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명광 헌신예배설교 나를 충성되이 여겨

2018.02.13 00:35

김성찬 조회 수:239 추천:1

명광교회(박희수 목사 시무) 직원헌신예배 설교  
2018.01.28.(주일)

나를 충성 되이 여겨
딤전1:12-17절 

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 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13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7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먼저, 12절을 주목해 보십시오.  

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 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감사하고, 라는 구절과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라는 문미 사이에 어떤 단어가 들어 있습니까? 

감사와 내게 직분 맡기심 사이에,  
‘나를 충성 되이 여겨’라는 말씀이 새겨져 있습니다. 
 
나는 이 말씀을 묵상하다가. 바로 그 감사와 직분 사이, 그 날 능하게 하신 주께 대한 감사와 내게 맡기신 직분 사이에 자리한, “나를 충성되이 여겨”라는 말씀에 한동안 붙들려 있었습니다. 한동안 가슴이 먹먹해지며, 뭉클해지는 감격적인 압박감을 느꼈습니다. 

나를 충성 되어 여겨.  

나는 한때 부르심에 대한 깊은 회의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정말로 하나님께서 나를 목회자로 부르셨는가? 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집어든 책이, 기독교 고전인 리차드 백스터의 『참된 목자』라는 책이었습니다. 나는 그 책을 읽다가 이런 구절을 발견했습니다. “자원했거든 더 열심히 하라”는 경구였습니다. 순간 나는 무릎을 쳤습니다. 옳다. 내가 자원한 게 아니냐. 그렇다면, 더 열심히 해야 한다. 그게 정답이다 라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여러 직분자들은 어떻습니까? 예수 믿는 것이 자원하신 일입니까? 직분을 맡게 된 것이 순전히 내가 자원한 결과입니까? 그렇다면, 리차드 백스터의 권면처럼, 불평하지 말고, 더 열심히 하십시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게 아닙니다. 자원이 아닙니다.  

“자원했거든 더 열심히 하라”는 그 리차드 백스터의 권면에는 생명이 없음을, 나는 이내 발견했습니다. 그것이 복음이 아님을 나는 이내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내 쉽게 꺼져버리는 연약한 의지로는, 휘발성 물질 같은 내 묽은 의지로 내가 이 사명을 감당한다는 것에는, 명백한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 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지명하여 부르셨다는 사실에 대한 확신 없이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 안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께서 친히 나를 택하여 당신의 일꾼 삼으셨다는 그 소명에 대한 확신 없이, 주님께서 부여하신 사명을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체험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택하고/지명하여 부르신/ 그 주권적 선택의 은총을 힘입지 않고서, 우린 절대로 우리의 직분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어제도 우리 목회자 서로돕기운동 연합 THE JOY UNION에서 어려운 목회자들을 찾아가 위로했습니다. 이 맹추위에 상가교회에 귀퉁이에 마련한 사택에서 매트 한 장에 의지해 추위에 떨며 지내던 중, 설상가상으로 수도관마저 터져버려, 세면도 식사도 못하고 있는 후배 목사들을 찾아가 작은 성금으로 위로를 했습니다. 그 환란 중에서도 후배 목사들은 내가 택한 것이 아니라, 주께서 지명하여 부르셨기에 소망의 인내로 주님의 교회를 위한 수고를 감사히 받들어 행하고 있다며,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자원이 아닌, 택함을 받는, 피택이 중요합니다. 수동태가 강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직접 하나님께 ‘충성된 자로 여김을 받았다’는 확신을 토해내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 누구보다 충성했고, 헌신했던 주의 사도입니다.

그는 그의 자서전 같은 고린도후서 11장 22~27절입니다.  

그들이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냐 나도 그러하며 /23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26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의 모든 고난과 염려는 교회를 위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교회의 연약함을 아파하면서, 자신의 자랑이란, 자신이 약한 자이며,(고후11:28~30) 자신이 약할 때 힘주시는 하나님만이 강한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고후12:10)

28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29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 30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후11:28~30)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자원했기에 열심을 낸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자원했다면, 자신도 진즉 그 사명의 끈을 놓아버렸을 거라고 말합니다. 그 근거가 오늘 우리가 함께 받들어 읽은 본문입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 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딤전1: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 즉 모든 환란과 핍박을 견뎌 낸 힘이 “나를 충성 되이 여”겨 주시어, 나를 사도 삼아 주신 당신의 택함 속에 있다는 말입니다. 자신의 열심이 아니라, 내 열심의 이유와 근거가 죄인 괴수인 자신 바울 사도를 충성 되이 여겨주신 주체, 즉 전능자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입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함께 따라해 봅시다. 

