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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년된 세계와 불쌍히 여김을 받은 은총

2008.01.02 16:16

김성찬 조회 수:1091 추천:115

 * 이 글은 지난 세기 1990년대 초, 우리교회 이름이 상계중앙교회이던 시절에 쓴글입니다. 그러나 그 주제가 오늘도 여전히 우리들에게 주요 관심사가 되고 있음은, 동서고금 인간만사가 동호반복임을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그러니까 지난 해 6월 20일.
 광역의회 선거일이었던 공휴일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그 아침은 흩뿌리는 듯한 빗줄기가 차창을 적시고 있었읍니다.
 새벽부터 올듯 말듯 망설이던 찌뿌둥한 하늘에서 기어이 빗방울을 떨구었읍니다.
어찌되나?
  그날은 서울 북지방 남전도회에서 주최하는 친선체육대회가 열렸던 날이었읍니다.
 서울 동북쪽과 의정부,동두천 일원을 지경 삼아, 7개 감찰회 약 60여개 교회로 구성된 우리 지방회는 넉넉한 살림은 아니지만 오손 도손 서로 돕고 격려하면서 살아가고 있는데, 모처럼 서로가 바쁜 일정 가운데서도 남전도회를 주축으로 최선 다해 큰 잔치를 벌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호사다마라고 아침나잘 부터 고르지 못한 일기가 모두를 안타깝게 했던 것입니다. 봉고차를 운전해 가는 나의 마음 한 구석에도 좀 아쉬운 생각과 함께 이 비가 흙먼지만 잠재우고 그쳐주기를 소망하고 있었읍니다.우산을 받쳐들고 안내하는 남전도회원들의 지시에 따라 신일고등학교 운동장에 도착했을 때 이미 운동장에는 각교회에서 출전한 선수들과 응원단들이 웅성거리고 있었고 유니폼까지 맞춰 입은 몇몇 열성적인 교회들은 브라스 밴드까지 동원해 찌푸린 날씨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힘찬 응원가를 밴드에 맞춰 연습하고 있었읍니다.우리가 생각 했던 것 보다 훨씬 거창하고 훌륭한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었던 것입니다.이런 왕성한 분위기에 다소 위축(?)된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한 두 게임이나 얼른 치루고,이왕에 왔으니 모처럼 우리 성도들끼리 친목이나 다질 요량으로 그런 적합한 자리를 먼저 찾아 헤매었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 교회가 이 체육대회에 참가하게 된 것은 너무도 극성스럽게 성화를 부려댄 남전도회 임원들의 간청에 등떠밀려온 것 뿐이었읍니다.그래서 우리는 그저 얼굴이나 내밀어 주는 것이 도리라 생각한 것입니다.그도 그럴것이 맨처음 우리에게 접수된 행사 안내 공문엔 ‘탁구’ 종목도 있었고 해서 그건 많은 수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다행히 ‘탁구’하면 뭔가를 보여 줄 수 있을 선수가 우리교회에도 있어서 약간의 기대감이라도 있었는데,대회를 며칠 앞두고 주최측에서 경기장 운영관리 문제로 ‘탁구’를 제외하면서 11명의 장정이 필요한 ‘축구’ 종목을 채택 하기로 했다는 전갈을 받게 되었기 때문입니다.그래서 우리는 오로지 스포츠 정신에만 충실하기로 마음 먹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우리 상계중앙교회가 바로 그 대회에서 종합 우승의 영광을 안게된 것입니다.
  우리가 승리한 것입니다.
  단체 구기 - 족구, 배구, 축구, 여자 발야구 4종목 모두 결승에 올라 남자 족구와 여자 발야구를 우승하고 배구와 축구는 준우승하여 종합우승의 영광을 얻게 된 것입니다.

  솜털같이 가벼운 나를 들어 하늘로 하늘로 헹가레쳐 대는 우리 성도들의 감격에 찬 힘찬 함성을 들으며, 나는 우리가 기적을 이루었다라는 확신과 감격을 주체할 수 없었읍니다.남자 경기도 그렇지만, 경기가 있으리라고는 예상도 못했던 여자 발야구 경기에 그곳에서 급조된 우리 팀이  우승했다는 사실이 한동안 믿기지 않을 만큼 그날은 이상한 날이었읍니다.

  이기고 또 이겨서 종합우승을 이룬 이 엄연한 기적적 현실 앞에 서서 나는 흥분이 가시지 않은 그날밤 이 사건을 영적으로 밖에는 달리 해석할 길이 없을 것만 같았읍니다.이런 하루를 넘기고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불현듯 이는 어떤 감동으로 나는 어제의 사건을 신들리듯 백지에 적어 내려 갔습니다.그리고 20여매를 쓰고난 원고지 첫장에 이렇게 적었읍니다.  ‘불쌍히 여김을 받은 은총’

