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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15: 송가인 신드롬

2019.07.22 19:26

관리자 조회 수:223

전통 가요 트롯의 역사가 송가인 이전과 이후로 나뉠거라는 신기주 문화 컬럼리스트의 송가인 신드롬에 대한 분석을 들으며, 지난 세기 1993년도 서편제 현상을 대하면서 제가 썼던 글을 다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서편제 현상이 던져 준, 한국교회 과제에 대한 나의 단견을 페친들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송가인 신드롬을 대하는 기독교계의 한 관점이 되지 않을까 해서 포스팅합니다. 

 

이백자 원고지 약 70매 분량의 장문입니다. 페친 여러분의 인내를 구합니다.

 

ㅇㅇㅇ

 

문화사적 사건 ‘서편제 현상’을 통해 본

21세기 기독교 문화 운동이 나아가야 할 방향

김성찬

                     

매사에 우연이란 없다. 우연이 아니기에 모든 사건들은 각기 나름대로의 고유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사건, 사고도 많은 한 해(1993년)였지만, 한 편의 판소리 영화 ‘서편제’가 불러 온 선풍은 의미심장한 문화사적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문화사적 사건을 대하는 많은 이들(전문,비전문가를 막론하고)의 사건을 해부하는 예리하고, 다양한 분석들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던 것이다. 

 

하여,이 영화의 감독 임권택은 제작일지와 각계 각층 사람들이 쏟아 낸 뒷 이야기들을 함께 묶은 무비 북, ‘서편제 영화 이야기’를 내놓을 지경에 이르게 된 것 같다. 그만큼 이 국산(?) 영화 한 편이 불러 일으킨 선풍은 미리 짐작하기 어려운 정도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최다 관중 동원, 죽었던 원작의 극적인 부활, 황금 트리오, 롱 테이크, 오리지날 사운드 트랙 등 가시적인 효과도 대단한 것이었지만, 이 영화 한 편이 몰고 온 비가시적 문화사적 충격은 더 큰 영향력을 이 땅에 구사한 것 같다. 단적인 한 예를 들자면, 이 영화가 1994년을 국악의 해로 제정케된 결정적 촉매였음을 그 누구도 부인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문화의 자녀’란 말이 있다. 서편제 현상을 이 땅에 불어닥친 문화사적 사건이라고 할 떄, 이 사건은 이 땅에 사는 우리 모두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더욱이 우리 선교지향적 기독 신앙인들은  이 문화사적 사건이 미칠 영향에 대해 예의 주시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아니, 보다 적극적으로 복음과 문화의 관계성을 탐구하여 이 문화사적 사건 속에서 복음이 보다 견고히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능동적으로 대처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서편제 현상을 분석해 보고자 한다.

 

1.서편제 현상을 가능케 했던 사회 문화적 요인들

 

서편제 현상은 어디서 기인한 것일까? 겨우 5-6만의 관객만 들어도 족하리라는, 흥행이 배제된 제작 의도와는 달리 100만 관객을 동원하게된 배경에는 몇가지 중요한 정치,경제 사회 문화적 요인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밀려 오는 문화제국주의에 대한 원시적 반감과 전통문화에로의 필연적 복귀를 들 수 있다.

 

1982년 프랑스 문화부 장관인 랭(Jack Lang)는 프랑스 영화 시장을 무차별 잠식해 들어 오는 미국 영화에 대해 노골적 반감을 표시하면서, 미국의 문화적 제국주의에 대해 열변을 토한 적이있다. 한편 웨일스 출신의 영화 제작자이자 미국 대중 문화 비평가인 포웰코(Richard Pawelko)는 “만약 우리가 치즈버거 문화를 받아 들인다면 복통에 걸릴 뿐이다.‘라고 말한다.

 

1993년 지금 우리 국토는, 우루과이라운드(UR)  쌀시장 개방 문제로 들끓고 있지만, 문제는 쌀시장만이 아니다. 소리없이 밀려드는 분야가 영화,T.V드라마,비디오등의 모든 문화 영역이다.프랑스를 비롯한 EC국가들은 UR협상에서 ‘문화’를 지키기 위해 자존심을 건 한판 싸움을 전개하고 있다.  