나를 충성 되이 여겨.  
나를 충성 되이 여겨.  
나를 충성 되이 여겨, 주의 일꾼 삼아 주신, 아버지 나의 하나님 - 

그 순간 내 입에서 이 찬송이 내 입에서 터져 나왔습니다.��Amazing grace! How sweet the sound That saved a wretch like me! �I once was lost, but now am found, 

나 ♬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

놀라운 주님의 은총 놀라운 주님의 은총! 너무나 달콤한 주님의 음성 나 같은 불쌍한(가련한, 비열한) 자를 구해주시니! 한때 길을 잃고 방황했으나 지금은 나의 길을 찾았네
 
그렇습니다. 나를 긍휼히 여겨 나를 /충성 되이 여겨 주신/ 그 은혜가,  
우리를 먼저, 신앙고백으로 이끕니다. 죄인 됨의 고백으로 이끕니다.

하여 오늘 본문에서 바울사도는 느닷없이/당연하게 자신이 죄인임을, 이었음을 고백합니다.  

13절입니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13-15)  

죄가 깊은 곳에 은혜가 넘칩니다. 은혜가 넘치는 곳에 죄인 됨의 고백이 있습니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 5:20)

이 자리, 직원 헌신 예배가 우리에게 요청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이 시간 먼저 요구되는 것은 그 무엇입니까?

그것은 회개와 거룩입니다.  
 
주께서는 회개하여, 거룩해진 자를 일꾼 삼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행함이 아닙니다. 우리가 행한 자랑이 아닙니다. 먼저, 회개하여 거룩함에 이르는 것이 우리가 선결해야할 헌신 예배의 일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회개와 거룩입니다. 미국의 신학자 데이비드 웰즈는 우리 기독교인들은 도덕적 나침반을 상실했다고 합니다. 그냥 도덕에서 멀어지고 있거나 표류하는 정도가 아니라 도덕적으로 삭제되었다고 까지 말합니다. 우리는 아예 도덕적 문맹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제 소위 거듭났다고 하는 사람들과 세속인들을 비교해 봐도 눈에 띄는 윤리적 차이가 없을 정도로 특징을 상실했다."고 말합니다.

이전의 고대 기독교영성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사랑과 동정은 거룩이라는 하나님의 성품을 배경으로 해서 최고도로 강조되었습니다. 진리에 순응하고 거룩하게 되는 것이 신자들의 참된 소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거룩을 강조하는 교회는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노, 심판, 도덕적인 요구와 같은 교리는 언급되지 않습니다. 의자에 앉은 신도들을 불쾌하게 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근본적으로 이교도의 덕인 관용이 교묘히 기독교 사상에 섞여 들어와서 (용서를 옆으로 밀어내며), 선함의 중심적인 증표로 격상되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이제, 자녀들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영원히 용서하며 끝없이 관용하기만 하는 "아바"아버지로 빈번히 묘사되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죄는 윤리적이라기보다는 심리적인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죄는 하나님과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과 관련된 문제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죄는 물론 나쁜데, 그 이유는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에게 해가 되기 때문에 나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범죄를 거의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우리는 우리의 내적인 혼란을 인정하고 우리의 문제와 좌절감을 드러내 보이며, 하나님은 우리를 위로하지 못해 애가 타시는 사랑이 많으신 심리 치료사라고 멋대로 상상합니다. 자기희생은 간단히 폐기되고 자아실현이 그 자리를 꿰찼습니다, 자기 부인(否認)과 절제는 창고에 쌓이고 대신 육체적 ,심리적 건강이 상품으로 팔려 나갑니다.

이에 대하여 데이비드 웰즈는 두 가지 처방을 내놓습니다.
 
첫째, 우리는 죄에 대한 진리를 선언해야 한다. 죄에 대한 올바른 이해 없이 복음에 대한 깊은 신앙이 있을 수 없다.

둘째, 교회는 집을 청소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덕성스럽고 거룩한 사람이어야 한다. 이 삶은 은혜의 제공 하에서만 가능하다.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이 나오려면 타락한 세상에서 편하게 살던 "옛사람"이 반드시 죽어 자신 및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를 철저히 이해해야만 한다는 가르침에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는다."

