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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52: 김대중 자서전

2020.02.03 19:46

관리자 조회 수:37

[김대중 자서전]

 

감히 제가 이 책을 소개할 자격이 있는지, 어중간한 소개로 인해 혹시 김대중 대통령님의 명예나 업적을 충분히 알리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염려부터 앞서는, 자서전의 최고봉에 있는 저서입니다.

 

타고 난 혜안을 가진 지도자는 어떤 사람인가, 불굴의 회복탄력성을 보여주는 지도자는 어떤 사람인가, 진심으로 국가와 민족, 그리고 국민을 걱정하는 지도자는 어떤 사람인가, 그리고 국민의 저력과 장점을 꼽아 북돋워줄 줄 아는 지도자는 어떤 사람인가를 보여주는 저서이기도 합니다. 

 

빌 클린턴 대통령의 자서전 ‘마이 라이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자서전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 ‘담대한 희망’, 케네디 대통령의 유일한 저서 ‘용감한 사람들’, 리콴유 싱가폴 총리의 자서전 ‘싱가폴 이야기’, ‘삼류 국가에서 일류로’와 비교해 보아도 디테일 면에서나, 사료로 확인되는 그 순간 순간의 의견이 주는 혜안 측면에서나, 국민을 이용의 대상이 아니라 보살핌의 대상으로 여기는 따뜻한 마음 면에서나, 정치를 출세의 수단이 아닌, 봉사의 수단으로 간주하는 자세 면에서나 단연 돋보이는 저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님의 자전적 에세이 ‘여보 나 좀 도와줘’가 짧고, 솔직 담백하고, 군더더기 없는 진솔한 책이고, 문재인 대통령님의 저서 ‘운명’. ‘12. 19. 끝이 시작이다‘가 바둑 후 복기하듯 상세하고 겸허하게 서술한 저서인 데 반해 이 책은 해방 이후 국내 헌정사 전체를, 김 대통령님이 주인공인 장편 대하드라마처럼 펼쳐내는, 긴장감 넘치는 작품입니다. 또 곳곳에 귀여운(?)자기 자랑과 유머 감각이 숨김 없이 나타나는 재미있는 저서이기도 합니다.   

 

다 읽고 나면 ‘인동초’라는 한 단어가 계속 마음에 머무르면서 마음 한 켠이 먹먹해지기도 합니다.

 

전체적으로는 1권 700쪽, 2권 650쪽 가량인 두 권으로 되어 있는데, 1권에서는 일제시대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난 1924년도부터 대통령으로 당선된 1997년까지의 이야기가 담겨 있고, 2권에서는 대통령 당선 직후부터 노무현 대통령님의 서거시의 비통한 심정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완성은 김 대통령님의 건강 문제로, 김 대통령님의 구술하고, 한승헌 전 감사원장님이 편찬위원이 되어 전체적으로 감독하고, 여러 분들이 대통령님 구술 녹취록과 김 대통령님의 종전 저서, 발표문, 기고문 등을 참조하고, 수시로 재가를 받아 이루어졌습니다.  

 

2권의 마지막 부분은 대통령님께서 후대의 지도자들과 국민들에게 주시는 당부 말씀입니다.

 

우리나라 헌정사에서 각 대통령과 정치인들은 모두 공과와 명암이 있을 수 있고, 어떤 면을 보느냐에 따라 영웅이 되기도 하고, 악당이 되기도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적으로는, 남에게 해를 주지 않는 한 최대한의 자유 보장, 공인의식(선공후사, 견리사의)을 비교적 가장 높은 가치로 여기는 기준을 가지고 있어, 이 기준에 위배되는 행위를 많이 한 분들에 대해서는 ‘님’자나 직책명을 간혹 생략하여 서술하게 됩니다만, 그것이 그 분들의 공적(박정희 대통령의 경우, 비록 본래 김대중 대통령님의 아이디어였지만,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지속적으로 추진한 결과 고도성장을 이룩한 공이 있고, 전두환 대통령의 경우, 비록 기업 운영자들과 그 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을 탄압한 결과였지만, 재임기간 중 물가를 안정적으로 유지한 공이 있으며, 김영삼 대통령의 경우 하나회 척결 등 군부독재를 종식시키고, 금융실명제를 도입하여 금융거래 투명화의 기초를 닦고, OECD 가입으로 우리의 세계적 위치를 각인시켜 준 공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당선을 위해 삼당통합 형태로 군부독재 정권과 거래를 함으로써 대통령 선거에서 정치적 기회주의자의 등장이 가능하도록 문을 연 점과 선거운동 과정에서 ‘우리가 남이가’를 사용함으로써 국민을 지역적으로 분열시키는 방법으로 각각 선공후사 정신을 위배한 것으로 인해 약간 감점이 있습니다.)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미리 알려드리는 것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자서전에 나타난 김대중 대통령님 삶의 궤적은 크게 다음과 같습니다.