 

왜냐하면 UR협상은 그동안 세계 각국이 미국영화로 부터 자국영화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쳐놓은 모든 보호막의 해체를 강요하기 때문이다. 스크린쿼터제도, 자국영화제작보조금도 모두 없애라는 것이 ‘공룡’ 할리우드의 주문이다. EC국가들은 이에 대해 영화와 TV드라마를 UR협상에서 제외하거나 UR협상안에 문화적 특수성조항을 삽입하자고 맞서고 있는 형편이다. 

 

'91년 현재 EC 전체극장에서 상영된 영화의 81%를 미국 영화가 차지했고, 총수입중 70%가 미국 영화에서 얻어지고 있다는 점을 감안 하면, 미국의 시청각 산업이 UR협상을 통해 유럽의 창조적 유산을 말살하려 한다는 유럽 지식인들의 공포를 짐작키 어렵지 않다. 88년 미국직배영화 상륙이래 날로 경쟁력과 자생력을 잃고 있는 우리 영화계 사정도 같다. 금년 한해만해도 우리 극장가를 휩쓴 영화는 ‘서편제’ 한편을 제외하고는 ‘주라기공원’,‘보디가드’,‘나홀로 집에’등 미국 영화 일색이었다. 

 

그래서 세계 곳곳에서 록 음악과 청바지와 미국 T.V에 대항하여 새로운 문화적, 언어적 민족주의가 출현하고 있다. 특히, 회교국가 이란에 있어서, 서구는 현대적인 것 또는 세속적인 모든 것과의 동의어이며 믿음이 없는 악마적인 것이다.  

 

존 나이스비트와 패트리셔 애버딘은 ‘메가트렌드 2000’에서 “세계적 생활양식을 추구하는 흐름과 문화적 자기 주장을 향한 반대 추세는 고전적 고민을 나타내고 있다.즉 어떻게 가족이나 공동체라는 공동단위 속에서 개인의 주체성을 보전해 나갈 것이냐 하는 것이다. 인류가 그 자체를 하나의 행성에 살고 있는 것으로 보면 볼수록 각개의 문화가 독특한 유산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구는 점점 더 커질 것이다.각각의 요리 솜씨를 맛보고,청색 무명 옷을 입어 보는 즐거움을 갖고, 얼마간의 오락을 즐기는 것은 바람직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외적 현상이 문화적 가치까지에 깊숙히 침투한다면, 사람들은 다시 그들의 차이점을 강조하고 일종의 문화적 반동으로 되돌아 갈 것이다. 각 나라의 역사,언어 그리고 전통은 독특한 것이다. 그리하여 역설적으로 말하자면,우리는 점점 닮아 갈 수록 점점 더 우리의 독특함을 주장하게 된다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마이클 잭슨의 한밤의 세레나데 ‘가고파’는 국민정서를 고려한 지도층의 결단으로 불발이 되었지만, 한때 이 가수의 국내 공연 여부가 두나라 정상회담의 의제(?) 가운데 하나가 되어야만 하는 심각한 문화제국주의의 침략을 우리는 눈으로 본다.  

 

점점 닮아가기 때문에, 우리의 독특함을 드러내고자 하는 문화젝구주의에 대한 원시적 반감과  민족전통에로의 필연적 귀속감이 ‘서편제’라는 영화를 통해 확인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 평론가  이세룡씨의 지적을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그들은 ‘서편제’가 칸이라는 법정에서 무슨 유죄 판결이라도 받은 것처럼 말하지만 나는 결코 여기에 동조하지 않는다.적어도 ‘서편제’에 한해서만은, 금년도 칸 영화제의 집행 위원들을 그 안목을 의심 받아야 마땅하다. 예년의 깐느 본선 진출 작품과 견주어 볼 때,‘서편제’는 매우 독특하고 뛰어난 영화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둘째,원죄의식-자문화 지향의식의 발아(發芽)이다.

 

그래도 우리의 독특함을 내세울 그 어떤 것이 실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 우리에게 위안을 줬다면, 동시에 바로 그것, 독특한 우리 것을 천하게만 여겼던 ‘식민지적사관’이 갖는 그릇된 인식과 태도는, 원죄 의식(이 영화를 보고난 관객들이 “한마디로 부끄러웠다”라고 고백한 부분에서 우리의 원죄 의식의 편린을 엿볼 수가 있다)을 낳고 그 죄의식의 승화는 전통문화를 발전,  계승해 나가겠다는 다짐으로 이어지게 한것 같다.그래서 거센 문화제국주의화 과정에서 ‘서편제’가 불러 온 선풍은 의미심장한 문화사적 사건이다.  