교회는 반드시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나 그 말씀은 "모든 것이 용서된다"라는 단순한 선언이 아닙니다. 말씀은 우리에게 회개와 거룩을 요구합니다. 말씀이 가르치는 심대한 도덕적 진리를 회복해야만 우리는 구속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구속받아 그 구속의 도덕적 의의를 실행할 때에야 우리는 이 혼돈의 세상을 인도하며 희망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제라드 리드, C.S.루이스를 통해 본 일곱가지 치명적인 죄악과 도덕, 도서출판 누가) 중에서 일부 정리 발췌] 이상 인용한 글은 이용호 목사님의 페북 포스팅임. 감사!!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세상의 희망이 되는 교회란, 그 거룩함에 이른 교회입니다. 
크고, 작은 게 기준이 아니라 깨끗한 그릇을 주께서 사용하신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성결 교회 직원입니다.

이스라엘이 홍해는 믿음으로 건넜지만, 요단강은 “스스로 성결하라(출3:5)”는 말씀을 준행함으로 건널 수 있었습니다. 2018년 신년 벽두에 서서, 명광교회 직원들은, 철저히 자신이 하나님께 불충했던 죄인임을 깨닫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충성 되이 여겨 오늘 이 직분 허락하심에 감사하며, 스스로 자신을 성령의 권능으로 성결하게 함으로, 한 해를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함께 하실 것입니다. 주께서 하는 일마다 형통케 해 주실 것입니다.    

둘째로, 나를 충성 되이 여기시는 그 긍휼의 은총을 깨닫는 일꾼만이, 직분 감당할만한 은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릴 수 있습니다. �� 

12절 상반절, 나를 능하게 하신, 이란 말씀 속에 감사가 있습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이라는 말씀은, 주께서 바울에게 그 사명 감당할 능력을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마찬가지로, 나에게도 주께서 내게 맡기신 직임을 감당할 능력을 이미 벌써 주셨다는 말입니다. 이미 그 직분에 합당한 능력을 그 피택과 함께 부어 주셨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이 그 증거입니다.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을 통하여 받은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며 (딤전4:14). 안수 받을 때에 받은 은사, 이는 곧 안수 받을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영적 능력(성령의 은사)를 가리킵니다.  

명광교회 직원으로 부르심을 받는 순간 여러분들은 그 은사를 이미 받았습니다. 여러분이 받은 섬기는, 가르치는, 구제, 봉사, 위로, 나눔 그리고 무엇보다도 복음 전도의 은사들을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담임 목사님께서 맡아 주길 원하는 직임을 거부하거나, 거절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어진 직임을 감사함으로 받아, 다섯 달란트나 두 달란트를 받은 종처럼(마25:20-23) 우린 최선 다해 그 은사를 계발해 나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를 충성 되이 여겨주신 주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도록 합시다.  

하여, 바울 사도는 그 제자 디모데에게, 그 받은 은사를 강화하기 위해,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딤전4:15-16)고 권고하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이 구원에 이르는 능력을 전심전력으로 행하여, 그 진보를 섬기는 교회에 나타내는 직원들이 되길 바랍니다. 

셋째로, 나를 충성 되이 여기시는 바로 그 자리에, 주님의 나에 대한, 소망의 인내가 있습니다. �� 

헌신은 무엇입니까? 헌신이란, 인내입니다. 그런데 오늘 헌신 예배는 누가 인내한 결과입니까? 

16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먼저 나에게 끝없이 참아 주심을 보이셔서, 앞으로 예수를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들의 본보기로 삼으려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자식을 봐서 참고 사는 현모양처 같이, 주께서 후대 신앙인을 구원하시려고, 죄인 괴수 같은 자신 바울에 대해 주께서 먼저, 일체 오래 참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본문에서의 발견한 헌신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끝까지 참으심을 의미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일체-모든 면에서 먼저 불순종한 나에 대해 오래 참는 헌신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죄인 괴수였던 바울에 대해 그 변화를 위해 일체 오래 참으신 이유와 동일합니다. 바울을 긍휼히 여겨주신 것은, 그의 후대 신앙인들의 본보기 삼으시려 하심이었습니다. 나에 대해 참으신 주님께서는 이후 또 다른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도 소망의 인내를 견지하실 것임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의 나를 충성 되이 여기심 또한 동일한 이유입니다. 나를 충성 되이 여기시듯, 저들도 충성 되이 여기실 것입니다. 그래서 나에 대해 오래 참으신 예수를, 나와 함께한 믿음의 식구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게 하시려고, 나를 충성 되이 여긴 직분자 되게 하셨습니다. 내가 주께 인내한다거나, 내가 내 자신에 대한 참고 산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늘 이 직원 헌신 예배란, 나같이 연약하고, 허물과 죄 많은 나를 주께서 인내하신 결과임을 이웃에게 증거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나도 주께 받은 인내로서 인내하며, 주님의 인내를 내 이웃에게 이루는 명광교회 직원들이 되길 바랍니다.

