠나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이 영적으로 폐허가 되어버렸습니다.

느헤미야는 “내가 또 알아본즉 레위 사람들이 받을 몫을 주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직무를 행하는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각각 자기 밭으로 도망하였기로(느13:10).”라는 피폐한 영적 현실에 탄식해 마지않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레위지파에겐 땅을 기업으로 주지를 않았습니다. 성전 직무에만 전념토록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11지파 거둬들인 소출 중에 하나님께 드린 십일조가 저들의 양식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힘들고, 어렵다고 십일조를 안 드려 성전의 곳간이 텅 비어 버렸습니다. 그러자 레위인들 조차 궁핍을 안내하지 못하고, 성전을 떠나버렸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인간들의 탐욕과 어리석음에 의해 버린바 된 하나님을 폐허를 바로세우기 위해, 부과 권력을 지닌 민장들을 꾸짖고, 레위인들은 다시 불러 모아 제 자리에 세웁니다.(11절) 그리곤 하나님의 성전 곳간을 즉시 채우라고 이스라엘 각 지파에 명령을 내립니다.

그런데 바로 그 명령에 제일 먼저 순종한 지파가 유다지파였습니다. “이에 온 유다가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가져다가 곳간에 들이므로(12절).” 그렇습니다. 유다지파는 십일조를 바치는 힘든 일에 있어서도 선봉에 선 지파였습니다. 성전 회복은 유다지파의 즉각적인 순종으로 가능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후손들에게 대를 이어 성전을 세우게 하셨고, 부강한 나라를 통치하는 왕권을 허락하셨습니다.

이같은 유다지파의 즉각적인 반응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는 말씀을 이루는 순종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재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마 6:21).” “하나님과 재물을 같이 섬길 수 없다(마 6:24).” 그렇습니다. 교회를 사랑한다는 것은, 온 맘과 물질을 드리는 일에 인색하지 않는 일입니다. 헌신의 완성은 호주머니에 있습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치는 ♫ 물질적 청지기가 교회를 든든하게 합니다. 그의 기업이 복을 받고, 그의 자녀‧손들을 하늘 복락으로 이끕니다.

이새의 아들 다윗을 보니 내 맘에 합한 자라는 말씀 속에는, 이상과 같은 조상들의 빼어 난 성막보호와 성전회복의 헌신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선조들의 성전 중심주의 신앙관은 다윗 대에 이르러 꽃을 피웁니다.

Ⅱ. 유다 지파의 후손 다윗은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에게는 조상들의 핏속에 흐르는 성전건축의 꿈이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주위의 모든 원수를 무찌르사 왕으로 궁에 평안히 살게 하신 때에 / 왕이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볼지어다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에 있도다(삼하7:1-2).” 그런데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으셨습니다. “다윗이 솔로몬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나는 내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었으나 /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피를 심히 많이 흘렸고 크게 전쟁하였느니라 네가 내 앞에서 땅에 피를 많이 흘렸은즉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리라(대상22:8;대상28:3).”

그러나 사무엘하 7장4-17절에 나타난 하나님과 다윗의 언약 체결 내용에 의하면, 단순히 다윗이 이상과 같은 이유로 성전건축의 부적격자이기에 성전건축의 꿈이 거절된 것이 아님을 볼 수 있습니다. 12-16절의 언약의 말씀은 다윗이 어떤 의미에서 성전 건축 보다 더 중요한 ‘신성한 언약’을 체결하는 당사자였기 때문이라고 암시해 줍니다.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13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 14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15 내가 네 앞에서 물러나게 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처럼 그에게서 빼앗지는 아니하리라 /16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17 나단이 이 모든 말씀들과 이 모든 계시대로 다윗에게 말하니라(삼하7:12-17).”

다윗에게 있어 소중한 성전 건축의 꿈은 대를 넘겨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전을 심히 사모합니다.

 

“여호와여 다윗을 위하여 그의 모든 겸손을 기억 하소서 /2 그가 여호와께 맹세하며 야곱의 전능자에게 서원하기를 /3 내가 내 장막 집에 들어가지 아니하며 내 침상에 오르지 아니하고 /4 내 눈으로 잠들게 하지 아니하며 내 눈꺼풀로 졸게 하지 아니하기를 /5 여호와의 처소 곧 야곱의 전능자의 성막을 발견하기까지 하리라 하였나이다(시 132: 1-5).”

그리고 낙담하지 않습니다. 성전 건축의 소원이 자신의 대에 이룰 수 없음을 통보받았어도, 그는
사무엘하 7장4-17절에 나타난 하나님과 다윗 사이에 체결된 ‘신성한 언약’을 꿈의 실현보다 더 소중히 여깁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후대에게 맡기신 성전 건축을 위해 그 준비에 최선을 다합니다.

