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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성품(3): 지식

2009.09.13 08:34

윤사무엘 조회 수:3262 추천:49

 

                                          “신의 성품(3): 지식”

                     The divine nature(3): knowledge

           

감람산 장로교회                                                                                     윤사무엘 목사


본문말씀:  호 6:1-6, 엡 4:11-16, 벧후 1:1-7

요    절: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벧후 1:5)

주    제: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기 위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더하자

교 독 문:  16번(시 64편),  예배의 부름: 잠 9:9-10,  예전색: 녹색

찬    송:  31장(개회),  451장,  102장(설교 후),  490장(축도전)


하나님께서는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에 참예하는 자로서 신의 성품을 회복하는 자로서 믿음의 기초위에 덕을 세워야 하며 그 위에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식이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며 믿음과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주신 선물이 지식입니다. 다른 피조물은 이런 지식이 없거나 지극히 제한되어 있습니다.


지식이란 에덴동산 중앙에 있는‘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보듯 뱀의 유혹을 받아 과실을 따먹은 아담과 하와는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이 하나님처럼 된 것보다 오히려 악을 아는 지식에 눈을 뜨게 되어 자신들의 벌거벗음을 알아 무화과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부끄러운 부분을 가렸습니다, 창 4:1에 보니 아담이 하와를 안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는 성적인 관계를 표현할 때 쓰는 말입니다. 마리아가 사내를 알지 못하던 나이에 성령으로 잉태되어 예수님의 성육신의 도구로 사용되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학문 즉 과학적인 지식을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지식은 대부분 믿음과 관련된 신적 지식을 말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And ye shall know the truth, and the truth shall make you free. 요 8:32)을 말합니다. 진리가 되시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는 죄로부터 자유함을 없습니다. 에베소 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바울 사도는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엡 4:13-15)  즉 예수님을 믿는 것 즉 아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13절에서 신앙과 신학의 관계에서 신앙은 신학에 우선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빌립보서에 보니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빌 3:8)고 했습니다.


잠언 9장 9-10절에 보니“지혜 있는 자에게 교훈을 더하라 그가 더욱 지혜로와질 것이요 의로운 사람을 가르치라 그의 학식이 더하리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명철(understanding)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것이 지혜자의 모습입니다.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는 외치기를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사 1:2-4) 고 범죄한 행위는 하나님에 대한 무지라고 책망합니다. 메시야 왕국을 예언하면서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 11:9)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한 모습이 천년왕국과 새하늘 새땅의 모습입니다. 호세아 6:3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고 합니다.