넷째로, 교회는 함께 지어져 가는 신앙공동체입니다. 

마치 오늘 2018년 1월 28일은 명광교회 창립 46주년 기념일이기도 합니다. 오늘의 명광교회 부흥 성장은, 성령 안에서 함께 어깨를 겯고, 주님의 교회를 세워 온 초기 개척자들을 위시하여, 오늘 박희수 담임목사님과 당회원 그리고 성도들이 함께 교회를 지어 온 열매입니다.   

그런데, 작금 인구에 각자도생이란 용어가 회자되고 있습니다.
각자도생【명사】【~하다|자동사】이란, 제각기 살길을 도모함, 이라는 말입니다. 

이는 신명기서 28장 7절 말씀, “여호와께서 너를 대적하기 위해 일어난 적군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라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신28:7-“는 말씀을 연상하게 합니다. 

일곱 길로 도망가는 것, 각자도생은 패잔병들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그러나 진리의 말씀인 성경은 사람들이, 믿음의 사람들이, 믿음의 사람으로서 행할 수 있는 선하고 아름다운 일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연합하는 일(시133:1)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연합이 교회를 거룩하게 하고, 번영을 가져 온다고 말씀합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 133:1)   

함께 지어가는 교회, 그 구체적인 사례가 구약과 신약의 말씀 속에 있습니다.

출애굽기 36장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소를 만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본문을 이끌어가는 중심 단어가, 연합, 연결, 연이어 등입니다.

"그 다섯 폭을 서로 연하며 또 그 다섯 폭??서로 연하고(출36:10).“
“놋 갈고리 오십을 만들어 그 앙장을 연합(聯合)하여 한 막이 되게 하고(출36:18).” 
라고 씌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성벽 재건 이야기인 느헤미야서 또한 /합력하여 이룬 선,/을 이룬 단적인 증거입니다. 

느헤미야의 성벽재건은 성도들의 상호협력을 이어가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영육간의 연대를 잘 나타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느헤미야 3장은 온통 '그 다음은'이란 말로 구슬을 꿰고 있습니다. 한 구절만 예로 들면, “그 다음은 학고스의 손자요 우리야의 아들인 므레못이 보수하였고, 그 다음은 므세사벨의 손자요 베레갸의 아들인 므술람이 보수하였으며, 그 다음은 바아나의 아들인 사독이 보수하였다(느3:4)”입니다. 느헤미야 3장 전체에는 '그 다음에'라는 말이 28차례나 나오고 있습니다. 느헤미야 3장은 '그 다음에'라는 용어가 주제어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한 교회를 세워나가는 일은 사심 없는 이들의 기도와 물질과 봉사. 그 꼬리에 꼬리를 무는 연대가 요구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연대가 대를 이어 계속될 때 그 공동체는 함께 지어져가는 교회(엡2:22)가 될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20-22절 말씀입니다.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오늘의 명광교회처럼 함께 지어져 가는 신앙공동체입니다.

끝으로,  그리고 여기 헌신을 다짐하고 있는 명광교회 직원들은, 함께 지어져가는 교회를 세우고 있는, 서로가 서로를 빚는 작은 창조자들입니다.   

나는 지난 2005년에 이어 지난 2007년 5월에도 펜실바니아(Pennsylvania)주 랑카스터(Lancaster)라는 도시를 다녀왔습니다. 그곳은 재세례파(Mennonite) 성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유럽을 떠나, 신대륙으로 들어 와 정착하여 세운 종교도시입니다.  그 도시에서 빼놓을 수없는 또 하나의 신앙적 보물은 SIGHT &SOUND THEATRES입니다. 복음 전파를 목적으로 성경 이야기를 복음적으로 각색한 뮤지컬을 공연하는 2천석 규모의 대형 극장입니다. 그곳은 평일에도 미 대륙 전국각지에서 찾아 온, 미국을 이끄는 참 힘인 2천만 복음주의자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 곳입니다. 그 도시는 미합중국을 이끄는 복음주의의 힘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는 매우 귀한 곳입니다.

