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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00: 어버이날-가족사

2019.05.09 08:02

관리자 조회 수:17

민족사가 가족사다. 당연하다. 

가족이 모여 민족을 이루기에. 

 

민족사에 얽힌 우리네 가정사를 돌아 본다.

 

우리는 원조 탈북 가족이다. 

우리네 원적은 

평안북도 영변군 태평면 상서리이다. 

 

그 땅에서 삼백 년 이상 살아 온 세도가였다. 그만큼 죄도 많이 지었을 거다. 족보에 의하면, 우리 8대조 어르신께서 공양미 삼백 석을 바쳐서 영변 고을에 절을 지어주었다는 기록도 있다.  

 

영변에서 출생하신 선친 김용원(金用元)님께서는 고향을 떠나 일찍이 함경도 흥남에 자리를 잡으셨다. 일제 강점기 흥남은 오늘 울산처럼 질소 비료 공장으로 대표되는 조선의 대공업도시였다. 

 

그곳에서 선친께서는 인쇄업으로 큰 돈을 버셨다고 한다. 어머님의 증언에 의하면 어둔 밤이 되면 방 안 여기저기에서 다이아몬드가 샛별처럼 반짝거렸었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그렇게 부유하고 다복하게 사시던 당신네 가정에 재앙이 임했다. 8․15 해방의 기쁨도 잠시 국토를 두 동강 낸 외세가 물밀듯이 금수강산에 밀려 들어 왔다. 

 

불행하게도 북녘 땅은 소련군(蘇聯軍)이 점령해 버렸다. 무기수나 사형수가 군복을 입고 나타 난, 소련 군인들은 물 만난 고기처럼, 흥남 시내를 휘젓고 다니며, 약탈을 일삼았다. 

 

부녀자들은 해가 질 무렵에는 경고 종소리에 맞춰 외출을 삼갔다. 약탈자들은 팔뚝까지 약탈한 시계를 꿰차고 다녔고, 질소 비료 공장 기계는 죄다 소련군들이 제 제국으로 다 뜯어가 버렸다.

 

그런 아귀(餓鬼)의 인민 흡혈작전에 제일가는 표적이 바로 우리 선친 같은 기업가요, 재력가들이었음은 불문가지(不問可知)였다. 

 

하여 도저히 공산 치하에서 살 수 없게 된 선친께서는 월남(越南)을 계획하셨다. 이는 마치 선친의 맏형이신 백부께서 일제강점기 때에 오산학교 출신답게 가산을 정리해 독립운동에 투신하셨던 것처럼, 선친의 반공 결기(決起) 또한 막아 낼 장사가 없었다.

 

선친께서는 공산당 압제를 용인할 수 없으셨다. 그 자유에의 의지는 북한 탈출을 꿈꾸게 했고, 마침내 선친께서는 탈북을 결행하셨다.

 

그 해가 정확히 언제인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1945년 해방 직후부터 1948년 이전임에 틀림없다. 큰 누님은 흥남 산(産)이지만, 1948년 생, 작은 누님은 남한 산(産)이기 때문이다.

 

선친께서는 야밤에 흥남 부두에 사비를 들여 산, 배 한 척을 띄웠다. 막힌 육로로는 탈출이 불가능해서 동해상으로 탈북을 결행하셨다. 우리 가족과 옆집 한 가족을 거저 태우고 탈북을 감행하셨다. 

 

피땀 흘려 조성한 삶의 보금자리를 송두리 채 버려두고, 야밤에 탈주를 감행할 수밖에 없었던 당신들. 그 지옥 된, 제 2 고향 흥남을 빠져 나오셔야만 했던 선친과 선자(先慈)의 에어내는 비애를, 나는 일찍이 영화 「국제극장」의 흥남 탈주 장면을 보면서, 당신네들과 한 몸 되어 흐느꼈다.

 

작고(作故)하신 어머니께서는 생존해 계실 적에 가끔씩 이렇게 회고하시곤 했다. 

 

그 엑서더스(Exodus)의 밤, 집 안에 사람이 있는 것처럼 꾸미기 위해, 온 방마다 환히 전등불을 다 켜놓고 집을 나서면서, 아쉬워 뒤돌아 봤더니, 큰 괘종시계 추(錘)가 홀로 울며 좌우로 흔들리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하셨다. 마치 생떼 같은 자식을 홀로 떼어 놓고 집 나선 듯한 애통한 심정이셨다고 하셨다.

 

배는 흥남 부두를 몰래 빠져 나왔으나, 동해안에 뜬 배가 갑자기 몰아친 광풍으로 뒤집혀질 형국을 우리 가족은 맞았다. 바다에 수장 될 위기를 맞은 것이다. 

 

선친께서는 다시 결단하셨다. 바다에 수장 되느니, 우리들의 생명을 하늘에 맡기고, 뱃머리를 돌려 뭍에다 갖다 대자, 만일 그 뭍이 이북 땅이면 우리는 죽임을 당하는 거고, 만일 그 뭍이 이남 땅이면 우리는 구사일생할 거다. 

 

그래서 뱃머리를 돌려 뭍에다가 배를 갖다가 댔는데, 기적 같이 그 뭍이 이남 땅 주문진이었다. 이 같이 죽으면 죽으리라는 결연한 의지와 용기로 선친께서는 탈북에 성공하셨고, 하여, 오늘 우리 가족이 그리고 내가 여기 신앙으로 존재한다.

 

모진 역사에도 당신은 철옹성 영변 출신답게 절대 굴복하지 않으신 거인(巨人)이셨다.

 

그 후 몇 년이 지나서 동족상잔의 비극, 육이오동란이 터졌다.

 

선친께서는 살아 계실 적에 매 순간마다 귀거래사를 홀로 읊곤 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육이오 동란 중, 그 총탄이 빗발치는 삼팔선을 세 차례나 오가시며 두고 온 땅을 돌아 보시곤 했다. 

 

그랬으나 “전쟁이 끝난 것도 아니고, 안 끝난 것도 아닌” 정전(停戰) 상태로, 이 강토는 남북 분단이 고착화 되어 버렸다. 하여, 오매불망 고토(故土) 수복을 희원하시던 선친께서는 끝내 그리던 귀거래사를 다 맺지 못하시고, 내 나이 겨우 여덟 살 때, 망향가를 부르시다 애석하게 귀천(歸天)하시고 말았다. 

 

모던보이셨던 당신이 켜던 그 애절했던 바이올린의 현이 지금도 우리 안에서 떨리고 있다.

 

아버님을 보내고 어머님은 기도로 당신의 자녀들을 온전히 주님께 맡기셨다.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먹이시고, 입혀 주셨다. 

 

온전한 믿음의 사람, 온전한(全), 열매(實)를 드리는(納) 전납실(全納實) 전도사님. 그분은 목회 승리를 거둔 자애로운 신앙의 어머니셨다. 동시에 자녀들을 튼실하게 길러내신 어머니 중의 어머니이셨다.

 

2019.05.08(수) 어버이 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