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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바닥으로 읽다 /

2008.05.09 19:23

영목 조회 수:2524 추천:49

조경희 발바닥으로 읽다 / 조경희

 

 

찌든 이불을 빤다
무거운 이불 한 채, 물에 불린다
모란 잎, 때 절은 이파리
고무통에 담그니 발바닥에 풋물이 든다
모란꽃이 쿨럭쿨럭 거품을 토해낸다
고무통 수북히 거품이 솟는다
맥을 짚듯 두 발로 더듬는다
삶에 찌든 내가 밟힌다
먼 기억 속 부드러운 섬모의 숲을 거슬러 오르자
작은 파문 일렁인다
나비 한 마리 날지 않는 행간
지난 날 부끄런 얼굴, 밟히며 밟히며
자백을 한다
좀체 읽히지 않던 젖은 문장들
발로 꾹꾹 짚어가며
또박또박 나를 읽는다


눈부신 햇살 아래 모란꽃 젖은 물기를 털어 낸다
어디선가 날아든 노랑나비 한 마리
팔랑팔랑 꽃을 읽고 날아간다

 

 

 

조경희 시인
1969
 충북 음성 출생
2007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신인상 당선
<
시마을> 2003. 11, 2004. 5, 창작시부문 최우수작가 선정
시마을 창작시방 운영자
*
현재 시마을에서 필명 “조 은”으로 활동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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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박스의 나날 / 조경희
게임의 법칙 / 조경희
매미 / 조경희
발바닥으로 읽다 / 조경희
빨래 / 조경희
콩나물의 꿈 / 조경희
볼펜 / 조경희
자반고등어 굽는 저녁 / 조경희

 


 

 

 

 

빈 박스의 나날 / 조경희


손에 잡히는 건 몸에 담아야 성이 풀리던
그가 납작하게 누워 있다
반듯한 자존심 세우고
진열장에서 으스대던 각진 몸이
길바닥에 구겨져 뒹굴고 있다
행인들이
붉은 경고문을 무시하고
용도 폐기 직전의 마지막 남루를
발로 걷어찬다
크리스털 유리잔의 깨어진 꿈처럼
삶은 무참히 짓밟히고, 산산조각이 나고
어느 누구 하나 꿈꾸는 유리의 궁전으로
데려다 주지 않는다
바람이 그의 몸을 흔들어댄다

저물녘 해어진 슬리퍼에 끌려온 노인이
그를 안고 지하 계단을 내려간다
가장 낮은 자들이
서로의 낮은 꿈을 비벼대며
낮게 낮게 몸을 낮추는 시간
말없이 서로의 밑불이 되어준다
하루라는 긴 강을 건너고 있다



 

게임의 법칙 / 조경희


오늘은 미용실에 들러
자라는 생각의 싹을 잘라내십시오
렌즈와 안경을 사드린 건
눈앞 현실을 외면하라는
내 마음이었다는 거, 읽으셨겠지요
역시 귀머거리 당신은 지혜롭습니다
세상의 모든 소리에 경청할 필요는 없잖아요
헤이, 거기 오른팔 씨
금빛 다이아몬드 수갑은 누가 채웠나요
당신이 외치던 자유란 게 그런 거였나요
바쁘게 달리는 손목시계를
일 분이라도 좀 쉬게 해주세요
보셨죠 지금 내 숨통을 죄고 있는 넥타이를
숨이 막혀요
거울 속 내 얼굴이 웃었던가요 울었던가요
일 미리쯤 더 자란 코와 충혈된 눈
주치의는 잠을 충분히 자라고 충고했지만
약사의 수면제는 여전히
우울 씨를 잠들게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
당신'보다 무서운 건 ''였어요
나는 또 다른 나의 적
괴물처럼 변해가는 나를
누가 고이 죽여주길 바래요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당신은 이 시대의 진정한 챔피언입니다
게임 오버



매미 / 조경희


바이러스처럼 전염되는 대중의 힘은
가히 위협적이다
미루나무 플라타너스 밤나무 버드나무
장맛비를 무사히 견뎌낸 여름의 나무들
하소연이라도 하려는 듯
하나 둘 입을 열기 시작한다
투쟁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처럼
여름 광장을 뜨겁게 메운 나무, 나무들
이마에 푸른 띠 질끈 두르고
짱짱한 햇발 끌어당긴다
푸릇푸릇 나부끼는 목청
하늘을 찌를 듯 쇳소리를 낸다
공명의 하늘높이 읽어도 읽어도
끝나지 않는 가난의 이력
신용불량자의 낙인을 찍고
불쏘시개처럼 사라져 간
동료의 얼굴이 이글이글 타오른다
떡잎조차 틔우지 못하고 사라져 간
누이의 얼굴이 활활 타오른다
냉정했던 바람은 무심코
그 속내를 알아챘다는 듯
표정을 바꾼다
부드럽게 나무를 애무한다
타결의 실마리를 찾은 여름 하늘엔 구름 한 점 없다
떨켜 떨구듯 스스로 입을 떨구는 나무들
하안거에 든 스님처럼 기나긴 묵상에 잠긴다