모든 교의학의 첫 장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독일어 Erkentniss, knowledge)으로 되어 있습니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 1권은 “창조주 하나님에 관한 지식”(1장~18장)으로 시작합니다. 그의 논조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인간에 대한 지식은 연관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1권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소개한 다음 이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를 말합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경을 떠나서 다만 우주와 인간 자신을 통해서도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자연계시에 근거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자연계시를 통해서는 구속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가질 수 없으며 성령의 경험도 할 수 없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조차 단편적이라는 뜻입니다. 즉, 인간은 자연계시에 의해서만은 구원의 神지식이나 구원의 신앙을 가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우리자신에 대한 지식은 상관관계 속에 있습니다. 칼빈은 자연인의 내적 자기이해, 혹은 인간의 이성이 스스로를 표준으로 하여 자기 자신을 척도하는 그러한 자기이해, 혹은 그 어떤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자기이해가 아니라 하나님의 현존에 의하여 노출된 인간의 자기이해를 말합니다. 하나님을 인식한다는 것이 무엇이며 이 하나님 인식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인식하기 위하여 우리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사랑과 경외는 경건의 주된 내용으로서 칼빈의 신앙개념은 이 경건으로 이어집니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 사랑, 경건이 바로 참다운 신인식의내용을 구축합니다. 칼빈은 경건을 정의하기를 나는 경외와 사랑의 합을 경건이라 부르는데 이 경외와 사랑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를 생각할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인간들의 지성 속에 씨 뿌려져 있습니다. 인간의 지성 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직관이 있습니다. 이는 자연적 본능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직관이란 종교의 씨앗입니다. 종교의 씨앗이 모든 인간들 안에 뿌려져 있으며 둘째로는 이들의 양심은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우상숭배도 이와 같은 종교성의 일그러진 모습입니다. 이 종교성이야 말로 학교에서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은 어디까지나 추상적이요 막연한 하나님이요, 구약과 신약에 의하여 특징 지워진 하나님이 결코 아닙니다. 이 하나님 지식은 인간의 무지와 부도덕에 의하여 질식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타락의 결과인 인간 본성의 부패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 지식은 결코 인간을 구원에로 인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무지 혹은 부도덕에 의해서 질식당하고 있거나 부패되어 있습니다. 어떤 이는 이 종교가 씨앗을 미신으로 표출시키고 또 다른 이들은 의식적으로 그리고 악의를 가지고 하나님을 저버립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진정한 경건을 결코 찾아볼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인간 속에 있는 종교의 씨앗은 뿌리 뽑힐 수 없습니다. 인간 안에 일종의 신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씨앗과 신성은 아주 부패했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의 최악의 열매만을 산출할 뿐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우주만물의 조성과 이에 대한 지속적인 통치에 나타나 있습니다. 인간의 최고의 행복은 하나님에 대한 참된 앎에 있습니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시 19:1-2).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다(시 19:6). 자연과학이나 인문과학을 연구하면 하나님의 지혜를 잘 알 수 있으나 이 방면에 어두운 사람들도 하나님의 작품에 나타난 조물주의 솜씨에 놀란다고 합니다. 인간의 본성을 명상할 때 마다 모든 인간 이외의 본성들 까지 통치하시는 한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고 이 통치로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를 믿게 되며 그를 예배하고 그를 부릅니다. 바꿔 말하면 기독교인으로서 구속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과 성령을 통한 이 구원의 적용과 삼위일체 하나님의 연관 속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을 때 자연계시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과 목적이 명백히 보인다는 뜻이요, 반면에 자연인들에게는 변명할 수 없을 정도로 자연계시가 나타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이 자연계시에 나타난 하나님을 모른다고 하자마자 양심의 고발을 받습니다. 결국 책임은 인간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인간정신 속에 종교의 씨앗내지는 하나님에 대한 직관을 심어주셨으나 이를 배양해서 열매를 맺지 못하니 그 책임은 인간에게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알려는 사람들에겐 누구에게나 성경이 꼭 필요합니다. 성경은 이들에게 길잡이와 선생입니다. 하나님께서 족장들에게 계시될 때 신탁이나 환상 혹은 인간들의 일과 사역을 통하여 계시되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은 저들 의 지성 속에 저들이 후손들에게 전승시킬 내용을 넣어주셨습니다. 이 진리가 계속적으로 가르쳐지며 계속 이 세상에 머물러 있게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저들 족정들에게 주신 신탁을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기록케 하셨습니다. 율법이 공포된 것도 이와 같은 의도에서 였으며 훗날에 예언자들이 이 율법을 해석한 것도 같은 의도를 갖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성경이 전하는 하늘의 가르침에 출발 하지 않고는 결코 참된 경건을 조명 받을 수 없으며 이 성경의 학생이 되지 않고는 올바르고 건전한 가르침을 결코 추호도 맛볼 수 없을 것입니다. 하늘의 가르침이 반드시 기록된 문서로 남아있어야 그것이 인간의 건망증에 의해서 망각될 수 없으며 인간의 실수에 의하여 사라질 수 없고 인간의 뻔뻔스러움에 의하여 부패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성경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그의 행하신 일들과 관련하여 생생하게 우리에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성령의 증거에 의하여 확인되어야 합니다. 이처럼 성경의 권위는 성령의 내적 증거에 의하여 확고히 확립되어야 합니다. 이 권위가 교회의 판단에 달렸다고 하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지금은 하나님께서 그의 신탁(=예언의 말씀)을 직접 하늘에서 매일 내려 주시지 아니하시고 이 하나님의 진리를 성경으로 기록되게 함으로써 영원히 기억되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 믿는 자들이 이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하늘에서 온 것으로 믿으며 이 성경말씀을 대할 때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들을 듣는 듯이 하여야 이 성경의 권위가 확보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성의 능력범위 안에서는 성경의 신빙성을 증명할 수 있는 증거들이 충분히 있습니다. 예언자들의 글들의 전승과 보존은 모두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여서 이것 역시 성경의 권위를 세웁니다. 그리고 사도들의 글인 공관 복음서의 내용상의 탁월성을 칼빈은 논합니다. 성경을 버리고 계시의 차원에로 날아가 버리는 열광주의자들은 경건의 모든 원리들을 내던져 버렸습니다. 칼빈은 이 성령은 곧 성경의 내용을 떠나서 있을 수 없다고 일하시지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성령으로부터 그 무엇이나 유익을 얻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열심히 성경을 읽어야 하고 이 성경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성경은 이교도의 모든 신들을 능가하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제시하여 모든 미신을 바로 잡습니다.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만드는 것은 합당하지 않으며 우상을 만드는 사람마다 참 하나님에게 반역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우리는 창조이래로 하나님의 한 본질과 삼위격을 배워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계시된 그리스도는 성경 해석의 열쇠라고 해야 합니다. 구약의 예언자들과 신약의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영에 의하여 말씀 하셨습니다. 이 그리스도의 영은 곧 말씀의 영으로서 이 말씀은 하나님이십니다.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소서.”(요 17:1) 이 아들은 태초부터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일하십니다. 성경에 의하면 거짓 신들과 구별되는 참 하나님의 모습은 이 창조주의 우주와 인간 창조를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제1장: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서로 관계가 있다. 그러면 어떻게 두 지식이 상호 연관되는가?