2007년에는 그 뮤지컬 "In the Beginning"(천지창조)을 감상했습니다. 입체적이고, 환상적인 초대형 무대와 복음에 온전히 절은 뮤지컬 가수들의 열창은 매우 큰 감동을 선사했습니다. 과연 미합중국을 이끌어 가는 참된 힘, 그 복음의 힘이 절감되는 한 사건이었습니다. 영어로 노래하는 뮤지컬인지라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래도 성극이라서 그 흐름은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하와(이브)가 아담이 죽어가는 장면에서 아담을 향해 울부짖으며 곡하던 노랫말 중 이런 가사가 순간 귀에 속 들어 왔습니다. 

"You are my creator." 
"---!!!." 

순간 나는 무릎을 쳤습니다. 그리고 외쳤습니다. 그래,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지어가는 장인(匠人)이라고. 그렇습니다. 남편은 아내의 창조자입니다. 아내 또한 남편의 창조자입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빚는 작은 창조자입니다.

잘 난 사람이 독단적으로 이끌어가는 제왕적 리더십이 빛을 잃어가는 시대입니다. 너희가 서로의 짐을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6:2)는 말씀을 이루는 리더십이 요청되고 있습니다. 

명광교회가 바로 그런 교회입니다. 

오늘 이 교회를 찾아오다가, 멀리서 교회 안내 표지판을 봤습니다.
그런데, 놀랍고, 기이하게도 그 표지판에 이런 문구가 씌어져 있었습니다. 

희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못 보셨어요? 난 분명하게 봤는데…….
그렇습니다. 물론 그 표지는,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입니다.

그런데 제 눈에
희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라고 비쳐진 이유는
명광교회 담임 목사님이신 박희수 목사님께서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 예수님처럼 성도 여러분을 사랑하고 있다, 는 영감을 제가 받았기 때문입니다.    

명광교회가 바로 그런 교회입니다.

내가 소문으로 듣고, 직접 눈으로 보고, 확인한 바에 의하면 명광교회야 말로, 서로로 서로를 아름답게 빚는 신앙공동체임을 나는 증거할 수 있습니다. 

바로 오늘 건강하게 목회를 하고 계시는 박희수 목사님의 모습이 그 단적인 증거입니다. 성도들이 한 마음으로 병약(큰 수술을 두 번이나 받은)했던 목사님을 건강한 목회자로 창조해 내셨습니다.  "You are my creator." 당신네들은 나의 창조자 라는 고백이 강단에서 울려나는 교회입니다. 그래서 또한 어렵고, 시끄러운 교회들 속에서 명광 교회만은 약할 때 강함 되신, 나를 충성되이 여기신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은 교회입니다. 그 사랑으로 성도들을 돌보는 박희수 목사님의 헌신 속에 평안히 든든하게 서 가는 교회로 소문이 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의 명광교회는 만세 전부터 우리를 택하신 창조주의 섭리 가운데, 박희수 목사님과 성도들이 서로를 그 사랑으로 빚어 낸,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답고, 건강한 교회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홀로가지 않습니다. 우리 명광 교회는 여럿이 함께 가는 방식으로서의 리더십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까지 따라 가니라(삼상6:12).”
  
벧세메스로 향하던 한 겨리의 암소처럼, 우리는 함께 힘이 들고 어려워도 찬송하며, 발맞추고, 어깨를 겯고 여럿이 함께 가는, 영혼이 유연한 서번트 리더십의 주인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보카치오(Vocatio) 즉 헌신이란, 내가 위대한 직원이라는 말이 아니라, 내가 최선을 다하는 직원이라는 말입니다. 나를 충성 되이 여겨주신 주의 은혜에 감읍하여, 나의 죄인 됨을 늘 고백하며 삽시다. 약할 때 강함 되시는 그 은혜를 때마다 일마다 받아 누리시기 바랍니다. 서로가 서로를 아름답게 빚는 창조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하여, 주께서 기뻐하시는 명광 교회를 주님 오실 그날까지 든든하게, 함께 세워나가는 명광교회 직원들이 되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오늘 본문 마지막 말씀처럼, 영원하신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을 세세토록 돌리는(딤전1:17) 명광교회와 직원들이 되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