 

물론 이런 ‘식민지적사관’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70년대에서 부터 꾸준히 운동권 학생들을 중심으로한 기층 저변에 흘렀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오늘 ‘서편제’처럼 이구동성으로 남의 눈치 보는 사람 없이 “우리 판소리가 이렇게 좋은 줄 미처 몰랐다.”는 고백을 그 때는 들을 수가 없었다. 물론 그 차이는 시대 상황이 다르다라는 말로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서구 편향 문화의 허구와 위험을 이 시대가 직면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너무나 오랫동안 우리는 서구의 문화적 지배상황에 살아 왔으며,이제 그들의 시각을 거의 우리 것으로 내면화해 버렸다. 이런 상황하에서 탈식민화,자문화 지향 의식이 한편의 판소리 영화 ’서편제‘를 통해 발아되었음은 매우 다행한 일이라 생각 된다. 문제는 이 서편제적 시대상황을 어떻게 승화 시키고 에너지화 해서 전통문화 발전으로 연결 시키느냐의 과제가 이 땅엔 있는 것이다.

 

셋째,문예부흥의 시기의 도래와 전통문화의 부활을 들 수 있다.            

 

“죽은 명창들이 다 일어나 소리를 한다 해도 이만큼 떠들썩하진 않을 것”이라고 말한 김소희명창의 말속에 우리가 지금 논하고자하는 내용의 요지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시의성(時宜性)의 문제이다. 거북살스런 정치 논쟁에서 벗어난, 소위 문민의 시대라는 점과 제 2의 문예 부흥기의 도래를 알리는 세계사조 때문이다.   

 

존 나이스비트는 ‘1990년대는 예술의 부흥 시기’라고 말하면서,“20세기는 중세의 암흑기와 같은 암흑 시대를 맛보았다. 즉 고도로 발달된 기술과 산업화가 인간을 기계로 대체했고 전체주의와 전쟁은 인간, 박물관, 성당들을 파괴했다. 20세기의 끝으로 가고 있는 오늘날 우리는 모든 것을 황폐화 시킨 전쟁의 기억을 뒤에 남겨 두고 있으며 냉전의 시대조차 가버리고 있다. 1990년대에는 영상 예술,시(詩),무용,연극과 음악 분야레서 전세계적 부흥기가 도래할 것이다. 그것은 군(軍)이 모델이며,스포츠가 그 상징이었던 산업사회와는 뚜렷한 대조를 이룰 것이다. 이제 사람들의 관심은 스포츠에서 예술로 옮겨 가고 있다”라고 말한다.  

 

그런점에서 ‘서편제’라는 영화의 성공에 대해 임권택 감독은 “이 영화가 80년대에 나왔더라면 이렇게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 것은 이 시대의 문화적 풍토(문민정부,세계적 문예부흥)를 잘 대변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넷째,문화의 집단주의적-가부장적 권위를 들 수 있다. 

 

데이빗 헤슬그레이브(David J.Hesselgrave)는 ‘복음의 상황화’란 논문에서 “서양의 후기 기독교 문화(특히 미국 문화)는 강한 개인주의적 경향을 갖고 있는 반면, 중국 문화와 같은 기독교 이전의 문화는 집단주의적 경향을 갖고 있다.그래서 중국인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가 있다면 가족 전체의 회심을 강조하고, 이를 위해 가장(家長)의 회심에 우선권을 둘 것이다. 고넬료,  루디아,빌립보 감옥의 간수의 회심이 바로 이러한 예에 속한다”라고 말한다. 여기에 중국으로 표현된 문화적 특성은 우리 한국을 포함한 동양인의 문화적 특성으로 확대 해석해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서편제라는 판소리 영화가 100만을 돌파하여,방화 산업의 신기원을 수립한 배경에는 이러한 우리 전통문화가 갖고 있는 ‘집단주의적-가부장적 권위’와 무관하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김영삼 대통령,김대중 선생,학교 담임 교사등으로 상징 되는 ‘가부장적 권위’가 관중을 동원하는 일에 일조 했음을 부인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 전통문화 창달을 위한 각계각층 지도자들의 올바른 식견과 관심이 급선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섯째,인간중심적 세계관의 종언과 자연중심적 세계관의 발현을 본다. 

