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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80: 나그네

2019.09.23 08:35

관리자 조회 수:35

방금 우연히 내 홈피(noyes21.com)에 들어가 ‘본향’을 검색했더니, 주르르 10여 개의 연관된 글이 떠올랐다. 

 

그 중 하나, 내가 2008년 09월 14일 주일에 ‘나그네’라는 제목으로 설교했음을 확인했다.

 

그런데 바로 오늘 2019년 09월 15일 주일에 나는 ‘본향을 사모하라’는 주제로 ‘나그네 정체성’을 가지고 살자, 설교했다. 

 

10년 만에, 동일한 일자에 나는 동일한 주제의 설교를 한 것이다.

 

우연의 일치라고 말하기는 좀 그렇다. 내가 적어도 ‘나그네 의식’을 늘 가지고 살고 있었나 보다. 

 

차이라면, 2008년에는 ‘나그네 의식’조차 없이 사는 것이 문제라는 식의 설교였다면, 오늘 2019년에는 내심 살만큼 살았다는 ‘지겨움’에서 기인한 도피적 타계주의에 은밀히 기대고 있는 ‘나그네’인 나를 본다.

 

10년 전 일기를 다시 읽어 본다.

 

영혼일기 64: 나그네

2008.09.14(주일)

 

‘나그네’라는 말에 감정이 이입 되지 않았다. 

 

유대인의 역사 3권의 책을 읽고 난 후, 그 책이 말하고자 하는 한마디는 “유대인은 ‘나그네’다” 라고 결론 내렸지만,  그 결론에 선뜻 동의하지 못했던 이유는, 내 안에, 내 영 안에 ‘나그네 의식’이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벧전2:11a).”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고난과 시련 중에서 믿음생활 하는 초대 교회 성도들을 부를 때 '나그네와 행인' 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여기 '나그네' (alien)라는 말은 본국을 떠나서 해외에 나와 일시 거주하는 외국인이며, 그 나라의 시민권이 없이 <언젠가는 본국으로 돌아갈 것을 목표로 삼고 사는 사람>을 말한다. 

 

그리고 '행인' (stranger)은 낯선 땅에 잠시 머물며 여행하는 방문객이요 말 그대로 지나가는 사람이다. 이처럼 이 땅에서 영주하지 않고 본향으로 돌아갈 목표를 삼고 사는 사람은 나그네와 행인이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선진들은 다들 나그네로, 나그네 의식을 지니고 살았던 것 같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寓居)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히11:8-9).”

 

히브리서 기자는 이스라엘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약속하신 땅에서 정착했다고 말하지 않고 있다. 

 

붙박이로 그 땅에 눌러 붙어 산 것이 아니라,  

단지 <우거(寓居)>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우거(寓居)란,  남의 집이나 타향에서 임시로 몸을 붙여 삶. 또는 그런 집을 의미한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약속의 땅에서 아브라함이 우거(寓居)했단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그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단지 우거(寓居)만 하라고 명하신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의 아내 사라가 죽었을 때에도, 그 가나안 땅의 헷 족속 사람들에게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우거한 자니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지를 주어 소유를 삼아 내 죽은 자를 내어 장사하게 하소서" (창 23:4) 라며 자신이 <우거>한 자라고 밝히고 있다. 

 

그 약속의 땅에서 아브라함은  에브론이라는 사람에게 값을 지불하고 그의 밭에 있는 막벨라 굴에 아내를 장사지냈다.

 

그랬다. 아브라함이 비옥한 자신의 고향 갈대아 우르를 떠나 향했던,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그 약속의 땅은, 그 가나안 땅은 영원한 본향을 향해가는 주막 같은 간이역이었을 뿐이다. 

 

그래, 그래서  정통(원리주의자) 유대인들은 1948년 이스라엘의 독립을 원하지 않았던가 보다. 이웃들과 분쟁을 일으키면서까지 그들은 그 간이역을 차지할 생각이 없었던가 보다. 

 

그들은 핍박자들이 자신들에게 획정해 주는 게토(ghetto)에서 하늘로 하늘로만 치솟는 마천루만을 세워왔던가 보다. 땅을 넓히려고 싸우지 않고, 이삭처럼 우물까지도 그네들에게 순순히 넘겨 주면서.

 

“그들은 외방(이방)의 땅에 거하는 것처럼 약속에 땅에서 우거했다(히11:9).”

 

그렇다. 이것이 ‘나그네 의식’이다.

 

약속의 땅에서 조차 이방인의 땅에서 사는 것처럼, 그들은 못 위에서 잠을 잤고, 셋방살이하듯 언제라도 그 약속의 땅조차 훌훌 털고 본향을 향해가는 마음의 자세를 흩트리지 않았다.

 

그런 ‘나그네와 행인’같은 존재인 믿음의 사람들에게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덧붙인다.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2:11b)

 

이상의 해석들을 한 구절로 표현해보면,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라는 시구가 매우 적절한 표현인 듯하다.

 

구름에 달 가듯이,

 

욕망도, 욕심도, 집착도, 원망도, 시비도 없이, 수선 피우지 않고, 선선히, 수수하게, 만인을 대하고, 만사를 대하는, 유유자적한 삶의 모습.

 

집을 지고 천리를 가는 달팽이의 우매한 행보를 비웃기 전에, 이 땅에서 천 년 만 년 살 것처럼 아등바등 몸살 나는 삶을 살아가는 내 모습 속에, 나그네의 그림자도 발견할 수가 없다.

 

인생이 나그네와 행인이라 했을 때, 그 대전제는 그 나그네가 돌아갈 본향이 눈앞에 있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히11:13-14).”

 

그러나 오늘 내 삶은 그 본향을 그리는 마음조차 전무한 오로지 발등의 불인, 현실에 대한 집착뿐인 듯하다. 아니 돌아갈 본향이 없다고 생각하는 불신앙 때문이 아닐까? 이 부질없는 삶에 대한 집착이.

 

오후 내내 난 흔들렸다.

 

날 내주는 일이, 말씀 앞에 날 내주는 일이 너무도 힘들었다.

 

약속의 땅에서 조차 셋방살이하는, 그 언제라도 방 빼라고 소리치면 방 빼주는 나그네처럼, 이스라엘의 나그네 의식을 내 의식되게 하는 성령의 촉구하심에 난 반기를 들었다.

 

내 사색의 뜰 서울산업대 교정에서 난 천사와 씨름해댔었다.

 

주일 오후에.

 

이 깊은 밤 찬양에 몸을 맡긴다.

 

본향을 향하네.

 

이 세상 나그네 길을 지나는 순례자

 

인생의 거친 들에서 하룻밤 머물 때

인생의 거친 들에서 하룻밤 머물 때

 

환란의 궂은 비바람 모질게 불어도

 

천국의 순례자 본향을 향하여

천국의 순례자 본향을 향하네

 

이 세상 지나는 이 세상 지나는 동안

괴로움이 심하나 괴로움이 심하나

 

그 괴롬 인하여 천국 보이고

 

이 세상 지나는 이 세상 지나는 동안

 

괴로움이 심하나 괴로움이 심히 심하나

 

기쁜 찬송 주 예수님 은혜로 이끄시네

생명 강 맑은 물가에 백화가 피고

 

흰 옷을 입은 천사 찬송가 부르실 때

영광스런 면류관을 받아쓰겠네

 

이 세상 나그네 길을 지나는 순례자

 

인생의 거친 들에서 하룻밤 머물고

 

천국의 순례자 본향을 향하네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