 

1. 이승만 자유당 시절: 정계입문

김대중 대통령님은 일제시대 말기에 태어나서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6.25.전쟁을 겪으면서도 성공한 해운업 사업가로 성장하고, 이후 목포일보사를 인수하면서 언론사 경영자로 이름을 떨치다가 이승만 정부 시절 야당 민의원 후보로 출마하면서 정치인으로 변신합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부정선거와 독재를 거듭하다가 결국 1960. 4. 19.혁명으로 퇴진하여 미국 망명길에 오르자 그동안 억눌렸던 민의가 한꺼번에 폭발하여 당시 야당이었던 민주당이 양원 모두 대승을 거두고, 김 대통령님은 장면 총리로부터 민주당의 대변인으로 지명됩니다. 

 

그러나, 그 무렵 본래 야당이었다가 집권당이 된 민주당은 윤보선파가 신민당을 만들어서 분당함으로써 분열되고, 민주당 내 소장파인 ‘신풍회’도 따로 사단을 만들어 정책 대결이 아닌 자리 나눠먹기를 요구하고, 언론 또한 독재정부 시절 침묵하던 부끄러움을 반성하는 대신 민주주의 정부를 신나게 비판하는 데에 여념이 없습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 당시 김 대통령님은 ‘이승만 시절 야당의 틈새를 이용해 정부가 조봉암(당시 대통령 후보)에게 내란 혐의를 씌워 사형에 처했는데도, 역사로부터  배우지 못하고 순망치한을 되풀이하면 다시 독재정부 설립에 빌미를 주게 된다’고 끊임없이 경고하고, 1961. 5. 14. 보궐선거에서 민의원에 당선되지만, 바로 이틀 뒤인 5. 16. 육군 소장이던 박정희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정부를 폭력으로 전복시키게 됩니다(1권 137쪽).

 

이 부분은, 노무현 대통령님 당선 직후부터 속칭 ‘진보인사, 진보언론’들이 오히려 더 앞장서서 사소한 일도 트집잡아 정책을 추진하지 못하도록 하고, 결국 이후 10년간 인권후퇴, 정부의 부패 증가, 언론의 투명성과 신뢰도 축소, 언론탄압 등 준 독재 상태가 초래된 가까운 역사를 연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2. 박정희 공화당 : 거물 정치인으로의 성장 및 수년간의 수감과 두 차례의 암살 위기

 

박정희의 쿠데타 직후 김 대통령님의 의견은, 대한민국 군대의 군사작전권은 6.25. 휴전 협약에 따라 유엔사령부가 가지고 있으므로, 장면 총리는 일단 미국 대사관으로 피신하여 주한미군으로 하여금 박 소장의 군사작전을 소탕해 줄 것을 요청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당시 장면 총리는 수녀원으로 피신하여 두문불출했고, 윤보선 대통령은 미군의 개입이 내정간섭이라면서 맥그루거 유엔 사령관과 마셜 그린 미 대사서리의 군사적 원조 제의를 거부하고 박정희와 거래하여 박정희의 쿠데타를 승인함으로써 우리 나라가 다시 긴 독재의 터널에 갇히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1권 141쪽).

 

약 10개월간 윤보선 대통령을 허수아비로 내세워 계엄 하에서 일체의 정치 활동을 금지했던 박정희는 1962. 3. 민정이양을 4년 연장하고 군정을 계속 할 태세를 보였으나, 당시 미 대통령이던 케네디로부터 강력한 항의 서면을 받고 1962. 11. 부득이하게 대통령 선거와 총선거를 실시했고, 박정희는 대통령으로, 김 대통령님은 국회의원으로 당선됩니다.

