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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의 이해’ - 돌이켜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면...

2008.05.04 09:45

김성찬 조회 수:3582 추천:56

'어린이의 이해’

                               돌이켜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면...

 

   이걸 갖다 버려?


 영화의 제목은 기억할 수 없지만, 여전히 생생한 감동을 주었던 한 편의 영화가 생각납니다. 에스키모인들의 생활에 관한 이야기가 그 영화의 줄거리였습니다. 눈 (雪)으로만 천지를 가득 메운 설원(雪原), 한 이글루에 노모(老母)를 모시고 사는 신혼부부가 이 영화의 주인공입니다. 평화롭고, 행복하기 그지없던 이 에스키모인 가족들에게 어느 날 노모의 죽음이라는 슬픔이 석양처럼 깃들게 됩니다. 누구나 그런 것처럼 이 숭고한 죽음 앞에 선 노모는, 자신이 살아오면서 터득한 삶의 지혜와 방법들을 나이 어린 며늘 아이에게 하나하나 일러 주면서 숨을 거두게 됩니다. 임신과 출산의 비밀, 그 대처 방안도 필수과목이었습니다.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울어야 하는 데 행여 울지 안거든, 엉덩이를 철썩 때려서라도 울려야 하느니라. 애들을 울면서 크는 거란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일러 주고 노모는 하늘나라로 떠납니다.

 

그 후로 몇 달이 지나 새아기가 진짜 아기를 낳았습니다. 엉덩이를 때리기도 전에 응애 울면서, 예쁜 고추로 시원스런 물줄기를 뿜어댔습니다. 젊은 엄마, 아빠는 이 놀라운 생의 신비에 환희를 맛보며, 신나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응애 하고 입을 벌려 우는 아이의 입속에 분명히 있어야 할 새하얀 이빨이 하나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이럴 수가? 어찌 이런 일이 우리에게, 하필이면 우리 아기에게 일어 날 수 있단 말인가? 이걸 갖다 버려? 아니야,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충격 속에 서로 부둥켜안고 밤을 지새우던 풋내기들은 이렇게 굳은 결의를 서로 다집니다. 비록 우리가 이빨 없는 병신자식을 낳았지만, 그래도 이 병신자식은 우리 자식이다. 그래, 힘써 키워 보자. 그렇습니다. 갓 태어 난 아이는 이빨이 없다는 사실을 그 노모님께서 일러 주지 않고 떠나셨던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실소(失笑)를 금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미숙한 에스키모인 부부가 바로 우리 부모 된 이들의 자화상이 아닐까요. 세상에 훈련 없이 가능한 것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우리는 예행연습 없이 자녀들을 양육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공교육 기관에서 교사 자격증을 하나 취득하는데도 16년 이상의 교육이 필수적인데, 부모 된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영적이든 간에 그들을 이해하지 못할 때, 우리는 그들을 눈밭에 갖다 버리게 될지도 모릅니다. 아니, 이미 그들을 이해하지 못해, 황량한 들판에다 내 팽게 쳐 버린지도 모릅니다.

 

여기, 우리 함께 그들을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 함께 나누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전제하거니와,  자녀를 양육한다는 것이 현재 완료가 아니고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에 아무도 자기 자랑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두려운 마음으로, 어떤 결의를 속으로 다지면서 진솔하게 이런 글을 정리해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해서(海恕)를 빕니다.


돌이켜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면...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18:3).”  저는 이 말씀을 이렇게 생각해 봅니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가정천국을 이룰 수 없느니라. 너희 부모가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될 때 그들에게 천국의 맛을 보여 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말입니다.


어른과 아이

 

생덱쥐베리는 ‘어린왕자’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어린이가 자기가 본 예쁜 집을 이렇게 표현 합니다.“창틀에는 제라니움이 피어 있고 지붕에는 비둘기들이 놀고 있는, 곱고 붉은 벽돌집을 보았어요.” 그런데 어른들은 아이의 이 설명만으로는  그 집이 어떻게 생겼는지 생각해 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른들에게는 이렇게  “아빠, 10억짜리 집을 봤어요”라고 말해야 이해한다는 것 입니다.