 

“우리 산천이 이렇게 아름다운 줄 미처 몰랐다”라는 경탄 속에는, 이 영화가 우리 것의 아름다움에 대한 새롭고,경이로운 일깨움을 펼쳐 보여  주었다는 의미만 내포된 것이 아니다. 눈시울겹도록 아려 오는 황토 빛 풍광 속에서 아직도 모진 인간의 마구잡이식 훼손을 말없이 견뎌온 의연한 산하를 보는 것이 아닐까? 자연이 정복과 남벌의 대상만이 아니라는 점을 새삼스레 깨우쳐 가는 생태계의 위기 시대에 여짓껏 살아 남은 우리 자연의 대견함에 찬탄을 보내는 것이 아닐까?  

 

 20세기말 과학적 세계관은, 16세기 지동설이 지구중심적 우주관을 버리고 태양중심적 우주관을 도입 했듯이, 20세기말 우리는 인간중심 문화의 세계관을 버리고 생태중심문화라고 부를 수 있는 자연중심적 세계관을 가지게 하고 있는 것이다. 

 

박이문은 그의 저서 ‘과학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글에서 17세기 데카르트는 인간만은 기계와는 별도의 존재라고 했지만, 인지공학의 발달로 사람 이상의 사고력을 갖고 있는 로보트며, 유전공학의 산물로 복제 인간이 출현하는 과학적 전문 지식의 증진과 기술 개발은 인간도 다른 동물들은 물론 사물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래서 어떤 문화나 국가가 세계문화 그리고 인간 사회의 중심이 될 수 없는 것과 똑같이, 인간은 자연과 떨어져서 그것을 지배하기 위해 생긴 존재, 자연의 소유자,자연의 주인이 아니라 다만 자연의 한 측면, 자연의 일부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논리는 과학 철학의 결정론적 형이상학의 당연한 귀결이기도하지만, 이러한 지적(결과)은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만 보아 온 전통적 서구 기독교의 인간중심적 세계관의 결과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미국자리공으로 대표되는 공해산업의 막장인 이땅에, 마지막 남은 싱싱한 자연의 끈질긴 생명력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생각한다.    

 

2.문화사적 사건 ‘서편제 현상’과 한국 교회

 

일반 사회에서만이 아니라 이미 교계에서도 ‘서편제 현상’에 대한 깊은 관심이 여기 저기서 표명되었고, 단행본으로는  ‘한’의 문제를 기독교 신앙의 관점에서 다룬 ‘기독교 세계관으로 조명한 서편제’(CUP-기독교대학설립자회 동우회 출판부)가 출판 되어 있는 실정이다.   

 

여기서는 문화적 사건 ‘서편제 현상’을 교회의 신앙과 관련지어 생각해 보고자 한다. 그것은 선교적 성취론과 바람직한 기독교 문화 정립이라는 입장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한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카톨릭 선교학자 루즈베탁(Louis J.Luzbetak)은 “문화란 한 백성의 삶의 총체적 방법이며,‘정신(Mentality)’이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런데 선교는 바로 그러한 문화의 자녀들의 영혼을 복음에로 인도하여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복음과 문화의 관계의 긴밀성을 분명히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복음이 지닌 불변적, 초월적, 우주적 특성과 그 복음이 접하는 자리의 종교 문화가 지닌 가변성, 현실성, 맥락적 특성을 어떻게 상관 시켜야 할 것인가에 대한 진솔한 물음이 요청된다는 사실이다.  

 

문화적 사건으로서의 ‘서편제 현상’은 오늘 우리 교회에 다시금 ‘복음과 전통 문화’에 대한 관심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 대한 폭발적인 관심에도 불구하고 이 문화적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하다.

 

첫째,‘서편제 현상’으로 강요 받게 될 ‘우리것은 소중한 것이여’라는 식의 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우려를 들 수 있다. 

 

새로운 암흑 시대(?)에 대한 우려 같은 것이다. 함께 영화를 감상하고 나오던 선배 목사님께서 “이런 영화를 신자들이 보면 안되겠어!”라는 말속에 암시된 내용이다.  