 

당선 직후 박정희는 한일협약 체결을 서두르는데, 이에 대한 김 대통령님의 의견은, 최대한 현명하고 투명하게 협상하여 충분히 보상을 받아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윤보선을 위시한 야당은 극렬하게  ‘대책 없는 반대’를 주장하면서 협상자는 매국노라는 취지로 전국적 시위를 벌임으로써 박정희 정부가 독재정부를 강화하고, 일본으로부터 별도의 뒷돈을 받는 빌미를 제공하는 결과를 초래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승만 정부에서 요구한 20억달러, 장면 정부에서 요구한 28억 5,000만 달러에서 무려 20여 억 달러나 깎아 준 3억 달러로 합의를 종결하였는데, 이와 같이 국민적 공감대를 얻지 못하는 ‘반대를 위한 반대’는 스스로도 감당하지 못하는 최악의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었습니다(1권 168-169쪽, 177쪽).   

 

그 무렵, 김 대통령님의 예견과 같이 국회에서도 한일협정 과정에서 박정희 정부가 뒷돈 1억 3,000만 달러를 따로 받았다는 내용을 폭로한 김준연 의원에 대한 구속동의안이 상정되었습니다. 김 대통령님은, 마치 줄리어스 시저의 장례식을 통해 안토니우스가 일약 스타로 떠올랐듯이, 구속  동의안이 통과되지 못하도록 국내 최초, 당시까지 세계 역사상 최장시간인 5시간 19분간 무제한토론(필리버스터)을 실시함으로써 구속동의안의 통과를 저지하고, 비밀리에 생중계된 위 토론으로 인하여 하루 아침에 전국적인 스타 의원으로 떠오르게 됐습니다(1권 171쪽).

 

김 대통령님은 그 무렵부터 ‘한국내외문제연구소’를 설립하여 정책 연구와 개발에 착수하였고, 그러한 연구와 정책개발 습관은 평생 지속되었고, 이를 통해 박정희 정부의 부패하고, 무자비한 통치를 수시로 비판하면서 정부 차원의 치열한 낙선 공작의 타겟이 되었으나, 1967.총선에서도 다시 당선됩니다.

 

그러나, 금품살포, 투표용지 바꿔치기 등 갖은 방법을 동원한 부정선거로 인해 의석의 2/3를 차지한 결과에도 불구하고 박정희의 공화당은 전 국민적 공분을 사게 되었고, 이에 자진하여 20석을 내놓겠다는 양보안을 야당에 내놓게 되었으나, ‘그 제안을 받고, 지방자치제까지 받는 방법으로 협상하자’는 김 대통령님의 의견을 묵살하고 ‘선거 원천 무효’라는 강경 제안만을 앞세운 유진오 야당에 민심은 결국 차갑게 돌아서고 말았습니다(199쪽). 

 

이를 계기로 박정희는 1969. 9. 14. 3선 개헌안을 날치기로 통과시킵니다(207쪽).

 

이에 전국은 다시 대통령 선거 열풍에 휩싸이게 되고,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 대통령님이 ‘40대 기수론’을 내걸면서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대결하게 되고,치열한 대의원 투표 끝에 김 대통령님이 후보로 선출되어 현직 대통령인 박정희와 1:1 대결을 앞두게 됩니다(212쪽).

 

1971년 대통령 선거전에서 김 대통령은 ‘이번에 박정희를 뽑으면 대한민국은 영구 군사독재 국가가 될 것‘이라는 예측을 기반으로 비장한 선거 운동에 임하였고, 남북교류와 평화통일 문제도 국내 정치인 가운데 가장 먼저 제안할 정도의 선견지명을 보여주었으며, 경제적으로는 ‘대중경제론’이라는 명칭으로, 근로자 복지의 획기적 보장, 소득주도성장 등 현재까지도 유효하게 적용되는 ‘경제 민주주의’ 정책을 공약으로 내세웠습니다(220-222쪽). 김대중 대통령님의 이와 같은 통찰은 압축성장 과정에서 열매는 소수의 정부 관계자 및 재벌들이 나눠갖고, 와우아파트 붕괴사건, 전태일 열사 분신자살 사건 등으로 나타난 부실한 결과는 국민들에게 전가되는 현상에 대한 반성적 고려에 의한 것이었습니다(223, 240,243쪽).

 

이러한 ‘대중경제론’이 정식 출간되어 1985년부터 하바드대학 케네디스쿨 등 미국 여러 대학교에서 정책학 교재로 사용된다는 깨알같은 홍보도 잊지 않으시네요(224쪽).