 

다른 이야기를 하나 더 해 봅시다. 오랜만에 아버지와 아들이 나란히 나들이를 다녀왔습니다. 산과 들로  나비처럼 날아 다니다가 돌아 왔습니다. “오늘 기분 어땠니?” 엄마가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응, 엄마 오늘이 내 인생의 최고의 날이었어요. 너무도 신나고 즐거웠어요”라고 아들이 대답 했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도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땠어요?”  “말도 마, 지겨워 죽을 뻔 했어.” 남편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손쉽게  어린 아이와 어른의 차이를 살펴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쌍둥이도 세대차를 느낀다는 4차원적(?) 세상에 사는 우리에게, 어른과 아이의 차이는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차이를 아예 당연시해 버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고는 끝입니다. 당연한 것을 가지고, 결론이 뻔한 것을 가지고 이러쿵, 저러쿵 하지 말자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어른도 어린 아이 같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아니, 우리 어른 가운데도 어린아이 같은 ‘어른아이’가 있다고

일러 주고 있습니다.


누가 어린아이입니까?

 

 세상에는 어른과 아이만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어린아이가 아니면 어른일 뿐 다른 무엇일 수 없습니다. 어린 아이의 대표적인 모범을 성경에서 보인 아이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예수님께 갖다 드린 아이입니다. 이름도, 초상화도 한 장 없는 단지 아이일 뿐 입니다.그런 아이입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바로 그 옆에 어른이 서 있었다고 말합니다. 빌립과 안드레입니다. 돈 계산이나 하고 앉아 있던 빌립과 오병이어(五餠二魚)를 우습게보고 있던 안드레입니다.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기적은 어린아이로 부터 시작한 것입니다. 계산속에 찌든 영혼은 어른이고, 순수한 헌신은 어린이의 몫인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더 나아가서 어른이면서도 아이인 한 여인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2장에 나오는 여인입니다. 옥합을 깨뜨린 여인입니다. 옥합의 가치를 삼백 데나리온으로 평가 절하한 가룟 유다가 어른이라면, 폴 틸리히가 명명한 ‘거룩한 낭비’의 주인공인  옥합을 깨뜨린 여인은, 아이였던 것입니다. 이 거룩한 낭비 앞에서 주판알을 튕기는 물신 숭배자. 기적이 없다고 기적을 부인하는 화석 같은 마음의 소유자. 어린 아이의 소박한 꿈과 소망을 무참히 짓밟고 선  그 이름 위대한 어른. 진정 당신은 어른입니까? 아이입니까?


견딜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

 

밀란 쿤데라는  오늘 현대 인간의 병적 정신 상태를 가리켜 견딜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고 간파 했지만, 어린이는 우리, 어른들이 함부로 업신여겨도 괜찮은 존재가 아니라, 마땅히 존경을 받아야 할 대상, 견딜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이라는 것입니다.

 

한번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 딸아이가 세는 나이로 네 살적의 일입니다. 나는 그동안 늘 딸아이에게  “예리야, 너 테레비를 그렇게 가까이서 보면 안 돼, 그렇게 가까이서 볼려면 차라리 테레비 속으로 들어가서 봐”라고 말해 왔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하루 저녁, 딸아이와 함께 텔레비전을 시청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나는 얼굴을 씻고 난 후라 안경을 벗은 상태여서 나도 모르게  텔레비전 쪽으로 놓인소파의  앞쪽 귀퉁이에 앉아, 테레비에 바짝 얼굴을 들이대며 시청을 하게 된 것입니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는데, 갑자기 어린 꼬마가 “아빠, 아빠는 왜 테레비를 그렇게 가까이서 봐?”라고 반격을 가해 왔던 것입니다. ‘뭐라고 변명하나?’ 속궁리하던 나는 이렇게 우격다짐으로 밀고 나갔습니다. “임마, 아빠는 어른이잖아!.” 그런데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겨우 네 살 박이가 이렇게 되물어 온 것입니다. “치, 다 사람이잖아! 그럼 아빠는 짐승이야?” 나는 갑자기 둔기로 머리통을 얻어맞은 것처럼 눈앞이 아찔했습니다. ‘다 사람이잖아...’ 이 말이 한동안 나의 뇌리 속에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어린 딸아이가 결코 만만찮은 나의 삶의 당당한 맞수로 등장했다는 사실을 결코 부인 할 수가 없었습니다. 견딜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이라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난 알아요’라고 떠들지 않아도, 아이들은 다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단 한 번의 예행연습 없이 부모된 어른을 눈감아 주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 부모 된 이들은 결코 부인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느 집사님 자녀 남매가 교회엘 와서 선생님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누다가, 동생 되는 사내아이가 이렇게 불쑥 말했습니다. “선생님, 어제 우리 엄마, 아빠 서로 싸웠다.” 그러자 누나 된 아이가 정색을 하며 가로막고 서더라는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 아무에게도 하지 말랬잖아.” 이렇게 말입니다. 누가 누구를 돌보고 있는지, 봐 주고 있는지 분간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다 사람인데, 우리는 자녀들을  지금도 멍들게 하고 있지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교육학자는 자녀들이 낙담하고, 쓰라린 상처를 느끼게 되는 경우를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은 어른들의 어린 아이에 대한 *신체적 학대,*심리적 학대 (창피를 주거나 존중하는 마음으로 대하지 않을 때),*무시하는 것(넌 몰라도 돼!)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어린이는 하나님께서 우리 어른과 똑같이 창조하신 인격체입니다. 떨어지는 눈꽃송이가 다 같아 보여도 각기 그 결정체가 다르듯, 갓 태어난 어린 아이도 각기 다른 발바닥 무늬를 찍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린 아이 하나, 하나도 모두 개성을 지닌 인간이라는 사실을 결코 간과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돌이켜 어린아이 같이 됩시다.