 

그분의 뇌리속에는 분명 우리 전통 문화=반기독교적 문화,자문화 지향의식=탈식민의식=탈기독교 의식이라는 도식이 입력 되어 있을 것이다. 

 

물론 우리는 이런 우려를 확신 시킬만한  단서는 곳곳에서 발견 할 수 있다. 70년대 운동권 학생들의 ‘양키 고우 홈’의 구호를 이런 등식만으로 이해하도록 강요 받은 세대이기도 하지만, 교회 안에서도 그분의 우려가 현실화 되었기 때문이다.  

 

한 예를 들어보자. 대학생들이 주축을 이루며 번성하고 있는 모사이비 집단에서는 트롯 가락에 가사를 실러 찬송을 부른다는 것이다.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라는 트롯 가락에 이를테면 ‘돌아 와요 예수님께 그리운 내 형제여  ’라는 가사를 실어 감흥을 돋운다는 것이다. 일본의 엔카풍의 트롯이야말로 우리 민족 정서를 가장 잘 대변하는 것이라는 설득이, ‘우리 것’이라는 말 한마디에 모든 것을 걸만한 순전한 이 땅의 젊은 민족주의자들을 매료 시킬 수 있다는 말인 것이다. 이는 마치 통일교를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해석하여,일본인들도 숭앙하는 민족의 지도자 문선명선생(?)이라고 칭송해 마지 않는 일부 그릇된 지식인들 처럼. 기독교가 외국 종교, 서양 종교, 백인들이 종교라는 인상은 오늘날 아프리카, 아시아에서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도하는 데에 있어서 말할 나위 없이 심각한 장애물이다. 그래서 이 영화가 그런 현상에 부채질하는 꼴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자민족중심주의적인, 전통에의 회귀를 강조하는 감상적 민족주의의 위험성은 분명히 지적하고 넘어 가야만 한다. 왜냐하면 본질주의적 전통주의는 파시즘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 앨빈 토플러의 경고를 귀닮아 들어 보도록 해야 할 것이다. “민족이라는 개념을 재구성하는 것은 앞으로 매우 중요한 수십 년 동안에 이 세계가 직면하게 될 정서적으로 가장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이며, 또한 특정한 기능을 지방화하거나 세계화하도록 허용하지 않고 계속 국가가 장악하도록 하는 것이 긴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그러나 맹목적인 부족주의와 민족주의는 위험하고 퇴행적이다. 이것들이 인종적인 우월감이나 선민의식과 결부될 때 폭력이나 억압을 불러 들이게 된다.민주적 가치관보다 민족주의를 앞세우는 과격파가 장악하거나 또는 큰 영향을 미치는 정부는 새로운 암흑 시대의 도래를 불러 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지적은 타당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교회가 다음과 같은 일에 대해 깊은 자기 반성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바로 연이어 나오는 전통문화를 대하는 교회의 그릇된 태도이다.

 

둘째,서구적 문화의 시각으로 전통문화를 대하는 교회의 태도이다. 

 

어떤 목사 부인이 가야금을 사택에서 연주했다가, 그 교회 권사님들한테 “아니 목사 여편네가 가야금을 뜯어?”라는 심한 모욕과 비난을 면치 못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오늘 우리 교회의 신앙이 이렇게 목사 마누라가 풀륫을 불어야 학처럼 고매하고,발레를 하면 백조의 호수로 보이는데, 가야금을 뜯고,전통무용을 왜 기생처럼 대접을 받아야 하는가라는 물음 앞에 냉정히 서야 할 것이다.  ㅠ

 

우리 전통문화를 백안시 하는 이런 태도, 청소년들이 교회당에서 서양의 드럼을 두드려대는 것은 가(可)해도, 전통 악기 괭과리나 장고는 불가(不可)한가? 알아 듣지도 못한 오페라는 졸면서도 감상하면서, 귀에 쏙쏙 들어 오고, 눈이 시리도록 흥겨운 우리의 판소리나 국악은 사탄적인 것으로 여기는 것은 무엇인가?  