 

선거를 앞두고 김 대통령님은 미국을 방문하여 풀브라이트 상원의원,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 등을 만나 대담하고, 이희호 여사님은 닉슨 대통령 부인 패트 여사를 만나 대담하는 등 한국의 민주주의를 응원하는 미국 고위급 정계 인사들을 만나 진중한 정치인으로서의 무게감을 보여주었는데, 그것이 못마땅했는지 박정희 정부로 추정되는 세력은 김 대통령님의 동교동 자택에 폭탄을 터뜨리고, 그 사건을 계기로 김 대통령님의 비서, 운전기사, 보좌관, 13살짜리 조카, 가정부를 수사하면서 김 대통령님의 사생활을 캐내고, 김 대통령님을 배신할 것을 회유하고, 13살짜리 조카를 고문하여 폭탄테러범이 자신이라는 자백을 받아내는 등 조작과 공작을 서슴치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독재 정부는 현재까지 지속되는 망국적 지역감정 조장을 위해 경상도에서 “전라도 사람은 전라도 후보를”이라는 자극적인 자작극 플래카드를 내걸어 인구가 많은 경상도 지역 유권자들이 자기 지역 출신 후보를 선출하도록 정부 차원의 심리전을 펼치고(248쪽), 전 국가력을 동원하여 부정 선거를 기획하였는데도 엎치락뒤치락을 반복하다가 겨우 100만표 차이로 당선되게 되자 그 때부터 영구집권을 획책하게 됩니다.

 

즉, 대선 후 한 달만에 국회의원 총선거를 실시하였고, 김 대통령님의 전국 유세 선거운동 과정에서 고의로 추정되는 교통 장애를 일으켜 이동 경로를 항공에서 고속도로로 변경하게 한 후 트럭을 돌진시켜 교통사고로 부상을 당하게 하는 등(당시 차량 운전 기사는 사망) 김 대통령에 대한 암살 시도를 시작하고, 그 사건을 살인 사건으로 수사하던 검사를 좌천시키고, 위수령을 발동하고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학생들과 언론인들과 학자들과 문인들을 잡아들여 용공 조작을 하고, 고문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를 참지 못한 최초의 공직자 계층은 판사님들이었습니다. 속칭 ‘사법파동’이라고 불리는 일련의 의식 있는 활동이었는데, 서울지방법원 이범렬 판사님이 국가보안법위반 사범에 대하여 구속영장을 기각하고 무죄 판결을 선고하자 판사님에 대하여 뇌물죄로 구속영장을 청구하였고, 이에 검찰이 두 차례 영장을 재청구하자 서울지방법원 판사 37분이 사직서를 제출하는 방법으로 항거하였습니다.

 

이렇듯 국내적으로 학생, 지식인, 법관들까지 들고 일어나자 박정희는 1972. 10. 영구독재의 기초인 유신을 선포합니다. 

 

마침 외교 활동차 일본을 방문중이던 김 대통령님은 입국할 경우 누명을 입고 수감될 것이 명약관화하였기에 일본과 미국에서 망명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일본에 머물던 중 중앙정보부 직원 두 명에게 납치되어 포박 상태에서 발에 무거운 돌이 묶인 채 배에 실려 태평양 한 가운데에 버려지기 직전에 CIA의 개입으로 납치 6일만에 다시 동교동 자택으로 실려 오게 됐습니다.

 

김 대통령님의 유머 감각은 바다 한 가운데에서 버려지기 직전에 “상어한테 하체가 뜯기더라도 상체만이라도 살아서 할 일을 더 마무리하고 싶다”고 마음 속으로 외치셨다는 부분에서도 드러납니다. 

 

그 날부터 김 대통령님은 가택 연금 상태에 놓이게 되는데, 그 당시에는 아직 권력과 주요 언론사들이 결합하기 전이어서인지 조선일보 선우휘 주필님, 동아일보 송건호 편집국장님 등이 정부를 비판하고, 납치 사건의 실체를 규명해 줄 것을 요청하는 칼럼을 게시하기도 했고, 국민들은 그러한 취지의 기사를 작성한 언론인들과 언론사를 탄압하는 정부에 맞서 언론인들과 김 대통령님을 응원하는 격려광고로 화답하였습니다. 

 

이후 1976. 3. 1.절을 계기로 김 대통령님을 비롯하여 문익환 목사님, 정일형 박사님, 함석헌 선생님, 이우정 여사님 등 10여명의 인사들이 명동성당에서 민주주의회복을 요청하는 촛불시위를 주최하였고, 당국은 김 대통령님을 포함하여 관련자 전원을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하여 수감시킨 뒤 징역 5년씩을 확정하였다가(357-358쪽) 2년만에 국민적 저항을 받아 형집 행정지로 석방하고, 다시 가택 연금을 시킵니다. 