  불쌍히 여김을 받은 은총

  그 사건은 기적이었고, 그 기적의 비밀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었읍니다. 성경은, 특별히  4복음서는 ‘불쌍히 여김을 받은 은총’에 대해 자세히 말씀하고 있음을 기억해 냈던 것입니다. 기적은 ‘불쌍히 여김을 받은 은총’의 결과임을 성경이 말하고 있었읍니다. 불쌍히 여김을 받기만 하면, 민망히 여김을 받기만 하면, 거기엔 틀림없이 기적이 잉태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민망히 여기시자 소경이 눈을 뜨게되고(마20:34),문둥병자가 깨끗함을 받고(막1:41),죽은 나사로가 살아나고(요11:33),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시자  4천명이 배불리 먹고도 일곱 광주리를 남기는 기적(마15:32)이 일어났음이 생생하게 성경은 나타내 보여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불쌍히 여김을 받은 은총과 기적. 그런데 우리는 왜 기적을 맛보지 못하는 것일까요? 왜 오늘 우리에게 기적은 무시되는 것일까요?  과연 우리는 불쌍히 여김을 받고 있을까요?

  ‘성년된 세계(die mundig gewordene Welt)'-- 이땅의 보수정통주의적 신학과 교회에 강력한 충격을 던지면서 1960년대에는 세속화신학 논쟁을 통해, 60년대말과 70년대초에는 정치신학으로 소개되어 보수정통주의적 신학계에는 강력한 도전으로, 진보적인 신학계와 교회에는 새로운 영감과 상상력을 제공했던 디이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히틀러 암살계획에 가담하였다가 체포 되어 2년간의 옥중생활 후 1945년 4월 9일에 플로센부르크 포로 수용소에서 살해당했던 그는 그의 옥중생활 후반기에 들어서서 처음으로 자기도 놀라는(?) 이 ‘성년된 세계(die mundig gewordene Welt)'라는 말을 사용 했다고 합니다.

  1944년 6월 8일 그의 옥중서한에서,“전에는 인간이 중요한 일을 해결하려면 가설로서의 ‘신’의 도움이 필요했으나 지금 사람들은 많은 것을 배워 스스로 해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자율을 향한 이 움직임은 이미 13세기에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은 곧 자연율의 발견입니다. 이 법칙에 의하여 세계는 자연과학과 사회, 국가, 예술, 윤리 그리고 종교에서 살면서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여기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모든 것이 신 없이도 예전처럼 순조롭게 살아 가고 있는 사실 입니다. 신은 생활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으며 의지를 잃고 있습니다. 이 현상은 세계에 대한 기독교 변증 공세를 무색케 할 뿐 아니라 무의미하고 신사적이 못되며 비기독교적입니다. 무의미합니다. 그 까닭은 변증이 결국 장정이 된 남아를 미성년인 사춘기에 돌려 다시 모든 것을 예속시키려고 하는 일인데 사실은 예속되지 않기 때문입니다.”라고 쓰고 있습니다.물론 그의 이  말에 대한 정확한 의미와 배경을 우리가 다 알 수 없어서,흥분만 해서는 안된다고 일부 신학자들은 변호하고 있지만, 그의 말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 이젠 신없이도, 하나님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고 하는 사상이 온 땅에 충만해져 있는 현실만은 결코 부인 할 수 없다고 생각 합니다.

  인간은 본디 선(善)하고, 인간속엔 선성(善性:goodness)이 있어서, 이 선성(善性)을 개발해 가다보면 이땅에 인간에 의한 파라다이스가 건설된다는 자유주의신학의 인간관이 이런 학문적발전(?)을 이룬 것 같습니다.그들에겐 죄(罪)라는 것도 ‘덜 진화된 동물적 껍데기’일 뿐입니다.그래서 그들에겐 기적이 없습니다. 인간은 그 누구에게도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 누구에게도 드릴 감사가 없습니다. 죄사함의 은총도 그들의 사전에는 없습니다.왜냐하면 그들은 죄인됨의 고백이 무엇인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단지 동물적인 진화를 거듭해 가면 다다르게 될 오메가 포인트만이 그들의 대안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요. ‘성년된 세계’가 왜 그렇게도 날이 갈수록 악독해져 가는 것입니까? 더 긴 말이 필요가 없습니다. 로마서 1장을 잘 살펴 보십시요. 18절 이하는 타락한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들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가득차 있는 것입니다. “악독, 불의, 추악, 탐욕, 시기, 살인, 분쟁등등.”  이 말씀을 대할때마다 나는 가벼운 전율을 느낍니다.왜냐하면 내가 마치 거울을 들여다 보고 있는듯 느껴지기 때문입니다.그런데 이 말씀이 주는 더 큰 충격은 하나님께서, 제 잘난 멋에 사는 교만한 인생-‘성년된 세계’를 “내어버려 두셨다(롬1:24,26,28)”는 것입니다.“- -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버려 두사, - -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버려 두사,- -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 두사.”

  그래서 이 시대는 기적이 없습니다.생각해 보십시요.불쌍히 여김을 받는다는 것은 그래서 ‘은총’이 되는 것입니다.아무나 받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에게나 기적이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임하는 것이라면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의 모든 병자들이 다 병고침을 받아야만 했을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긍휼히 여길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롬9:15)”.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누구나 긍휼하심을 받는 것이 아닌 것처럼,아무나 감사를 주께 돌리지도 않습니다.

