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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52: 김영랑 시인

2022.10.01 20:38

관리자 조회 수:52

4652 

김영랑 시인 생가에서
2022.09.17(토)
김영랑이 휴지통에 버린 시를 친구가 주워서 응모전에 낸 것이, 오늘의 김영랑을 있게 했다는, 시인의 대표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 이 시는 현지 해설자에 의하면 원했던 무용수 최승희와의 결혼이 집안 어른들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하자, 그 절망을 노래한 시라고 한다.
<펌1>
해설이 있는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 / 김영랑시인
푸른바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시/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위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시(詩) 해설, 문태준 시인
김영랑의 본명은 윤식(允植), 1915년 결혼했으나 일찍 상처(喪妻)했다. 아내를 잃은 슬픔을 “쓸쓸한 뫼 앞에 후젖이 앉으면/ 마음은 갈앉은 앙금줄갚이/ 무덤의 잔디에 얼굴을 부비면/ 넋이는 향 맑은 구슬 손같이/ 산골로 가노라 산골로 가노라/ 무덤이 그리워 산골로 가노라”(슬쓸한 뫼 앞에)라고 노래했다. 고향인 강진에서 만세 운동을 모의하다가 체포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일본 유학 대에는 무정부주의자 박열과 가깝게 지냈고,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했다. 1950년 9, 25수복 때 유탄에 맞아 애석하게도 운명했다.
김영랑은 ‘내 마음’을 많이 노래했다. 초기 시에서는 ‘내마음’을 빛나고 황홀한 자연에 빗대어. 주로3 . 4음보 4행시에 담아 은은하고 섬세하게 노래했다. 잡된 것이 섞이지 않은 깨끗한 자연에 순결한 마음을 실어 노래했다. 이것은 불순하고 추악한 식민지 현실을 대립적으로 드러내려는 속내가 있었다.
이 시를 김영랑은 나이 서른 살을 갓 넘긴 무렵에 썼다. 모란이 피기를 기다리는 나의 꿈과 그 시간의 보람, 모란이 지고 난 후의 설움과 불모성을 함께 노래했다. 이 시는 찬란한 광채의 ‘절정에 달한’ 시간은 포착하듯 짧게 처리하면서 음울과 부재의 시간을 길고도 지속적으로 할애하는 데 시적 묘미가 있어 보인다. 시인은 낙화 후의 사건을 아주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떨어져 누운 꽃잎” 의 시듦뿐만 아니라, 시듦 이후의 건조와 아주 사라짐을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물론 이렇게 한 데에는 모란이 피는 희귀한 일의 극명한 황홀을 강조하기 위함이 있었을 것이다. 이 시는 감미로운 언어의 울림을 살려 내는 난숙함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고, ‘눈물 속 빛나는 보람과 웃음 속 어두운 슬픔’을 특별하게 읽어 낼 줄 알았던 영랑의 유다른 안목과 영리함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시가 사람이라면 그이는 무엇을 간곡하게 바라며 뛰는 가슴인가. 많은 시들이 울분과 슬픔의 감정을 표표하게 표현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삶이 더 찬란한 쪽으로 몰아쳐 가기를 바라는 열망에 기초해 있다. 한 편 한 편의 시는 그런 마음의 예감과 기미를 보여 주는 것이기에 아무리 작은 것을 노래해도 이미 뜨겁고 거대하다.
이제 당신의 마음은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 살아라. 허리통이 부드럽게‘ 드러난 보리의 오월을 보아라. 신록의 눈동자로 살아라. 당일(當日)에도 명일(明日)에도 우리네 마음은 ’향 맑은 옥돌‘ 이요 은물결이오니.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김영랑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 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 오는 부끄럼같이
시의 가슴에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메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펌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시문학파
詩文學派
요약
1930년대 시전문지 『시문학』을 중심으로 순수시운동을 주도했던 문학유파.
시대 근대
유형 개념용어
분야 문학/현대문학
내용
그 핵심인물은 박용철(朴龍喆)과 김영랑(金永郎)이다.
여기에 정인보(鄭寅普)·변영로(卞榮魯)·이하윤(異河潤)·정지용(鄭芝溶)의 참여로 ≪시문학≫ 창간호가 발간되었고, 뒤에 김현구(金玄鳩)·신석정(辛夕汀)·허보(許保)가 새로 참가하였다.
엄밀한 의미에서 시문학파는 이들만을 지칭해야 할 것이나, 시문학파의 범위를 넓게 보는 입장에서는 이들과 경향을 같이하는 ≪문예월간 文藝月刊≫·≪문학 文學≫·≪시원 詩苑≫에 참여한 문인들까지도 포함시켜서 시문학파를 해외문학파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하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문예월간≫이나 ≪문학≫은 범문단적인 종합 문예지였던 만큼 여기에 작품을 발표한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동인적(同人的)결속이나 이념적 유파 의식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따라서 ≪시문학≫ 동인들만으로 범위를 축소시키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KAPF)의 정치적 경향시(傾向詩)에 반발하여 문학에서 정치성이나 사상성을 배제한 순수 서정시를 지향하고자 한 점이 가장 중요한 특색이다.
1920년대의 감상적 낭만주의 시나 민요시 또는 카프의 경향시가 모두 자유시의 특성에 대한 명백한 자각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에 시로서의 현대성을 논하기에 미흡한 면모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시문학≫에 실린 김영랑·정지용·박용철 등의 작품에서는 내용과 형식의 유기적 조화에 의한 자유시가 쓰여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시에서 언어의 조탁(彫琢)이라는 면에 그들이 의식적인 노력을 경주하였다는 것은 주목할만한 사실이다.
시의 언어가 산문이나 일상적인 언어와 다르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이 현대시의 중요한 특성 가운데 하나라면, 김영랑을 중심으로 한 시문학파가 이 방면에서 거둔 성과는 괄목할만한 것이다.
또 뒤에 오는 시인들에게 많은 자극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시의 구문(構文)이란 음성 구조와 의미 구조의 적절한 조화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인데 대체로 1920년대의 시는 의미 구조 쪽으로만 치우친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김영랑의 시에서는 의도적인 호음조(好音調)·음성상징(音聲象徵)·압운법(押韻法)·음보율(音步律) 등 음성 구조에 대한 세심한 배려를 찾아볼 수 있다.
또 음성 구조와 의미 구조 사이의 조화와 긴장을 통한 창조적 리듬을 찾아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김영랑의 시는 김소월의 민요시보다도 한 걸음 발전된 형태라고 할 수 있고 그만큼 현대성을 지니게 된다.
또 다른 중요한 특색으로 시문학파의 시에서 은유와 심상이 비로소 제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물론, 그 이전(1920년대)의 시에도 은유나 심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시문학파의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질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1920년대의 은유나 심상은 자연발생적인 것이 대부분인 데 비하여 시문학파의 은유나 심상은 시의 중요한 자산으로서 의식적으로 활용하고자 한 흔적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이와 같은 특징은 정지용 등의 시적 성과를 통하여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의 시문학사에서 시문학파를 현대시의 출발점으로 삼는 것은 상당히 타당한 근거를 가진 입론(立論)이며, 시창작 이외에도 박용철의 시론이나 서구 시 번역 분야에서의 이하윤의 활동도 이들의 현대성을 뒷받침하고 있다.
참고문헌
「시문학파연구」(김용직, 『서강대학교 인문과학논집』 2, 1969)
「용아박용철연구(龍兒朴龍喆硏究)」(김윤식, 『근대한국문학연구』, 일지사, 19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