 

김 대통령님의, ‘절망 속에서도 밝은 면을 발견해 내는 면모는 이 부분에서도 두드러지는데

정당한 이유 없이 수감된 것에 대한 분노 대신, 탄압 과정을 통해 그간 일면식도 없던 재야 인사 정일형 박사님, 문익환 목사님, 함석헌 선생님 등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고 기뻐하는 대목과, 수감 생활을 통해 왕성한 독서욕구를 충족시키고, 화초를 가꾸고, 파리를 기절시켜 수감 동지인 거미를 살찌우는 신공과 거미의 식생활을 몰래 엿보는 짓궂은 취미를 보여주시는 등 적극적인 오락과 연구 활동도 지속하는 대목이 그렇습니다(362-363쪽).

 

그 와중에 박정희 정부는 최장수 중앙정보부장이던 김형욱(파리에서 행방불명)에 의해 부패와 비리가 폭로당하기까지 하였고, 1979. 10. 16.경부터 부산과 마산의 학생들이 대규모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기 시작하자, 그 대책을 둘러싸고 고위급 공직자들이 언쟁을 벌이다가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하는 사건까지 발생하게 됩니다.

 

김 대통령님은 이 사건 관련하여,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을 의인으로 보는 움직임도 있다는 사실도 인정하면서도, 민주화는 평화적이고 민주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원칙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386쪽).

 

이러한 당부는, 박근혜 대통령 당시 대통령 선거에서 국가정보원이 댓글 공작을 벌여 선거에 개입하였다는 사건의 수사를 지휘한 채동욱 전 검찰총장을 위법한 공작(개인정보인 가족관계등록부 불법 열람 및 수집과 그 내용을 언론사에 제보하여 사퇴 압박)으로 강제로 사퇴시킨 사례와는 달리, 근래 2019. 8. 말부터 12. 31.까지 검찰 개혁을 추구하는 법무부장관에 대하여 자본시장법위반 등 피의사실을 언론에 흘리고 배우자, 아들, 딸, 동생, 어머니, 직원 등 온 가족과 청와대까지 압수수색하는 수사를 지휘한 검찰총장에 대하여 유사한 방법으로 강제 퇴임시키는 대신 ‘여전히 신뢰한다’는 의견을 표명하면서 끝까지 수사를 마칠 수 있도록 적법 절차를 보장해 주는 문재인 대통령님의 태도를 연상시키는, 매우 깊은 사고와 절제되고 성숙한 감정의 표현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독재권력과 법치권력의 차이는, 나에게 불리한 행위를 하는 상대방에 대하여 감정과 악의를 자제하지 못하고, 미리 규정된 절차 이외의 방법을 동원하여 즉각적 보복을 시행하는지 여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3. 전두환, 노태우 민정당: 사형수에서 세계적 정치인으로 도약

 

박정희의 암살로 갑작스럽게 공안 정국이 해소되자, 민주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이를 빌미로 전국에 비상계엄이 선포됩니다. 최규하 대통령이 새로 취임하였으나, 난데없이 1979. 12. 12.경 전두환 계엄군 합수부장이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체포하는 하극상이 발생하고, 전두환의 세력 강화를 예사롭지 않게 지켜보던 김 대통령님은 국회가 군부 세력의 무기인 계엄령을 해제하여야 한다는 의견을 개진하였는데, 각자 동상이몽이던 당시 국회 지도부와 최규하 대통령에 의해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던 중 느닷없이 1980. 5. 18. 광주 민주화시위 무력진출을 이틀 앞둔 1980. 5. 16. 밤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체포되고, 종국적으로는 광주 민주화운동이라는 내란을 주도한 혐의로 사형까지 선고됩니다. 

 

당시 함께 누명을 쓰고 재판을 받은 분들은 문익환 목사님, 고은 시인님, 김상현 의원님, 한승헌 감사원장님, 설훈 의원님 등입니다. 

 

테세우스, 이아손, 율리시스 등 그리스 신화에서 나오는 영웅에게서도 보여지듯, 민심은 위대한 인물이 극한에 이르는 고난을 격는 순간에 요동치는 법칙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김대중 대통령님에 대한 신군부 군사법원의 사형 선고는, 그야말로 세계 언론계를 들끓게 만들면서 카터 미국 대통령, 빌리 브란트 독일 사회당 당수, 바이체커 독일 대통령,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이 비난 성명을 발표하고, 김 대통령님의 지인이 많았고, 아직 극 우경화되기 이전의 일본 정부는 대한민국에 차관 제공을 거부하는 결정을 하는 등 국제적 유명 인사들이 열화와 같이 들고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김 대통령님은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고, 수감 2년 10개월만인 1982. 12. 23. 미국으로의 추방을 조건으로 형 집행 정지로 석방됩니다.