빙의에 들었던 말매미 한 마리가
비로소 나무에서 몸을 빠져 나온다
물결치듯 하늘로 날아간다

 

 

 

 

 

 

빨래 / 조경희

 

 

거추장스런 허물이
내 몸에서 벗어나
제맘대로 걸어 다닌다
어제의 찌든 욕망과 허물이
불협화를 이루며
차분히 융화되지 못하고
물속에서 조차 퉁퉁 부어있다
희석제를 넣는다
하얀거품 일며
방울방울 피어오르는
기분좋은 제스처들
앙팡진 손 끝 마디마디
에누리없이 구석구석 말끔히 비벼
흐르는 물에
세상에 찌든 때 맑게 헹군다
젖은 삶, 눅눅한 찌꺼기들
툭툭 털어
햇볕에 널어 말린다
문득,
우화(羽化)를 꿈꾸며 날아오르는
저 눈부신 날개짓
팽팽한 삶의 근육이 다시 긴장하며
뽀얗게 미소짓는다

 

 

 

콩나물의 꿈 / 조경희

 


어머니는 햇볕이 들지 않는
음습한 골방 윗목에
나를 밀어두시고 그도 모자라
검은 천으로 온몸을 가려두곤 하셨다


빈혈의 하늘,
유독 나에게만 젖어 계신
어머니의 따스한 사랑을 갈구하던
내 애정 결핍 증세는 호전의 기미를 보이지 못한 채
늘 노랗게 숨이 막혔다
어쩌다 심하게 몸이라도 배배 꼬이는 날이면
죽지 않을 만큼의 찬물을 끼얹으시며
혼절 직전의 나를 흔들어 깨우시는 어머니


나는 살찌고 말 잘듣는 어머니의 자랑스런 자식이고 싶다
비좁고 음습한 골방에서 벗어나
튼실한 팔다리에 흙을 묻히고
넓은 들판을 내달리는 한 마리 제비새끼처럼
푸른 꿈 알알이 펼치고 싶다


은하수 무리가 내 작은 골방으로
한없이 쏟아져 내리고
신열의 땀 축축히 흐르는 이마위로
시린 눈물 끼얹으시는 통증의 어머니,


 

 

볼펜 / 조경희


 

저놈은 머리가 텅텅 비어있다
남의 생각이나 주워 먹으면서
때로는 히멀건 들판을
때로는 반듯한 줄 위를
걸어다닌다
이리 비틀 저리 비틀
술에 취한 듯 가다가도
단단한 상대를 만나면
곤욕을 치룬다
진실을 말하다가도
전부 거짓을 뇌까리기도 한다
속을 좀체 보여주지 않는 놈
색깔이 투명하지 않아서
속을 봐봤자
알수도 없는 놈
저 쳔변의 속내를 뒤집어 보고 싶다
발자국 족족 다 까발려
만 천하에 백서를 쓰게 하리라
굵고 선명한 족적이 낱낱이 드러나면
사람들은 발가벗겨진 놈의 실체를
읽어 내려 가겠지
허나, 은연중 생각의 강물로 스며드는
또 다른 보이지 않는 놈의 정체
어느새 내 안에 슬며시 들어와
교묘히 나를 지배하는 놈
지금 이 순간,
놈이 나를 응시하고 있다 

 

 

 

자반고등어 굽는 저녁 / 조경희

 

 

시장 좌판 자반고등어가
둘의 몸을 나란히 끼우고
하나가 되어 누워 있다
넓고 푸른 바다에서 못 다한 인연
죽어서야 맺어진 것인지
서로 떨어지지 않으려
뜨겁게 포옹하고 있다
하나의 가슴이 하나의 등을
꼭 끌어안고 있는
저 고등어 한 손의 비릿함
내 눈가에 촉촉한 간기가 배인다


집에 돌아와 땀에 절은
그이의 등을 가만히 안아본다
어느 짭짤한 바다에서
헤엄쳐 살아 돌아 온
이승의 등 푸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