“2
다윗이 명령하여 이스라엘 땅에 거류하는 이방 사람을 모으고 석수를 시켜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할 돌을 다듬게 하고 /3 다윗이 또 문짝 못과 거멀 못에 쓸 철을 많이 준비하고 또 무게를 달 수 없을 만큼 심히 많은 놋을 준비하고 /4 또 백향목을 무수히 준비하였으니 이는 시돈 사람과 두로 사람이 백향목을 다윗에게로 많이 수운하여 왔음이라 /5 다윗이 이르되 내 아들 솔로몬은 어리고 미숙하고 여호와를 위하여 건축할 성전은 극히 웅장하여 만국에 명성과 영광이 있게 하여야 할지라 그러므로 내가 이제 그것을 위하여 준비하리라 하고 다윗이 죽기 전에 많이 준비하였더라(대상 22:1-6).”(대상28:1-2)

그는 교만으로 인한 범죄로 곤욕을 치룬 후, 하나님의 사자에게 지시를 받아 희생 제사를 드린 오르난의 타작마당이 여호와의 전이요, 이스라엘의 번제단임을 발견합니다.(대상21:18-22:1)
다윗의 성전은 가시적 건물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의 성전은 속죄함, 사모함이라는 비가시적 참 제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신성한 언약을 신실한 자세로 기다리며, 준비함에 있었습니다. 다윗의 성전은 준비된 기적이었습니다. 유다 지파의 후손 다윗은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했기에
시편 63편에 의하면, 아들 압살롬의 모반으로 유다 광야로 쫓겨나갔을 때에도, 성전을 간절히 사모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2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시63:1-2).”

성전과 무관한 다윗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는 시편 84편에서 ‘성전을 사모하는 자의 행복’을 읊고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2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3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4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셀라) /

5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6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 /7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8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 (셀라) /9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께서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보옵소서 /

10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11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12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시84:1-12절).”

다윗의 이 놀라운 성전 사랑의 고백을 다시 한 번 더 들어 보십시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10)

나도 고백하고 싶습니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의 문지기도 아닌 막일꾼(느디님(히)nethinim)으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註) 느디님((히)nethinim) 성막(聖幕)과 성전(聖殿)에서 땔감과 물을 운반하는 등 잡일을 맡아보던 계급.)

신성한 언약에 굳게 선 다윗의 성전 사랑은 아들 솔로몬에 의해 가시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마1:1:롬1:3)를 열었습니다. 그리하여 성전 되신 예수 그리스도(요2:21)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 /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사도행전 13:22-23).

Ⅲ.성전 되신 예수 그리스도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성전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하나님의 임재 그 자체입니다. 메시아는 육체적인 면에서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습니다. 다윗 왕국으로 예표 된 메시아 왕국은 예수께서 오심으로 실현되었습니다.

성전청결 사건에서 우리는 성전 되신 예수를 통해 이루어진 다윗의 고백을 봅니다.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훼방하는 훼방이 내게 미쳤나이다(시69:9).” 다윗의 주의 집을 위하는 열정은 일생동안 그의 삶을 지배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궤를 메고 미친 듯이 기뻐 춤추며 시온 산 위에 하나님의 장막을 세운 것이나(삼하6:12-19),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고 싶어 한 것이나(삼하7:2;시132:2-5), 성전 건축을 위해 철저한 준비를 한 것(대상29:1-5) 등등이 바로 이 거룩한 열정의 소산이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더하여 다윗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전이신 자신의 몸을 깨뜨려,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셨습니다.

“1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20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21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2:19-21).”

그런데 그 말씀이 이루어졌습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증거 합니다. “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요2:22).”

예수는 성전입니다. 그리고 성전은 그리스도의 유일한 몸인 교회를 예표합니다. 성전은 이 우주에서 하나님의 유일한 건축물로서, 먼저는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다음으로 교회를 예표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마12:6).” 교회는 지구촌 곳곳에 서 있지만, 교회의 영적 실재는 여전히 한 몸 이며, 이 몸은 유일하고 영원합니다.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엡 1:22-23).”

Ⅳ. 성령의 전인 우리
또한 예수를 주로 모신 사람도 성전입니다.

성전이신 예수께서 자신의 몸을 깨뜨려 우리를 사셨습니다.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고전6:19b-20a)." “산 것이 되었다”의 원형 <아고라조>는 ‘구속하다’ ‘희생을 치르고 어떤 사람을 풀어주다’는 뜻을 갖습니다. 이 단어는 노예 매매와 관련하여, 노예로 있던 자를 값을 주고 사서 풀어주어 자유를 얻게 하는 것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본 절에서는 부정과거 수동태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과거에 단회적으로 발생한 사건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여기 ‘값으로 산 것이 되었다’는 표현은 죄의 노예가 된 인류를 위해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뜻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즉, 우리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을 통하여 죄와 사탄의 노예 상태에서 자유롭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전이신 예수께서 자신의 옥체를 깨뜨려 우리는 죄에서 해방시키시고 우리를 성전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는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10).” 

유다지파의 성전보호, 성전회복 그리고 그 후손 다윗의 성전 사랑은 에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습니다. 왜 다윗의 후손인가? 우리의 구속사에 나타난 성전중심주의는 이렇게 메시아의 영광으로 대미를 장식합니다. 그러나 아직 아닙니다. 우리는 그의 피 값으로 속량 받아 성령의 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아닌(not yet)' 우리는 성전을 보호하고, 회복하고, 사모할 뿐만 아니라, 성령의 전으로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롬12:1).”는 말씀의 권면 앞에 똑바로 서야합니다. “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3:16-17).” 이 무서운 말씀의 경고를 외면하지 맙시다.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행 13:22)”신 것처럼, 우리도 성전중심주의로 살고, 거룩한 성령의 전되어 주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됩시다. 그리하여 주님 오실 그날까지 든든히 서 나아가는 교회와 성도가 되도록 합시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2:21-22).”
성전의 막일꾼(느디님((히)nethinim)으로라도 최선 다해 충성함으로, 장차 새 하늘과 새 땅의 주인이 됩시다.

“11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12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13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3: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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