3년 가까운 수감 기간동안 김 대통령님은 정보화대국의 이상을 키워 준 ‘제3의 물결(앨빈 토플러)’, 불의한 세상에서도 신앙을 잃지 않기 위해 테야르 드 샤르댕 신부님의 서적 등을 읽으면서 지적 욕구와 영혼의 구원을 동시에 실현시키는 생활을 하고, 못다 한 영어 공부도 왕성하게 하게 됩니다. 

 

한편, 미국 망명 기간 중 미국 각 대학과 상원의원 등 정치인들은 김 대통령님 내외를 초청하여 강연을 듣고, 의견을 교환하는 등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위해 최대의 홍보 활동을 지속합니다. 

 

특히, 그 중간에 유명 시사 프로그램인 나이트라인에 초대받아 레이건 대통령의 방한에 관한 영어 토론을 벌여 큰 호응을 받은 부분은, 대통령님께서도 ‘영어 컴플렉스를 노력으로 극복하였을 뿐만 아니라 영어는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의사소통의 수단일 뿐이다’는 단순한 진리를 몸소 실천한 사례로, 매우 뿌듯하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1984. 초 김 대통령님은 암살 위험을 무릅쓰고 귀국을 결정합니다. 암살 위험을 무릎썼다고 표현한 이유는, 김 대통령님과 유사하게 미국 망명 생활을 하던 아키노 상원의원이 귀국하려다가 공항에서 암살당한 사건이 불과 얼마 전에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그 무렵 귀국하기로 결정한 이유는 그 해 4.에 국회의원 총선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위험을 잘 알던 미국 국무부는 김 대통령님의 귀국을 며칠 앞두고 국무부 직원들을 상대로 한 대규모 강연회를 기획하는 등 정부 차원에서 김 대통령님을 응원하는 모습을 대외적으로 과시하고, 하원의원 두 사람, 미 국무부 차관보, 부르스 커밍스 교수 등 무려 37명의 유명 인사들이 귀국길에 인간 방패가 되어 주겠다면서 20시간 이상의 긴 여정의 동행을 자처하였고, 그 주 미국 주간지 뉴스위크는 김 대통령님의 귀국을 표지 기사로 싣습니다. 

 

대통령님은 귀국과 동시에 공항에서 연행되어 다시 오랜 기간 자택 연금 상태로 내몰렸지만, 대통령님이 응원하는 신민당이 제1 야당으로 도약하면서 1987년 개헌에 필요한 민의 수렴의 초석을 다지게 됩니다.

 

그 무렵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시위는 더욱 강렬하게 불타올랐고, 서울대학교에 재학중이던 박종철 열사가 고문으로 사망한 건, 연세대학교에 재학중이던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을 얼굴에 맞고 사망한 사건 등으로 인해 민주화 시위는 학생 뿐만 아니라 직장인들까지도 참여하는 전 국민적 혁명으로 변경되었습니다.

 

본래 신군부는 이를 계엄령으로 진압하려고 하였다가 미국의 적극적인 의사표현(‘한국은 전두환의 임기가 끝나는 1988년 평화적으로 정권을 교체할 것으로 예상한다’는 국무부의 성명 등)으로 포기하고, 노태우 민정당 대표를 내세워 개헌 선언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 대통령의 임기를 5년 단임제로 하는 현행 헌법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김 대통령님도 가장 후회하는 결정이기도 하지만, 야권 분열로 인해 민주화를 추구하는 인사를 대통령으로 당선시키지 못한 채 대통령 선거에서는 노태우 민정당 대표가 당선됩니다.

 

4. 삼당통합(민자당) 이후 : 외로운 정통야당 대표 시절, 정계은퇴 및 복귀

 

노태우 대통령의 당선에도 불구하고, 국회의원 선거 결과 야 3당 의석이 여당 의석을 초월하는, 헌정 사상 최초의 ‘여소야대’ 의회가 형성되자, 정책 밀어붙이기에 곤란함을 느낀 노태우 대통령은 김영삼 민주당 대표와 김종필 공화당 대표를 포섭하여 민정당과 합당하는 ‘3당통합’을 실행합니다.