“인간은 먼저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고 나서 그분에 대한 명상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검토하지 않는 한 명백한 자기 자신의 참된 지식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한 일이다. 왜냐 하면 우리들은 명백한 증거에 의하여 우리의 불의, 더러움, 어리석음과 불순함 들을 심각하게 확신하게 되지 않는다면 항상 스스로에게 의롭고 완전하고 현명하고 신성한 것처럼 보이게 되기 때문이다”


제2장: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무엇이며, 이 지식은 어떤 목적인가?

“이처럼 경건한 신앙인은 이 창조주 하나님을 주님과 아버지로 인정하기 때문에 매사에 있어서 그의 권위를 높이고 그의 위엄 앞에 경외를 느끼며, 그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힘쓰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일은 합당하고 옳은 것이다.”

제3장: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선천적으로 인간의 마음속에 뿌리박혀 있다.

“인간의 지성 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직관(直觀)이 있다. 이는 자연적 본능이다”

그리고 제2권은 “그리스도 안에 계신 구속자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1장~17장)을 논하고 있습니다.


신의 성품에서 지식은 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바른 통로를 제공합니다. 주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에 주님을 바로 알아야 바로 믿고 바로 생명의 길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지식이 덕위에 세워집니다. 덕이 빠진 지식은 교만하게 합니다. 덕은 있는데 지식이 없으면 잘못된 방향으로 갈 수 있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지식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예수님을 아는 지식, 성령님을 아는 지식은 가장 고상합니다. “주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찬 102장) 성령의 은사 중 하나가 지식의 말씀입니다. 이 지식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 지식을 알고 나서 세상의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버릴 수 있었답니다.(빌 3:7-8) 호세아를 통하여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보니,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호 4:6)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날마다 충만해지기를 소원합니다. 예수님을 믿을수록 주님을 더 알아가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지식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주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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