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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여 우리의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마태복음 20장 33절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그의 단편 소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사람에게 허락 되지 않는 것, 즉, 사람이 자각하지 못하는 자신의 필요,를 독자에게 직시하게 하고 있다. 사람이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눈 먼 존재라는 말이다.

 

하나님께 벌을 받아 인간계(人間界)로 내쫓긴 천사 미하일은, 1년을 신어도 닳아지지 않을 튼튼한 구두를 만들어 달라는 귀족 신사의 주문을 받고서, 잠깐 미소를 짓더니, 구두대신 가죽 슬리퍼를 만들어 버린다. 구두 가게 쥔장 시몬이 뒤늦게 그 사태를 알아채곤, 크게 나무라는 순간, 그 귀족 신사의 하인이 황급히 가게로 뛰어 들어온다. 하인은 주인어른이 구두 주문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마차에서 급사했다고 말한 후, 죽은 주인에게 구두 대신 수의로 신겨 줄 슬리퍼로 만들어 달라고 주문한다.  

 

미하일은 1년이나 신을 수 있는 구두를 꼼꼼하게 주문하며, 천년만년 살 것처럼 거드름을 피우던 귀족 신사 뒤편에, 죽음의 사신이 미소 짓고 있음을 목격했기 때문에, 천사 미하일은 미소를 지었고, 구두 대신 수의용 슬리퍼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알아오라고 한, ‘사람에게 허락되지 아니한 것’을 그 사건 속에서 발견했기에, 홀로 미소를 지었던 것이다.

 

그렇다, 사람은 자신에게 진정으로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지 못하는 존재이다.

 

은과 금을 구걸했던 성전 미문에 나아와 앉아 있던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사람이나, 타인에 대한 원망만을 앞세웠던 베데스다 못가 삼십 팔년 된 병자가 그들이다. 그들은 정작 자신에게 본질적으로 필요한 것이 ‘일어나 걷는 것’이었음을 잊어버렸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람에게는  자신들의 본질적 필요를 채워 줄 권능이 없음을, 살아오면서 몸으로 절절히 체득했기 때문이다. 하여, 그들은 체념으로 일관한 생을 연명했고, 나중에는 자신들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망각해 버린 허망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단지, 그들만 일까? 

아니다. 그들은 눈 먼 인간 존재의 표상(表象)이다.   

바로 너와 나, 우리 모두 그들과 동일한 존재다. 

 

그런데, 놀랍게도 자신들의 필요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이들이 성경에 등장한다. 

 

마태복음 20장이다. 

 

29 그들이 여리고에서 떠나 갈 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따르더라 / 30 맹인 두 사람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 31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  

 

32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들을 불러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여기에 등장한 맹인들은 정확하게 자신들에게 본질적으로 필요한 것을 예수께 원했다.

 

33 이르되 주여 우리의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어떻게 그들은 그런 본질적 요구를 예수께 할 수 있었을까? 

 

그 맹인들은 육(肉)적으로 눈 먼 자였으나, 그들은 영적으로는 깨어있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인 자신들의 눈을 밝혀주실 분은, 오직 본질적 속성(essential character, 아브라함 카이퍼)이 ‘긍휼’이신 아버지 하나님 밖에 없음을 알았다. 

 

그들은 다윗의 자손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하나님이심을 믿었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1:7)

 

너희 믿음의 ‘확실함’이 눈 먼 자들의 몫이었다.

 

여기서, ‘확실함’(δοκίμιον)은 영어로 말하면, genuineness을 뜻한다. 이는 ‘확실하고 진정한 믿음’을 의미한다(7절). 그래서 믿음의 확실함은 믿음의 진정성을 가리킨다. 이 단어는 원래 ‘시험’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시련을 통해 믿음의 확실함이 드러난다.

 

그들은 숱한 희망 고문을 겪어 왔을 거다. 

우리는 그 구체적인 사례를 마가복음 5장에 나오는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 이야기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25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26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전 재산을 허비하게 한 많은 의사에게서 받은 희망 고문. 그 헛믿음을 투자해오다 다 망하게 된 시련 끝에 그들은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었다.  