  이 과정에서, 본래 김영삼 대통령에 의해 발탁되었던 노무현 대통령님은 군사 정권과의 야합은 있을 수 없다면서 민주당에서 탈당하여 김대중 대통령님이 대표이던 국민회의로 당적을 변경하고, 그 때부터 두 분의 본격적인 인연이 시작됩니다.

 

한편, 거대여당을 이룬 민자당은 김영삼 후보를 내세워 1992년 대선에서 3번째 출마한 김대중 대통령님을 누르고 승리합니다.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님은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영국 캠브리지 대학으로 연구 연수를 떠납니다. 

 

잠시, 노무현 대통령님이 1994.년에 출간한 자전적 에세이 [여보 나 좀 도와줘]에서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님의 스타일을 비교한 대목이 있어 소개합니다. 

 

우선, 김영삼 대통령은 큰 방향만 같으면 더 관여하지 않는 스타일이고, 가끔 불러서 현금을 뭉텅이로 쥐어 주는 등 정치 자금을 ‘하향식’으로 하달해 주는 등 ‘인맥 관리’가 탁월한 분으로서 ‘훌륭한 보스’는 되지만 종국적으로는, ‘부스러기나 먹는 기회주의자가 아니라, 대권을 통째로 먹은 기회주의자의 극치‘라는 다소 각박한 결론입니다.

반면, 김대중 대통령님은 비록 적대적인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잘 한 것은 칭찬하고, 누구에게나 존대하면서 세세한 디테일과 통계까지 꼼꼼히 챙기는 스타일에, 노무현 대통령님이 생각하는 훌륭한 지도자의 요건 세 가지(권력 장악 능력, 살림살이 솜씨, 역사의식)를 모두 완벽하게 갖추었고, 항상 공부하고, 매일 더 발전하면서 결코 포기하는 법이 없으며, 항상 당당하고, 또 늘 미래의 발생 가능한 불상사에 관한 경우의 수를 미리 생각하고 대책을 연구해 두는 습관을 가지고 있으며,  깊은 진심으로부터 우러나서 노동자와 서민들을 아끼는, ‘지도자’라는 내용입니다(69쪽-109쪽). 

 

5. 아태평화재단, IMF, 대통령 당선 :백년대계의 실행

영국에서 한반도 통일 방안에 대한 다각적인 연구를 마친 김 대통령님은 1993. 7. 귀국하여 한반도 평화 통일에 여생을 기여하기로 결심하고 ‘아태평화재단’을 설립합니다. 

 

그러나, 그 무렵 국내에서는, 김대중 대통령님이 정계에 복귀함으로써 진정한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실현할까봐 걱정하느라 여념이 없어서였는지, 지속적으로 ‘정계 은퇴를 선언해 놓고, 말을 바꾸려는 거짓말쟁이’ 프레임을 만드느라 여념이 없었는지 그만 외국 투기자본에 대한 관리를 소홀히 하는 바람에 결국 외환부족 현상을 미리 감지하지 못하고 갑작스럽게 ‘IMF  사태’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이 위기를 가슴 아프게 생각한 김대중 대통령님은 마지막 여정이라고 다짐하고 다시 출마하여 여권에서 분열된 이회창, 이인제 후보와 함께 대결을 벌이고, 결국 당선되어 우리나라에 몰아닥친 IMF 차관 사태를 극복해내고, 세계적 석학자 앨빈 토플러와 당시 세계 최고의 IT업체 지도자였던 빌 게이츠를 초청하여 한반도의 경제적 미래에 대한 조언을 구한 후 전 국가적 예산을 투입하여 초고속 인터넷 통신망을 설치하고, 등기부, 호적부, 공문송수신, 문서작성 등 정부 업무의 전면 전산화를 실시함으로써, 우리 나라가 전세계에서 보편적 정보접속권이 잘 보장된 국가로 발돋움하는 데 기여하고, 아울러 우리 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우리 문화의 높은 품격에 대한 정확한 평가를 바탕으로 일본 문화를 개방함으로써 일본을 통해 한류가 전세계의 주류 문화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밑바탕을 마련하고, 분단 후 최초로 남북 정상회담을 성공시킴으로써 노벨 평화상까지 수상하시게 됩니다. 