 

모모라는 어린아이가 있습니다. 독일의 동화작가 미카엘 엔데가 탄생 시킨,신비스런 매력을 지닌 소녀입니다. 이 소녀는 고아이며, 동시에 거지입니다. 그래서 이 소녀는 여느 애들과 같이 교육을 받거나 특별한 재능을 개발 할 수도 없었지만, 마을 사람들은 이 아이가 어떤 문젯거리도 해결해 줄 수 있는 엄청난 능력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독특하고 신비한 재능, 그것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단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 것뿐이었습니다. 가만히 앉아 그들의 문제를 주의 깊게 듣고만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오늘의 상담학은 내담자 중심의 상담을 적극적으로 우리에게 권하고 있습니다. 상담자가 시시콜콜 어떤 대안을 열정적으로 제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담자가 자기 이야기를 털어 놓을 때, 단지 귀 기울여 들어만 주면 스스로 문제를 해결 해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모모의 경우나, 내담자 중심의 상담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건성으로 듣는 것, 흘려 듣는 것(hear)’이 아니라 ‘귀 기울여 듣는 것(listen)’을 말하고 있습니다. 귀 기울여 들어 주는 것이 매우 소중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생명을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생명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생명의 고동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프랑스의 저항 시인 P.엘뤼아르(Paul Eluard)는 이렇게 말합니다.“서로 귀 기울이고/서로를 이해하고 서로 사랑하기 위해/인간은 태어났다.” 

 

그런데 이 경청(敬聽)이 어린아이들의 몫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어른들이 무책임하게 내 뱉는 한마디 말도 그들은 결코 흘려버리지 않습니다. 그들은 반드시 기억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 기억을 우리, 어른들에게 말하지 않을 뿐입니다. 그들은 큰 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새들과도 꽃들과도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우리 어른들이 듣지 못하는 천사의 음성도 듣고 삽니다. 어린 사무엘은 제사장 엘리가 듣지 못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오병이어(五餠二魚)의 어린이는 기적이 부르는 소리를 듣고 자신의 모든 것을 가지고 예수님께 달려갔던 것입니다.

 

그들이 잘 들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성경은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18:4)”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잘 듣게 된 것은 ’자기를 낮추었기‘ 때문입니다. 누가 큰 자인가, 다툼이나 일삼던 어른 제자들은 자신들이 내지르는 소음 때문에, 혈기 때문에 천국의 비밀, 진정 높아지는 세미한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 주님께서는 우리의 현실을 외면하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시지 않는가, 버럭 버럭 소리나 질러대는 사람들은 결국 자기 소리 밖에는 아무것도 들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주판알을 튕기느라 정신없는 계산속에서 기적은 움트지 않습니다. 자기를 낮출 때, 부복(俯伏) - 고개를 숙이고 엎드릴 때 기적의 메시지를 듣게 되는 것입니다.

 

돌이켜 어린아이가 되고 싶습니까?

 

먼저, 그들에게 배웁시다. 큰 귀를 소유한 어린아이와 같이 됩시다. 프란시스 베이컨의 말대로 우리가 버려야할 우상, 재잘거리는 소음에 물든 ’시장의 우상‘을 버리고, 갈멜산 우로(雨露) 위에 내리는 세미한 음성을 듣는 우리가 됩시다. 가정의 해는 바로 여기서, 어린 아이와 같아지는데서 출발해야 할 것입니다.

 

알고계십니까?

아이들은 안 듣는 것 같지만 다 듣고 있고, 어른들은 잘 듣는 것 같지만 전혀 듣지 않는 귀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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