  그까짓것, 운동경기에서 한번 우승했다고 그렇게 거창하게 해석 할 것이 뭐냐고 이야기 할 수도 있지만, 나는 절대로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었습니다.작은 선물이라도 소중히 여기는 자녀에게 더 좋은 선물을 하나라도 더 주게 되는 부모처럼, 하나님께서도 자신이 베푸신 은총을, 그것이 극히 작은 것일지라도 그 은총을 보다 소중히 여기는 자녀에게 좋은 것을 더하여 주실 것을 나는 확신 했기 때문입니다.그래서 나는 그 작은 격려를 너무도 감사히 받고 또 받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런 이유가 아닐찌라도 더 소중했던 비밀은,내가 심히도 추악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내어버려 두신 피조물’이 아니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불쌍히 여기시는 은총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에 더욱 감격했기 때문입니다.불쌍히 여기시는 은총의 대상이.

  한가지 자유 - 신앙하는 태도(attitude)

  그 무렵 나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심으로 가득차 있었읍니다.전과 달리 하나님의 나의 삶에 대한 절대적이며, 전적인 통치권(Lordship)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읍니다.그것은 내가 그렇게 생각했다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내게 임하시는 어떤 깊은 영적 간섭의 결과였던 것 같습니다.그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나는 몸을 떨었고,지렁이 같은 존재인 자신의 추악함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었읍니다. 기도할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교만하게, 허리를 곧추 세우고서는. 그 무렵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나는 강대상 뒤편에서 마치 카톨릭의 신부가 서품을 받는 자세처럼 얼굴을 마루에 댄 채 온몸을 쭉 펴고 납짝하게 엎드려 ‘불쌍히 여겨 주시기만’을 눈물로 기도  드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 개척 만3년째 은혜중에 깨달은 ‘거룩한 중심’속에서도 불현듯 일어나는 어떤 동요,유혹 그리고 교차되던 속된 야망과 성스런 비젼. 그 혼합되던 본질과 비본질, 어떤 작은 성취와 실패에도 부질없이 흔들리던 내면세계의 질서. 그 어떤 것 하나도 내 힘과는 무관함을 철저히 깨닫고, 절대적인 그 분의 주권 앞에 납짝하게 엎드려,한번만 격려해 주시라고, 한번만 불쌍히 여겨주시라고 눈물로 지새우던 나날. 그렇습니다. 이날의 작은 기적은 납짝하게 엎드린 자를 불쌍히 여기신 은총의 결과였던 것입니다. 신앙하는 태도가 변하자 지체없이 임하신 하나님의  황홀한 현현(顯現)이었습니다.

  인간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정신자세는 ‘의미를 지향하는 의지(Will to Meaning)'
라고 말하는 빅터 E. 프랭클(Viktor E.Frankl)은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도 한가지 자유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어떤 삶의 태도를 갖는 자유”라고 말합니다. 예를들면  우리는 수용소든, 연회장이든 그 어디에서나 어떤 삶의 태도를 취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것 입니다.그 처한 상황과는 관계없이 인간이 취하는 삶의 태도가 죽음과 생명까지도 관계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신앙은 태도(attitude)다’라는 말에 동의를 보냅니다.신앙하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취하는 신앙의 태도 여하에 따라 불쌍히 여기심을 받을 수도 있고, 기적을 이룰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에게나 주신 한가지 자유 - 신앙하는 태도. 이는 아마도 현대인에게 주신 또 하나의 선악과(善惡果)인지도 모릅니다.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눅7:38), - -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눅7:44).” 눈물로 쓴 편지. 불쌍히 여김을 받은 은총은 눈물속에 피는 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년된 세계’가 구원 받을 유일한 길은 여기- ‘눈물’속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삼일만에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겠고(왕하20:5).” 눈물이 기적을 이룹니다. 왜냐하면  시인 김현승의 고백처럼,‘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全體는 오직 이뿐!’이 ‘눈물’이기 때문입니다. 눈물로 주의 발을 적시던 여인!  그것이 이 세상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신앙의 자태였습니다.

  그 무렵 나는 퍽도 많은 눈물을 흘렸던 것으로 기억됩니다.흔들리는 나뭇잎새에도,아스라한 별빛에도 뜨거워지던 눈시울. 예수 믿는 것들은 맨날 울기만 해! 그 비난이 오히려 감사한, 나같은 것을 종삼아 주신 은혜의 주님. 그때는 그랬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나는 그의 은혜를 ‘늘 울어도 눈물로서 못 갚을 줄,’ 잘 압니다.그러면서도 나는 쉬이 말라버리는 눈물샘의 소유자일 뿐입니다.그러면서도 나는 여전히 ‘은혜는 모래 위에, 원한은 돌비 위에 새기는’ 그렇고 그런 자일 뿐입니다.

  나는 원합니다. 또 한번의 기적을.
  다시 듣고 싶습니다.예레미야의 노래를.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의 근원이 될꼬(렘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