 

6. 퇴임 후 노무현 대통령님의 서거까지: 거인의 황혼

 김대중 대통령님은 퇴임 직후, 한나라당에 의해 ‘대북 송검 특검법’이 의결되자 노무현 대통령님측에 거부권을 행사해 줄 것을 요청하셨던 것 같습니다(2권 528쪽 이하, 김대중 대통령님의 자서전에는 명시적으로 나와있지 않지만 문재인 대통령님의 자서전 ‘운명’에는 그 과정이 비교적 상세히 나와 있습니다. 229쪽 이하).

 

결국, 노무현 대통령님이 대북송금 특별법을 공포하고, 그로 인하여 박지원 의원님이 모든 책임을 지고 수감되었다가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이 확정되는 일이 발생하고, 그 과정에서 박 의원님은 좌안을 실명하게 되는 고초까지 겪에 됩니다. 

 

{개인적으로, 이 사안은 김대중 대통령님의 유연성(남북교류를 통한 평화 정착을 위해서라면 실정법을 일정 부분 위반하는 것은 통치행위의 문제로 간주되어야 하고, 통치행위는 외교적 기밀 및 신뢰와 직결되는 것이므로 일반적 수사와 재판을 통해 공개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과 당시 민정수석이던 문재인 대통령님의 원칙주의(모든 행위는 미리 규정된 절차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는 입장)가 대립되어 발생한 사안으로 보고 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님의 책 ‘여보 나 좀 도와줘’에서도 문재인 대통령님과 동업하면서부터 원칙주의자가 되었다고 한 바 있기도 합니다(210쪽).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조선시대 각종 사화와 인조반정 이후 예송논쟁, 노무현 대통령님의 대통령 기록물 열람 사건에서 보여지듯, 일응, 권력투쟁 이외의 아무런 의미가 없는 각종 사안에서 검찰과 같은 형벌권을 동원하여 상대방을 말살시키고, 그 반사 이익을 누리고자 하는 중세적, 후진적 시도가 끊임없이 지속된다는 점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통일 문제나 사료 수집 문제를 선출된 공직자들이 아닌, 검찰이 나서서 판단하거나 간섭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노무현 대통령님은, 그 무렵 민주당에서 분당하여 ‘열린우리당’을 창당하는데, 그만 사소한 일로 트집을 잡혀 2004. 총선을 앞두고 탄핵 소추되었다가, 전 국민적으로 폭발된 분노를 받아들인 헌법재판소의 결정으로 부결되고, 그 반동으로 총선에서 과반 의석을 달성하게 됩니다.

 

2004년 국회의원 선거 당시 민주당 의원이던 추미애 장관님이 호남에서 일보삼배까지 하는데도, 퇴임한 대통령으로서 도와주지 못한 미안한 마음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537쪽). 

 

 그 무렵 이미 김대중 대통령님은 대통령직을 수행하면서 혼신의 힘을 다 한 것 뿐만 아니라 정권교체기부터 시작된 가족에 대한 검찰의 먼지털이식 수사로 인해 이미 거의 탈진하신 상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북 평화통일을 위해 끊임없이 활동하다가 2007년 대선 이후 쇠퇴하는 민주주의의와 검찰의 ‘논두렁 시계’ 조작으로 인해 노무현 대통령님이 부엉이바위 위에서 몸을 던져 서거하는 사안이 발생하자 ‘몸의 절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심정을 토로한 후 불과 석 달만에 서거합니다.

 

7. 마무리하며

전세계에서 가장 발달된 전자정부, 가장 빠른 인터넷, 가장 발달된 보편적 전산 시스템을 통한 선박 설계, 전자제품 설계 등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의 100년 초석을 세우고,

본인 뿐만 아니라 아들과 동생까지 고문 후유증으로 평생 고통받았지만 '보복은 보복을 낳는다'는 신념으로 몸소 용서와 화해를 실천하신 분,

 

햇볕정책 이론을 개발하고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 정상회담을 개최하고, 남북 경제협력과 교류의 기초를 다지신 분,

 

전국민 의료보험제도를 도입해서 의료 사각지대를 없애고, 사병의 봉급을 꾸준히 인상해서 사회 곳곳의 아픔과 불이익을 보듬어 주신 분, 자국민보다 외국에서 더 인정받으신 분,

 

그리고, 불의와 모함으로 고통받으면서도 신념을 잃지 않고, 거래하지 않는 역사의식을 행동으로 보여주신 분,

 

김대중 대통령님의 위대함과 실천력과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이 이 책을 통해 길이길이 후대까지 전해지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