 

이는 우리 민족의 언어까지 말살하려고 했던 저 극악한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심어 놓은 ‘식민지 문화의식’의 잔재이자, 할리우드로 대표되는 미국의 문화제국주의의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의 산물이며(오리엔탈리즘이란 서구가 가진 동양의 이미지를 말하며, 구것은 지금 역수입되어 우리 자신들을 비추어 보는 안경이 되었다.), 더 나아가 군사독재시절 괭과리=운동권=빨갱이=이단적 자유주의자등의 등식이 고식화 된 것도 이런 혐오를 부추긴 점이 없지 않나 생각 된다. 

 

그러나 이것은 복음과는 무관한 문화적 차이에 관한 것이다. 목사 사모가 가야금을 뜯어?라는 식의 발상, 교회안에서 울려 나오는 장고와 북소리에 민감한 사람들에게는, 교차 문화 커뮤니케이션(cross-cultual communication)에 대한 전환적 각성이 요청된다.  

 

이해로써 인내하여 ‘우리 것’에 대한 막연한 열정이 비정상적으로 분출하지 않도록, 한국 교회는 그동안 백안시 해 왔던 전통문화와 기독교 복음과의 만남에 진지한 관심을 표명해야할 21세기를 눈 앞에 두고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우리는 서편제 현상이 가져 온 자문화 지향의식을 결코 간과해서는 아니될 것이라 생각해 본다. 그렇지 않을 때 기독교가 서양 종교요, 복음조차 외면 당할 위기를 자초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서구인들이 기독교를 전파할 때 복음을 서구 문명과 함께 전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서구 문명이 곧 기독교 복음과 같은 것 처럼 말했는 점이다. 

 

이에 대해 로잔 언약은 “교회는 종종 성경에 매이기보다 문화에 매이는 경우가 많았다.”고 말한다. 우리는 기독교 복음을 서구 문명과 동일한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된다. 그런점에서 우리는 서구적인 형태의 기독교를 가질 필요는 없다. 우리는 서구적인 영향하에서 벗어나 한국인에게 맞는 기독교 문화를 창출해야만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시점에서 다시 논의 해야 할 필요성이 요청되는 서구적인 문화로부터의 토착화이다.

 

셋째,다시금 자연스럽게 논의 되어야할 내용이 복음의 토착화와 전통문화와의 관계이다. 

 

이 시점에서 ‘서편제 현상’을 선교신학적,기독교 문화사적 사건의 촉매제로 보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 땅의 신학적 논쟁이 그 시대의 정치,  경제,사회 문화적인 사건들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역사적 근거 때문이다. 

 

소위 말하는 ‘토착화(indigenization)' 신학 논쟁 또한 그러한 배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대로 토착화 신학은 60년대 초반에 등장했다. 1960년대 초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각계 각층에서는 민족의 주체성을 강조하면서 탈서구화를 외쳤던 때에 일이다. 그러다가 1970년대에 이르러 유신독재로 말미암아 이 땅에 정치 사회적인 억압상황이 계속되자 토착화신학은 민중신학에 그 전위적인 자리를 내어 주게 되었고, 그 후로는 간헐적 논쟁만이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동구의 공산사회의 몰락,국내 정치의 변화등으로 인하여, 자연스레 그 논쟁의 초점이 다시금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특성을 지닌 민중신학의 자리를 젖히고 종교문화적 뿌리를 찾는 토착화 신학이 전면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너무 앞서 나가 종교다원주의라는 이름으로 종교 신학의 자리에 까지 나서고 있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60년대의 한국교회가 ’토착화 논쟁‘의 열매도 맺기 전에 70년대 국내 정치 상황과 맞물리면서 자연스럽게 W.C.C신학교육기금(Theological Education Fund : TEF) 지도자들이 창안한 용어 '상황화(현장화 : Contextualization))'에로 넘어가버린 것이다. 상황화는 '토착화(indigenization)'란 용어와 유사하지만 그보다 좀 더 많은 것을 함축한다고 볼 수 있다. 상황화는 특정한 제 3세계의 문화적 맥락에 어떻게 접근하느냐와 관계가 있다. 토착화는 전통 문화와 접맥하여 복음을 받아 들인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경향이 있다. 상황화는 이것을 받아 들이면서도 세속사회, 과학기술, 사회정의를 위한 투쟁 등의 과정을 배제하지 않는다. 이런 것이 제 3세계 국가의 역사적 운동들을 특징 짓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상황화는 선교에 있어서 토착화라는 종래의 개념보다 그 영역이 더 넓다라고 말 할 수 있다.그러나 열매도 맺지 못한채 상황화로 뛰어 넘어가 버린 복음의 토착화가 이제 다시 실질적이고도 깊이 있게  시도 되어야 할 이유는 앞서 언급한 내용 즉 국내외 정치 상황의 변화와 세계사조인 문예의 재부흥과 함께 온 자문화 지향 의식이라는  시대적 요청 앞에 우리가 서 있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한국 교회는, 토착화신학에 대한 나름대로의 노력을 경주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있어 왔던 한국 신학계의 토착화신학 논쟁은 양극으로 치달아 실질적인 열매를 거두지 못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복음의 토착화에는 두 가지 상반된 입장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전통 문화나 심성을 주체로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해석하려고 시도한 입장이며, 다른 한편은 복음의 역사에서 출발하여 그것을 주체로 해서 한국 문화를 해석하려 하는 것이다. 전자의 주요 관심이 한국 문화라는 삶의 정황(Sitz