 

소문, 기쁜 소식, 복음을 듣게 되었다.    

 

큰 무리가 따르거늘 예수께서 거기서 그들의 병을 고치시더라(마19:2)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17:20) 

 

그리하여, ‘확실한 믿음’으로, 본질적 속성(essential character)이 ‘긍휼’이신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이신 나사렛 예수 앞으로 나아갔다. 

 

27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28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마가복음 5장)

 

긍휼,  

불쌍히 여김을 받기만 하면, 본질적 필요를 충족시켜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목청 높여, 외려 눈 먼자들이 외쳤다.  

 

다시 마태복음 20장이다. 

 

30 맹인 두 사람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31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무리가 태클을 걸면 걸수록 더욱더 소리를 높여 지르며,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주님의 긍휼을 구했다.

 

긍휼(히 ‘헤세드(חטך), 헬 ‘엘레오스(ἔλεος))이란, 불쌍히 여기심,이다. 다시 말해, ‘긍휼’이란, 자신이나 타자의 현실을 올바로 직시를 하고, 그 상태를 함께 슬퍼해 주며 애통해 하고, 자비와 은혜의 필연성을 공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수도사들의 일평생 하나님께 드린 한 가지 기도가 “주 예수님, 자비(헤세드)를 베푸소서”이다. 하나님의 긍휼 없는, 그 말씀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도 있을 수 없다.

 

더 감사한 것은,  

우리 하나님은 긍휼이 ‘풍성’하신 아버지시라는데 있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벧전1:3)

 

긍휼에 풍성하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 풍성하신 긍휼로 그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내어주시어 우리의 죄를 속량(贖良)하셨고, 다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우리에게 영생의 길을 열어주심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다. 새 생명을 소유하게 하셨고, 영생을 얻게 하셨다.

 

그 구체적인 설명이 사도 바울에 의해 에베소서 2장에 기록되어 있다.

 

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긍휼의 실행 파일이 은혜다. 우리가 받은바 은혜다. 그 은혜는 우리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닌,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인 구원이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기에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구원을 우리가 그 은혜로 받은 자 되었다. 그렇다. 은혜란,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인 우리를 구원해 주실 분은 본질적 속성(essential character)이 ‘긍휼’이신 아버지 하나님 밖에 없다.

 

긍휼의 극치, 온전히 불붙듯 한 아버지 하나님의 긍휼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호11:8) 

 

(아드마, 스보임 - 싯딤 계곡에 있었던 성읍들 가운데 하나로서, 창 10:19에는 가나안의 지경을 묘사하면서 언급되고 있다. 그 곳의 왕은 시납이었는데, 애초에는 그돌라오멜에게 예속된 왕이었으나, 소돔•고모라•스보임 등의 왕들과 연합하여 그에게 반기를 들었었다(8절).

그 성읍의 타락상은 도를 지나쳤기 때문에 그 계곡의 다른 성읍들과 함께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하였다(창19:24-29에는 소돔과 고모라만 기록되고 있지만, 신 29:23에는 아드마와 스보임이 첨가되고 있다).여기, 호 11:8에서는 돌아서기를 거절하고 반항하는 이스라엘에 대한 경고로써 아드마와 스보임을 언급하고 있다. (- 싯딤 계곡))

 

다시, 마태복음 20장이다. 

결론이다. 

 

34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 

 

그 긍휼로 두 맹인은 육체적인 눈을 떴다.

더 나아가, 예수를 따르는 영에 속한 사람이 되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눅17:17)  

두 맹인은, 불치병을 고침 받고서도, 예수를 따르지 않았던, 아홉 명의 한센 병 환자들과 전혀 달랐다.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마20:34b)  

예수를 따름으로, 영육간의 구원, 그들은 완전한 전인 구원을 이루었다.  

 

물어보자. 

 

작금, 내 기도의 제목을 주께서 긍휼히 여겨 주시겠는가? 

 

무엇이 나의 본질적 필요인가?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주께서 나에게 되물으실 만한 본질적인 필요를 주께 바라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막5:30)

 

2019.10.13.(주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