 im Leben)인데 비하여, 후자의 주요 관심은 복음에 대한 철저한 고백이다. 이런 두 입장이 때로는 지나쳐 한편은 혼합주의로 치닫고,다른 한편은 문화와 담을 쌓는 폐쇄성만을 드러내지 않았나 싶다.  

 

여기서 그 입장들을 장황하게 늘어 놓을 이유가 없다. 다만 다시금 일고 있는 복음의 토착화론에 대해 우리 한국교회가 가져야 할 바람직한 태도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것은 곧,문화에 대한 무조건적 수용이나  배척이 아니라, 우리 문화의 좋은 점들을 인정하고,그것을 활용하면서 마침내 문화의 변혁을 추구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한  복음과 문화에 대한 바른 태도일 것이다.

 

그런점에서 문화사적 사건 ‘서편제 현상’은 오늘 우리 한국 교회에 자연스런 토착화의 장(場)을 다시 열어 준 것이라 생각한다. 그 이유는 첨예하게 대립되는 신학적 관점에서 한 발자국씩 벗어나, 누구나 공감하고 있는 서구적인 문화로부터의 토착화에 대해 논의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 했다는 점 때문이다.  

 

크고, 무겁지도 않다. “어떻게 하면 우리의 전통 가락에 복음을 효과적으로 실을 수 있겠는가? 예배 음악에 전통 악기를 사용할 효과적인 방안은 무엇이겠는가? 우리나라 예술가들이 가사를 짓고 곡을 붙인 찬송가가 필요하지 않겠는가?”라는 작은 일에서 부터 출발하자는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 형이상학적이고,무거운 주제들만 선호해 온 경향이 있다.그리고 원래 토착화 신학은 선교 신학의 영역에 속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설득력 있게 전하느냐는 선교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토착화 논쟁이 사변만을 위한 논쟁이라면 그것은 한낱 관념의 유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맺는말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나라를 목표 하셨다. 하나님의 나라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나라를 이루어 가시기 위하여 명령을 내리셨는데,이 명령을 창조 명령,문화 명령(창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으로 불리운다.  

 

이 문화 명령이 하나님께서 내리신 첫 명령이다.이 문화명령은 역사의 모든 과정에서 인류는 열심히 창조를 탐구하고 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문화는 하나님의 창조 작업의 재현이고 축소된 모방이기때문이다. 문화사적 사건 ‘서편제 현상’이 몰고 온 전통문화의 재흥은 우리 21세기를 눈 앞에 둔 기독신앙인들에게 신앙 안에서 이러한 문화명령에 보다 더 충실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효율적인 선교를 위한 토착화 작업은 이러한 문화명령에 충실하는데서 다져질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문화 명령의 근거가 되는 창세기 1장 28절을 말할 때,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형상’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권과 통치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위한 인간의 섬김과 봉사에 있다는 기독교 인간학적 관점에서 봐야 한다는 점이다. 인간중심적 세계관도 아니고, 자연중심적 세계관도 아닌 ‘하나님 중심적 세계관’에서 이웃과 자연을 대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상호 섬김과 봉사만이 올바른 기독교 문화를 이 땅에 두루 정착 시켜 나아 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